모양이다. 이
불이 말려 올라가 작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몸을 옆으로 웅크린 채 색색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이 들
어있었다. 왕 자신도 꿈속에서 꽃을 잡듯이, 품에 다가온 어린 안해를 보호하는 것처럼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형국이었다. 중전의 향기로운 머리타래가 턱 밑에 반쯤 잠겨 있었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깊은 밤. 천지가 적적한데 어디선가 밤새 소리가 아득하게 스며든다.
보름이 다 차
오니 맑은 달빛은 그저 휘영청 밝다. 지창(紙窓)을 타고 들어온 환한 달빛 덕분에 왕은 방안
의 기물들이
며 왕비의 여린 얼굴까지 전부 분간할 수가 있었다.
팔 안에 반쯤 들어온 작고 따스한 동체. 왕은 색색 잠들은 어린 왕비를 새삼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열 여섯. 아직도 볼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계집아이였다. 꽃씨를 뿌리면 아기를 가
질 수 있다
고 믿는다는 순진한 어린 것. 허수아비 노릇 시키려고 애초에 작정하여 뽑아들인 이름뿐인
주상 당신의
못난 지어미.
방향(芳香) 짙은 꽃들이 난만히 핀 화려한 화원에서 노닐다가 문득 울타리 밖의 볼품없는
풀꽃을 본 느
낌이랄까, 보잘 것 없고 어리고 가냘픈, 그러나 아주 순수한...
잠이 든 어린 왕비를 내려다보며 왕은 문득 자신이 잃어버렸던 그 무엇을 보았다고 느꼈다.
아슴하게 떠오르는 것.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무엇... 어린 날의 순수랄까. 동경이랄
까... 더럽혀
지지 않은 한없이 정결하고 맑은 그 무엇...
"정말 의완 누이 같다..."
왕은 보드랍고 작은 입술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며 중얼거렸다.
기억에 남아있는 희미한 그림자. 이렇게 작고 여리고 맑았던 누이였다 저절로 왕의 입술 사
이로 희미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밤 안개 같은 어둠이 왕의 깊은 눈에 가라앉았다.
어린 그가 심술을 부려도 늘 양보하고 웃어주고 다정하던 누이. 창빈 어마마마께서 항시 나
만 업어주어
도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던 다정한 누이. 유밀과 하나만 생겨도 꼭 감춰 두었다가 살그머
니 손에 쥐어
주던 다정한 누이더러 짐은 한번도 누이를 좋아하오 말하지 못했어... 항시 옆에 있을 것이
라고 생각했
어.... 어느 날, 그 누이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홀연히 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한
번도 미리 생
각하지 못했었다.
그 순간이다. 고구마 줄기 따라 줄줄이 뿌리가 따라나오듯이 애써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던
괴로운 시간
의 기억들이 연달아 솟아났다.
선대왕께서 흥하시고 보위에 오른 지 벌써 햇수로 아홉 해 째. 돌이켜보면 오직 후회할 일
과 부끄러운
일과 민망한 일뿐이었다. 왕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괴고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허기는 누이 하나 얻자고 짐이 망쳐버리고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가? 짐이 저지른 실
덕이 어디
한 두 가지여야 말이지...'
왕은 이렇게 홀로 깨어있는 시간이,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응시하게 되는 이 고요함이 너
무 무섭고 두
렵다고 생각했다. 이런 때면은 말은 못하였되 스스로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심란해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도도하고 강하니 그저 앞만 보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질 것이다. 허나
심중에 새겨
진 회한과 고통과 번뇌는 오히려 보위에 앉은 왕이기에 더 깊고 더 많은 것. 적막한 밤에
홀로 깨어 어둠
을 응시하는 이 순간. 왕은 항시 심중으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이 더욱더 진해지고 더 강
렬해진 것을
느낀다.
고개를 돌려 왕은 색색 잠이 든 어린 지어미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비가 의완 누이를 닮아서 짐이 새삼스럽게 별 생각을 다하게 되는 것이로구나. 휴우- 보고
싶느니... 창
빈 어마마마...'
왕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없이 어두운 밤의 그늘을 깔고 쓸쓸한 낯빛을 한 채 북
창을 응시하
였다.
-"저 요망한 것을 기어코 얻으시려거든 이 어미부터 죽이고 하시오! 오직 주상 한 분 바라
보고 살아온
이 어미 간청이니 제발 저 요망한 것에 미혹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시오, 전하!"
희란 누이 아니면 딱 죽어질 것이오! 하고 나선 사춘기 왕의 철없는 고집. 무작정 내 맘대
로 하리라 깡고
집에 생억지를 부려댔다. 열 다섯 어린 주상이 비오는 날 사냥터에서 누이와 금단의 연분
맺은 후에 그
녀를 곁에 두고자 물불 아니 가리고 날뛰어 온 궐을 뒤집어놓고 천지분간 못하던 그때의 일
이다. 상감마
마를 길러주신 분이니 선대왕 후궁이신 창빈 윤씨. 생모는 아니되 생모마마 못지 않은... 아
니, 생모마마
라 할 지라도 더 이상 정성일 수 없었던 분. 왕은 고적한 한숨을 다시 허공에 뿌렸다.
'오죽했으면 희빈어마마께서 돌아가실 적에 창빈 어마마마 손을 잡고 짐을 부탁한다 하였을
까? 그런데
그런 분을 짐이 머리 자르게 하고 정업원에 내버렸으니... 짐은... 참으로 사람이 아닌 것이
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야.'
명색이 이 강토의 지존인 전하이시다. 딴 이도 아니고 사촌누이와 연분 맺어 후궁 들인다
나설 참에 곧
고 고결한 그 분이 도무지 그런 꼴은 보지 못한 것이라. 창빈마마, 시퍼런 가위를 품고 대궁
에 들어오시
어 왕 앞에 엎드려다.
"의완이 죽어지고 이 어미가 산 것은 오직 주상께서 이 어미 곁에 계셨던 덕분. 이 어미 목
숨은 주상의
것이니 이 어미 모든 살과 피를 베어 주상을 키웠소이다! 오직 바라기 전하께서 성군(聖君)
이 되어지어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이 어미의 보람이고 낙이었으며 광영이라. 돌아가
신 선대왕께
서도, 희빈께서도 오직 이 몸에게 주상을 부탁한다 유언하시고 가신 것이라 주상께서 이리
길을 잘못 들
어 미혹에 빠진 것은 키운 어미인 이 창빈의 부덕, 하니 이 목숨과 바꾸어 주상 실덕 바르
게 잡아야하는
것이오. 주상,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제발 정신차리고 밝은 눈을 뜨시오!!"
구구절절 애통한 고언(苦言), 창빈마마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비단 옷섶을 적시었다. 피 토
하는 간절한
충정이었으되 한참 맹목이엇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미쳐 날뛸 때이니 어찌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랴? 최
후로 창빈마마는 왕에게 생고함을 쳤다. 사생결단하고 반대하였다.
"그 요망한 것과 이 어미 둘 중에서 택하시오! 그 계집 아니 버리시면 이 어미가 머리 자르
고 정업원에
들어 갈 것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버선발로 뛰어내려서라도 창빈어마마마마를 만류해야 한다고 머리
로는 생각
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눈이 반은 뒤집혀 있었다. 밤마다 희란마마 속살거리기를 같잖은 계
집이 그래보
았자 선대왕 후궁인 주제에 감히 주상을 경계하고 제가 윗전 노릇이라 한다던가 하는 참소
(讒訴)에 눈
이 뒤집혀졌었다. 어마마마만은 짐을 이해해주셔야 할 것인데 이리 무작정 짐을 꾸짖으시고
누이를 나
쁜 사람으로 몬다던가 싶어 원망이 극에 달한 터로 결코 해서는 아니되는 말을 해버렸다.
생모마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키워주신 분에게 감히 "머리 자르고 나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
오!" 하고 가
위를 왕 당신 손으로 그 분 발치에 던져주고 방을 차고 나온 것이었다.
'그 길로 경덕궁 어마마마들 모두다 정업원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지. 짐은 길러주신 어마마
마들을 짐 손
으로 쫓아낸 천하의 불효자다 되었고, 강상(綱常)의 기본을 져버린 폭군이 된 것이라. 짐이
가위를 던지
자 짐 눈을 올려다보시던 창빈 어마마마 눈빛이 바로 비수였었다.'
왕이 있는 북쪽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고 북창(北窓)을 막아버리셨다는 분... 다시는 그를
보지도 않
고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짐이 아무리 다시 돌아오십시오 하고 싶어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차
마 어마마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아아, 짐이 왜 그랬을까? 그때 정말 왜 그렀을까? 정말
희란 누이가
어마마마들 다 버리고 택할 만큼 짐에게 귀한 여인일까? 주상된 위엄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얻을 만큼
가치있는 여인이었을까...?'
어쩌면 누이에 대한 은애지정보다 짐은 그저 떼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왕은 비로
소 자신을
돌아본다. 그때의 광증을 냉정하게 헤아려보게 되었다.
'짐은 그때 왕된 위엄이라 하여, 무조건 짐 마음대로 하여야한다는 방자한 고집이 저항을
받은 것이라
화가 난 것이었다. 짐은 그저 자존심에 그 모든 생억지를 해치운 것이었어.'
이제야 비로소 갈피잡게 되는 모든 과거의 실책들. 왕은 5년전, 희란마마를 얻기 위해 벌였
던 모든 일들
이 어쩌면 자신은 왕이니 하고싶은 일은 무작정 다 이루고 하여야 한다는 자존심과 고집에
서 비롯된 광
기는 아니었을까 반성하였다. 하긴 그것말고도 왕의 가슴에 박힌 대못들은 많고도 많다. 한
분뿐인 할마
마마 왕대비전에게 지은 죄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이더냐?
'짐이 친정(親政)한다 했을 적에 비록 숙부(좌우정 정안로)의 뜻이지만, 할마마마 가문서 들
어온 인재들
을 할마마마 눈과 귀를 가리고 전횡한다 작살을 내지 않았더냐? 게다가 희란 누이를 받아들
이지 않았다
하여 이 오 년 동안 오직 한 분뿐인 할마마마께 한번도 문안인사도 들이지 않았어, 짐이 어
찌 곧은 선비
들에게 옳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냐? 짐더러 천하의 폭군이라 할 만 하지... 하물며, 입버
릇도 고약하
니, 감히 할마마마더러 창희궁 늙은 것이라 막말하는 누이 입버릇 경계하지 못하고 같이 웃
음지었으
니...... 휴우, 짐은 실로 훗날 저승에 계신 아바마마께 피터지게 종아리를 맞을 것이다. 돌아
가실 적까정
당부하시기 부대 왕 된 위엄 더럽히지 말고 백성 사정 같이하는 어진 군주가 될 것이며 인
의 효덕 지키
는 어진 사람 되라 그리 하였는데... 지금껏 짐은 아바마마 그 유훈(遺訓) 어느 하나도 지키
지 못하였으
니... 아바마마, 욱제가 실로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전하, 문득 손등으로 솟아나는 눈물을 문질렀다. 용루(龍淚)였다. 이렇게 깊은 밤, 왕이 홀로
깨어 아무
도 모르는 심중의 괴로움을 씹고 계시는 줄 천하의 누가 알 것이냐?
'돌이켜보면 그저 후회이고 실책뿐인데... 그렇게 할마마마, 어마마마들 다 척지고 아프게 한
짐인데...
이제는 이 가련하고 여린 사람까지도 아프게 하는구나...'
왕은 손을 뻗쳐 어린 안해의 얼굴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보드랍고 따스하였다. 한 손에 다
차는 여린 얼
굴, 왕은 이불 바깥으로 나온 왕비의 손을 잡아 달빛에 비추어보았다. 가늘고 여린 그 손가
락을 살짝 어
루만지고 자신의 손과 마주 잇대어도 본다.
비(妃)는 참 작고 여리고 곱구나...
왕은 방긋이 웃었다. 왕 당신의 커다란 어수에 대면은 겨우 반도 안 되는 작디 작은 손. 말
갛고 투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