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목청으로 확인하시었다.
"뭐, 뭐라 하시는 게냐? 지금 주상이 남은 두 처자를 후궁으로 아니 들인다 하신 것이냐?"
"내전이 화락함이 강상의 기본이다. 여인의 투기는 왕왕 사내의 발목을 잡고 국사를 그르치
는 법. 짐은
아예 내전의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 함이니라. 허니 비로 간택된 처자만 남기고 나머지 두
처자는 사가로
내보내라. 복잡한 궐 안에서 뒷방 처지야 말로 망극한 일임에랴. 짐은 어명을 내려 삼간에
오른 두 처자
를 특별히 다른 곳으로 혼인할 수 있게 윤허한 터이다. 허니 두 처자는 사가로 나가 양가로
혼인할 지어
다. 이리 하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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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일년이 넘게 끌기도 하는 국혼이라는 대사를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이 부랴부랴 치른
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을 백성들이야 알 필요는 없는 것이고, 다만 경사스런
국혼을 맞이
하여 죄수들을 방면하여 주고 도성기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며 환갑을 넘은 노인들에게
베 한필씩 하
사하시는 거한 은전을 베푸신다 하니 그 아니 좋을시고!
납채가 끝나고 예물로 혼인의 징표를 보내는 납징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삼주야 후에 가례
일을 정하였
다고 중전마마로 간택되신 소혜아씨에게 알려졌다.
대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정신이 하나도 없이 호랑이같이 엄하고 대쪽같이
매서운 상궁
들에게 열두시진 내내 잡혀서 중전마마되실 엄한 교육을 받는 아기씨.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밤마다 왕의 치켜뜬 눈만 생각하여도 어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상감마마인 줄도 모르고 감히 불한당을 눈흘긴 자신의 경솔함을 작은 주먹으로 무수히 쥐어
박았다. 인
제 혼례를 치르고 궐로 들어가면 그 분이 분명 그녀를 두고 버릇없다 걷어찰 것 같았다. 설
핏 보아한데
도, 짙은 검미(劍眉)에며 힐쭉 치켜올라간 입술 꼬리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성질머
리가 보통
은 아니게 보였다. 그런 사람이 아무 짝에도 볼 것 없는 저를 중전삼은 이유가 무엇일까?
괘씸한 너를 두고두고 좀 곯려먹자 이런 뜻이 아닐까?
그녀가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은 왕대비전이 거처하시는 창희궁과 가까운 인현궁으로 정하여
졌다. 대궐
에서 엄숙하게 광산김씨 익현의 여아가 왕비로 책봉된 의식이 끝나고 왕은 사신을 보내 그
녀를 정식으
로 왕비책봉을 하였다. 영의정이 금책과 옥인을 비단이 깔린 쟁반에 담아 중전마마에게 받
쳤다.
이제 겨우 열 다섯. 어린 소혜 아기씨. 상궁들이 날치며 잡아채는 대로 끌려가 궐에서 내려
보낸 장엄한
적의를 차려입혀져, 무거운 어여머리 하고 황금과 옥으로 꾸며진 떨잠 세낱 꽂은 채 무겁디
무거운 중전
마마 책봉을 받았다.
한번이라도 입을 달싹여 나 싫소, 이런 일을 나에게 하지 마오 할 여지도 주지 않고 몰아친
일들이다. 정
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친영날. 그날 아침 처음으로 중전마마, 현성부원군으로 봉작받은 친정
아비 김익
현을 다시 만났다. 계산골 초당을 떠난 지 꼭 달포하고도 일주야가 지난날이었다.
이런 망극한 일이 어디 있을꼬!
아비이되 딸을 딸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비이되 아버님에게 절 한번 하지도 못하는 팔자로
만난 기막힌
부녀지간. 아비가 딸에게 허리굽히고 바닥에 엎드리어 절을 하는데 저절로 두 얼굴에 똑같
이 주르르 눈
물이 흘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무릎 곁에 다가앉아 정답게 이러 하셔요. 저러하였니 정담을 나누던
부녀지간이
오늘날 이렇게 멀고먼 사이로 변하고 말았구나!
넓디넓은 방 사이, 고귀하신 중전마마의 옥안을 가리는 주렴이 쳐져 있으니 가련한 딸아이
그 얼굴이 어
찌 변하였나, 부친의 병약한 처지가 얼마나 좋아졌나 알아 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항상 조심하시어 모든 것을 가리옵소서."
"예, 명심하겠나이다."
"왕대비전 이하 궐의 어른들에게 순후하게 대하시옵고, 들어도 못들은 척, 보아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르
는 척 그저 웃음으로 넘기시고 중궁전의 위엄을 간직하셔야 합니다."
"아버님의 가르침을 각골명심하겠습다."
지금 아비 김익현이 얼마나 피 토하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아직은 모르는 어린 중전
마마. 똑똑한
목소리로 걱정 마시라 대답하는데...... 궐에 들어가시어 어린 중전마마가 당할 서러운 일들을
제 입으로
는 차마 말 못하는 억하심정이라. 속타고 애통한 늙은 아비의 금관조복 자락에 흠뻑 눈물이
흘렀다.
'우리 가엾은 중전마마. 저 어린 나이로 구중심처 궐에 들어가시어 얼마나 수모당하시어야
하나. 허구헌
날 고적한 뒷방차지. 요망한 월성궁의 계략에 휘말려 더없이 많은 아픔을 견뎌서야 하는 것
인데...... 일
월성신, 천지신명이시어. 그저 굽어 살피사, 저 가엾고 어린 우리 중전마마를 도와주소서.'
왜 늙은 아비가 저토록 서럽디 서럽게 흐느끼는지 모르는 중전마마. 제가 궐에 들어가면 다
시는 못볼 것
을 두려워한 탓이라고만 생각하였다. 몸을 일으켜 주렴을 손수걷고 아버님 곁으로 다가가
야윈 손을 다
정스레 잡았다.
"제가 궐에 들어간 후에도 하서를 종종 보낼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궐에 오시어 저를 보아
주시면 되지
요. 근심 마옵소서, 아버님.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 소혜. 몸이 부서져라 중궁전
의 위엄을
배우고 익힐 것입니다."
"부원군께서는 경사스러운 날 망극한 눈물을 그만 그치시지요. 중전마마께서 심란해 하시리
라."
중궁전의 지밀상궁인 윤상궁도 옆에서 어질게 만류하였다. 이러는데 바깥에서 상감마마께서
조만간 별
궁에 도착하시리라 하는 기별이 들려왔다.
서쪽 햇살이 차일 친 경덕궁의 마당에 따사롭게 깔리는 시간. 구장복에 면류관으로 성장하
신 상감마마
께서 어가를 타고 만조백관을 거느린 채 듭시었다. 미리 마련된 초례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속내야 어
떻든지, 초례청에 선 주상의 아름다운 위엄은 눈이 부시었다. 훤칠한 미장부이신데다 남들
앞인지라 만
면에 어진 미소를 입가에 억지로라도 머금고 계시니, 경사중의 경사로다.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백년해
로할 신부를 기다리시누나.
이때 풍악이 울리고 남쪽 행각을 넘어 아름답게 성장한 여관들이 적의와 큰 머리로 단장한
어린 중전마
마를 모시고 나타났다.
술 석 잔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서로 엎드려 절을 하니 청실홍실의 인연이 단단하게 묶여졌
다. 마음은
아직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딴 곳에 가 있으되 몸은 둘이면서 하나라.
이렇게 하여 아홉해 만에 텅빈 성덕궁의 교태전이 주인을 찾았다. 사직은 든든한 반석이 되
리니. 국모를
모시게 되었고 천지간 외롭고 마음을 둘 곳 없어 방황하던 왕의 허전한 주변에 따사로운 온
기를 줄 안해
가 들어오신 것이라.
어리나 영명하고 어질다 벌써 소문난 중전마마께서 상감마마의 마음을 잘 잡고 냉큼 회임하
시어 덩실하
니 원자를 생산하여지고. 그리하여 단국의 하늘을 가린 월성궁의 달그림자를 몰아내시는 태
양빛이 되고
지고, 엎드려 두분 지존마마에게 절하는 올곧은 중신들의 마음은 오직 한결 같았다.
두렵고도 긴장되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중전마마. 상감마마의 옆에 서서 상궁들의 부
액을 받으며
어도를 걸어갔다. 금관조복에 옥홀을 들고 허리를 굽힌 중신들 사이를 지나갔다.
화려하게 단장된 중궁전의 가마가 그녀를 태우고 대궁으로 들어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아,
망극하고 감
사하여라. 상감마마께서 손수 어수를 들어 중전마마가 타실 가마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
아닌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왕이 싱긋 웃었다. 단국의 국왕은 대국의 미남 반악보다도 늠름하고 아
름답다 소문
나지 않았던가? 신랑의 아름다운 미소 앞에서 어린 중전마마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여린
방심이 흔들
리기 시작하였다. 상궁들이 이르기를 그녀의 신랑은 지존으로 떠받들음만 받고 자라 인정머
리 없고 엄
하고 심술맞다 하였다. 성미 또한 도도하고 급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염 허연
중신들에게도
너라고 삿대질하고 막말하고 열분이 치밀면 용상에 앉아 발을 그르며 상소 두루마리를 얼굴
을 향하여
냅다 던져버린다고 하였었다. 그러니 그저 왕 앞에서는 순명하고 말조심 하옵소서 상궁들은
간택 그날
부터 지금까지 중전에게 세뇌를 시켰다. 그런데 그런 분이 손수 어려운 자리임에도 불구하
고 중전을 위
하여 가마문을 열어주시다니. 그저 황홀하고 감사하였다. 자기도 모르게 중전마마 역시 입가
에 상긋 미
소를 짓고 말았다.
허리를 굽혀 가마문을 닫아주며 왕이 살그머니 속삭였다.
"못난 것이 웃으니 그 형상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신부를 데려가는 왕의 장엄한 행렬이 시작되었다.
육십 여명의 항색 옷을 차려입고 시끄럽게 연악(宴樂)을 연주하는 취타대을 앞장세우고 군
기 엄연한 병
정들이 행렬을 지어 인도하는 가운데 일산과 도끼와 나발을 받쳐든 내관을 앞에 두고 왕이
탄 어가가 지
나갔다. 그 뒤로 중전마마 타신 화려한 덩이 중궁전 행장을 앞장세우고 뒤따랐다. 길 양쪽에
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국혼의 광경을 구경하려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행
렬은 어느덧
성덕궁의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노을이 발갛게 깔리는 길을 지나 중전마마 타신 덩은 교태전 앞에 다다랐다. 교태전의 서온
돌에서 왕은
왕비와 첫날밤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밤이 물렸다. 사람들이 물러가고 상감의 초야를 준비하는 중궁전 궁녀들의 손놀림과
발놀림만이
분주한 가운데 마루 하나 건너 서온돌. 번잡스런 구장복을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게 도포 차
림이 된 전
하. 서온돌로 건너가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립한 내관을 손짓하여 불렀다.
"누이는 어디 있느냐?"
"월성궁 마마께옵서는 이미 하명 받으신 대로 금원의 운지당에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알았다. 짐이 지금 그리로 들 터이니 술잔이나 마련해 두어라고 알려라."
"분부 받들겠나이다."
왕은 신부가 기다리는 서온돌 쪽은 본 척 만 척 마루에 서서 발을 내밀었다. 냉큼 내관이
발에 태사혜를
신겨드렸다. 하마대 앞에 시립한 구종에게 손짓하였다.
"말에 등자 올렸느냐?"
"예, 전하."
"알았다. 가자."
휙하니 말등에 올라탄 전하. 야속하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태전을 벗어났다. 말을 달려
금원의 아름
다운 별각에 이르렀다. 버선발로 뛰쳐나와 두 팔을 벌리는 풍염한 누이의 달콤한 몸을 끌어
안았다.
"대인난(待人難). 대인난(待人難). 마마를 기다리는 신첩의 가슴이 까맣게 녹아버렸습니다.
새 정에 취
하여 늙은 누이 버리시지는 않으실 지. 흑흑흑. 마마. 이 마음을 어찌 달래야 할까요?"
왕은 쯧쯧 혀를 차며 달빛에 처연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가련한 사람 같으니. 말로는 짐
의 혼인을 의
연하게 넘긴다 하였으되 지금껏 떳떳이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울고 있었던
것이야. 가슴
이 아팠다. 그이 마음에는 지금 신방에 앉아 하염없이 너울거리는 촛불 그림자를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