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00)

정안로와 희란마마의 소원은 어찌하든 왕의 성총이  반석일 때 혁을 왕자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 

아기로 하여금 세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대비가 살아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희

란마마의 요즈음 가장 큰 일과는 명산대천 찾아다니며  심복인 무녀(巫女) 교인당으로 하여

금 어찌하든

지 왕대비가 빨리 죽어라 치성드리고 방술을 부리는 일이었다.  그 늙은 것이 죽어버린다면 

눈에 가시가 

사라지는 것이라. 왕대비가 죽고 왕이 여전히 후사를 보지 못할 적에 조하의 중신 패거리를 

동원하여 혁

을 왕자로만 올린다면...... 희란마마의 장미빛 꿈이 다시 한번 화려하게 펼쳐졌다.     

희란마마. 아비를 향하여 매서운 다짐을 눌러박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치워야하는 일입니다. 우리 혁이가 유일한 희망이여요. 아버님. 명심

하세요." 

사흘 후, 대궁인 성덕궁. 내전의 건물 중에서도 왕의 사적인 일상이 이루어지는 우원전.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길고 넓은  방에 옥주렴이 드리워졌다. 윗목에 삼간에  오른 세 처자가 

비단의대와 족

두리로 성장한 채 앉았다. 그 아래목 보료에 신랑이 될 왕이 좌정하여 선을 보는 소위 말하

는 삼간택이

라는 것이 펼쳐졌다. 

인륜지대사라는 혼인. 평생 더불어 삶을 보내야하는 반려를 택하는 자리이다. 하물며 중궁전

이라. 이 나

라 사직의 안주인이며 왕의 씨앗을 받아 고귀한 대통을 이어야하는 몸이 아니던가? 승지를 

앞에 두고 

왕은 지금 서안에 받쳐진 세 처자의 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어야 함에도 불

구하고 아름

다운 용안에는 그저 귀찮다는 표정. 짜증이 구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이미 정분은 하나. 마음은 딴 곳에 머물러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여인을 

안곁으로 맞

이하라니 신경질이 아니 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왕인 그로서도 거부할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었

다. 이미 희란마마와 그녀의 심복 무녀(巫女)  교인당이 소녀들이 지나갈 회랑 가까이 작은 

방에 숨을 죽

인 채 숨어있다. 그녀가 손짓한 처자로 하여금 중궁에 앉혀놓고 우리 둘은 정분좋게 해로하

자 약조한 이

후였다.     

왕은 다시 한번 짜증스럽게 처녀들의  사주단자를 손가락 끝으로 주르르  넘겼다. 선명하고 

붉은 입꼬리

가 심술궂게 비틀렸다. 

'쳇, 무에 이런가? 아무리 허수아비라 하지만 말이야. 낯도 한번 보지 않고 평생 같이 살 비

(妃)를 고르

라니..... 무에 이런 상궤에 벗어난 일이 있는 것인가?" 

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히죽 교만하고 비틀린 미소가 물려있었다. 

"주렴을 걷어라! 처자들을 직접 알현하련다." 

명을 받은 승지나 내관이 더 놀랐다. 시립한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도 까무라칠 정도로 놀

랐다. 여태껏 

간택 시 왕이 직접 비가 될  처녀를 보자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늘 윗전이 내정해주신 

대로 먼데서 주

렴 사이로 얼굴 한번 바라보고 정해진 여인의 사주단자를  승지에게 내미는 법이었다. 그러

면 승지는 단

자를 쟁반에 받쳐 영의정에게 전하고 영의정은 편전으로 나아가 기다리는 중신들에게  널리 

중전마마로 

간택되신 여인이 누구인가 전하는 것이 법도였기 때문이다. 헌데 일났다! 

오늘 전하께서 직접 몸을 일으키시더니 주렴을 걷어라 호령하시는 것이 아닌가? 

"비는 내전의 안주인이며 짐과 더불어 평생 해로할 사람이 아닌가? 그 얼굴  한번 보지않고 

같이 살아라 

하는 것이 우습지. 친견하리라." 

무어라 반대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망극하게도 손수 주렴을 걷고 처녀들이 앉아있는 윗목

으로 옥보를 

옮기셨다. 

놀란 것은 삼간에 오른 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망측하고 망극하도다! 아무리 주상이라 한들, 남녀간 내외가 엄격한 터인데 어찌 혼인도 하

지 않은 처자

의 얼굴을 보자하시는가?  허나 이미 내밀하게  내가 중전 될 것이다 자신만만한  두 처녀, 

고개를 들라하

는 내관의 말에 그래도 잘 보이겠다고 살포시 청초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들었다. 

왕의 눈빛이 소녀들을 슬쩍 쓸고 지나갔다.  꽃처럼 고운 병조참판의 딸. 그 아비가  욕심보 

많아 중궁 앉

히면 왕비를 뒷곁 삼아 짐을 능멸하고 권세나 부릴 계집이라. 곱기는 하되 아니다. 함박꽃처

럼 고운 처

녀 앞을 왕은 시들하게 지나쳤다. 훌쩍 큰 키에 음전한 자태의 권씨 처녀. 할마마마의  인척

이라, 어지간

히도 경희궁 노인네의 비위나 맞추며 짐을 간섭하겠지? 이래라 저래라 먼데서 짐을 조종하

려 말랑말랑

하고 말잘듣는 계집을 천거하신 게야. 너도 틀렸다.   

마지막에 앉은 소혜 아기씨. 왕이 지나가는 참에 바들거리며 어리버리 눈을 들었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소혜 아씨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내려다보던 왕과 아기씨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만났다. 

똑같이 화들

짝 놀라는 두 사람이었다. 

"에그머니~" 

"너, 너......." 

꼴깍! 소혜 아기씨, 동그랗게 놀란 눈을 올려뜨고 왕을 일별하다가  금세 고개를 숙였다. 저

절로 달달 떨

려 하얗게 질려서는 꼴까닥 마른침을 삼켰다. 왕 역시 이, 이! 냅다  격한 성정 같아서는 냉

큼 삿대질이라

도 하려다가 꿀꺽 말토막을 잘라먹었다.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주의깊게 그들을 지켜보는 많

은 눈들이 

있음을 두 사람 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스친 눈빛이었되 어지간히 괘씸하였던 터라, 소혜아씨  그 불한당의 얼굴을 잊지 

않았었다. 왕 

역시 감히 용안을 꼬나보며 초롱초롱 눈을  흘기던 어린 계집아이가 하도 가당찮아  기억을 

하여두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갈가마귀같이 초라하고 못생긴 고 계집아이가 삼간택

에 올라 맹

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니! 

'호오, 재미있구나.' 

뒷짐을 쥐고 돌아서는 왕의 입가에 새앙쥐를 놀리는 고양이처럼 느른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미소가 살짝 

물렸다. 무료하고 권태롭던 시간이 갑자기 풀먹인 모시옷처럼 빳빳하게 날이 서기 시작하였

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왕은 승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승지가 다시 내관에게  왕의 하명을 

전하였다. 내

관이 소녀들이 앉은 곳으로 내려왔다. 

"상감마마께서 하문하오십니다. 대답하시옵소서.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일꼬?" 

씩 왕이 웃었다. 살짝 고개돌려 옆에 앉은 아기씨가 대답하는  낭랑한 목청을 듣던 소혜 아

기씨는 분명 

보았다. 너 두고 보자. 왕은 분명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난 죽었다...... 내관

이 아기씨에

게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기씨. 하답하옵소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이옵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도 사람의 생각인가  하옵니다. 눈 한번 깜짝 할 사이에 

수천번 바뀌

고 시공을 넘나드는 것이 사람의 생각일 진대, 어찌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으리오?" 

"사람의 생각? 그 말 한번 절묘하군. 짐도 그리 생각하였는데. 생긴 것은 제일  조촐하되 제

법 영리함이

야." 

나직한 왕의 옥음이 귀에 몰려왔다. 왕은 힐끗 주렴 사이  멀리 보이는 작은 신형을 노려보

았다. 씩 다시 

웃었다. 너 두고 보자. 왕은 사주단자를 집어들었다. 

소혜라. 이을 소에 지혜 혜자라. 이름 값을 함이로다. 

아비가 관직에서 물러나간 지 오래인 처사이니 위세업고 중궁전 위세 벌일 것도 아닐 것이

지. 선대왕 아

바마마께서 충심깊다 아낀 신료라 하였다.  이 계집을 비로 삼는다면  아바마마께서 다소간 

잘하였다 칭

찬하실까?   

왕은 다시 히죽 웃었다. 그때도 노려보던 눈초리가 제법  매섭더니 어려운 자리에서 말하는 

것도 멍청하

지 않아. 의외로 귀엽군. 골려먹을 재미가 있을 것이야. 못생긴 것도 더 맘에 들어.   

나가라 분부하시었다. 궁녀의 안내를 받아 문을 나서는 소혜  아기씨 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꼬꾸라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그녀. 지나치는 

회랑 곁 작

은방 그늘에서 내다보던 희란마마와 교인당이 초라하고 제일 작고 어리숙해 보이는  아기씨 

뒷통수를 손

가락질하며 낄낄대고 있는 것도 꿈에도  몰랐다. 희란마마 곁에 붙어있던  대전내관 하나가 

간교한 얼굴

을 하고 희란마마의 귀속말을 담았다. 슬며시 재빠른 걸음걸이로 선을 본 왕이 물러나간 깊

숙한 내전으

로 스며들었다. 

   

한식경이 지날 무렵이었다. 최종의 간택을 기다리시며  왕실의 여인네들이 벌려앉은 성덕궁

의 자경전으

로 영의정과 승지가 들었다 고변이 들렸다. 왕대비전 앞으로 왕의 교서가 전달된 것이다.   

"소저들은 어지를 받으시옵소서."   

   

승지가 방안에 앉은 소녀들에게 아뢰었다. 부북한 소녀들 앞으로 영의정이 비단 두루마리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큰 목청으로 중전마마 되신 아기씨에게 교서를 전하였다. 

"짐은 이날 명을 내림이라. 우로 천지신명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왕대비전하의 어지를 받들

어...... ( 어

쩌구 저쩌구) ..... 그리하여 짐은 광산 김씨 익현의 여아를 짐의 비(妃)로 정하노라. 삼가 받

들어 안으로 

부덕을 쌓고 밖으로는 국모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계명(鷄鳴)의  공으로 짐을 내조함을 원하

노라." 

즉 소혜 아기씨가 중전마마로 간택되었다는 뜻이었다. 왕대비전께서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

었다. 날벼

락을 맞은 듯 제정신이 아닌 작은 얼굴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천복인가? 천행인가? 네 사주가 일월성신의 기운을 받은 참으로 기이한 사주라 하였다. 아

무 뒷곁도 없

이 오롯이 네 힘으로 정궁이 되었으니 이는 네 팔자가 참으로 기이함이 아나더냐? 자 무엇

하느냐? 중전

을 윗자리로 모시어라." 

왕대비마마의 호령에 상궁들이 달려들어 소혜 아씨를 부액하였다. 왕대비전하의 아랫자리에 

모시었다. 

모든 왕실의 여인네들과 삼간에서 탈락한 두 소녀는 큰절로 궐의 안주인되신 어린 소혜 아

기씨에게 치

하를 올렸다. 

"저어. 전하....... 상감마마의 교지가 하나 더 있사옵니다." 

난처한 얼굴로 영의정이 웅얼거렸다. 소혜 아기씨는 정궁이지만 탈락한 두 처녀는 관례대로 

후궁이 되

는 것이라, 무심히 생각하였던 왕대비전하.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다. 영의정이 더 깊이 부복

하였다. 

"머라? 주상의 교서가 하나 더 있다고? 무엇이더냐?" 

"저, 그것이....... 그저 분부하신 그대로 적힌 대로 읊겠나이다." 

영의정이 다시 읽어내린 교지의 내용에 모든 여인네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도 놀란 터라 

왕대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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