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00)

님....... 하고 홀로 

눈물지으며 중얼거려 보지만 구중심처 높은 담은 야속하기만 한데....... 

차디찬 달이 하늘을 끌고 바람에  쓸려 간다. 전전반측 몇 번이고  돌아눕다가 어느덧 지친 

잠에 빠진 소

혜 아기씨. 그 밤에 다시 사나운 용에게 잡혀 먹히는 꿈을 꾸게 되는데....... 

***********

월성궁. 

막 궐에서 나온 좌의정 정안로가 희란마마가 거처하는 별당으로 건너왔다. 

말로만 별당이지 번듯한 여느 궐 안 전각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월성궁 안채. 상감께서 직

접 어필로 <

향운당>이라는 편액까지 하사한 곳이다. 

직첩을 받은 정식 빈비(嬪妃)도  아니면서 무엄하게 커다란 어여머리를  하고 황금떨잠으로 

단장한 희란

마마. 금박 스란치마 자락을 여미고  비단보료에 앉아 아비를 맞이하였다. 상감께서  즉위할 

당시 겨우 호

조의 관리이던 그는 딸의 총애를 기화로 착실하게 주상의 신임을 쌓아갔다. 알게 모르게 제 

편인 신하들

을 조정에 심기 어느덧 칠 팔  년. 좌로 보아도 우로 보아도 이제  희란마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좌의정을 

편드는 무리들만이 단국의 조정을 채우고 있었다. 

그득한 달 그림자가 청명한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일러 우국충정을 한다 하

되 사실은 사

리사욕을 탐하는 소인배들이라. 어찌 뜻있는 선비들이 개탄하지 않을 것이며 곧은 중신들이 

그들 좌의

정 일파를 만나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피하지 않을 것인가? 

희란마마와 정안로는 풋정의 열기만을 탐하는 어리석은 왕을 허수아비로 올려두고 벌써  몇 

년째 정사를 

농단하고 있었다. 선대왕을 모시던 중신들과 왕대비전을  보필하는 일부의 신료들과 대립하

여 시파를 형

성하고 있었다. 어찌하든 상감에게 옳은 소리만을 간하고 희란마마를 불측하다 비난하며 정

안로 일파를 

왕의 측근에서 몰아내려는 벽파를 잡아죽이지 못하여 안달하는 참이었다, 

"그래. 아버님. 삼간에 오른 계집들의 면면을 알아오셨습니까?" 

"예, 마마. 그저 저희가 예상한 대로 고만고만한 계집이 올랐나이다." 

"그래, 대체 누구랍니까?" 

행여나 꽃처럼 아름답고 집안 권세 좋아 중궁전 차고 앉은 연후에 상감의 성총 휘돌려 빼앗

을 야무지고 

고운 계집일세라. 대근심에 걱정걱정. 물어채는 희란마마 눈꼬리가 벌써 앙칼졌다. 

"병조참판의 여식과 왕대비전의 먼 인척이라는 그 처자가 역시나 재간에 올랐나이다." 

"그렇구만요. 그래 상감께서는 뉘를 낙점하시려는지.... 아버님. 사내 눈 홀릴만한  미색은 누

구이던가

요?" 

"중신들 모다 입을 모아 말하기를  중궁전의 위엄은 역시 병조참판의  따님이라. 연치도 열 

여덟 꽃피는 

형용에다 의젓하고 음전하니 모다 왕실  여인들이 칭송하였답니다. 아마도 그리  낙점될 듯 

하나이다." 

"흥. 누가 그리 되게 놓아둔답니까?" 

자신만만 뇌까리는 희란마마의 눈빛이 독랄하였다. 붉은 입술 사이 머금는 미소가 흑장미빛

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계집을 중궁전에 앉히지는  못하리라. 야무진 계집아이 잘못 낙점하여 

정궁으로 들

였다가 그 년이 홀라당 상감 성총 빼앗아가면 이 희란은 졸지에 끈 떨어진 갓이 될 참이라. 

반드시 중궁

전은 허수아비에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계집을 올려야 합니다. 뒷배를 보아줄 친가도 없

어야 하고요. 

못나고 박색이라 상감이 곁에 얼씬도 하지 않을 계집이어야 합니다." 

정안로가 만족스럽게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자신만만 단언하였다. 

"아비가 누구입니까? 마마. 헛허허. 애초부터 재간에도  오르지 못할 처지이되, 아비가 미리 

보아둔 터

로, 더없이 못난 것이 하나 감히 삼간에 올랐나이다. 아니, 올렸답니다. 흐흐흐." 

"그래요? 감히 이 희란을 대적하여 정궁의 위세를 애초부터 부리지도 못할 계집이겠지요?" 

"암만요. 아비는 낙척거사요, 연치도 겨우 열 다섯이라.  어리버리 촌 것이 하나 어찌하다가 

단자를 올린 

것이라, 제가 유념하여 초간에 올렸사옵니다. 내일 입궐하시면 손가락으로 제일 못나고 어리

석어 보이

는 것을 점지하십시오. 그 계집이올시다." 

간특한 웃음을 머금으며 희란마마. 은어같이 미끈한 팔을 들어 시원한 석청밀다수를 들여마

셨다. 간택

의 일이라, 행여나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다 꿈만 같았다. 

상감이 열 다섯. 희란이 스물 셋. 상감의 생모이신 희빈마마의 인척이라 하여 궐에 드나들면

서 간교한 

열 두폭 치마 안에 애초부터 순진한 왕을 유혹할 꿍심을 감추어두었다. 

형제도 없이 넓은 궐 안에서 세자로 자라면서 누구보다 외롭고 고적한 왕이어다. 어린 시절

부터 누이가 

모란꽃처럼 곱소 하며 좋아했었다. 그러나 올곧은 희빈마마의 단속이  심하니 더 이상은 가

까이 가지 못

하였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눈치가 이상하였던 모양이다. 아들의 일인지라 예민한 모성이 음

흉하고 간

특한 여인네의 계략을 냄새맡았던 것일까? 

어느 날 희빈은 조카라 자칭하며 열심히 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궐 출입을 하는 제  동기와 

딸 희란을 더 

이상 입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안로의 아내인 언니를 재촉하여 희란을 벼락혼인시

키었다. 깐

깐한 학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편. 조촐한 살림을 돌보며 엄한 시댁 가풍을 쫓아가

기에는 그녀

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심중에 감춘 야심과 배포는 끝이 없었다. 

천복이었다. 혼인한 지 이태 만에, 전국을 쓸어버린 역병에 그  서방이 죽어버릴 줄이야! 그

야말로 친가

로 돌아가고자 종주먹을 쥐고 궁리뿐이던 희란마마에게 있어 천행이었다. 

이태후 둘의 사이를 가로막던 희빈마마가  각혈이 심하여 돌아가셨다. 열 세  살 어린 왕은 

생모마저 잃고 

그야말로 홀로 되었다. 

청상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희란마마를 보고는 더없이 애틋하고 불쌍하고 측은한 느

낌이 들었나

보다. 천지간 외로운 그의 처지와 희란의 고적한 처지가 동병상련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물

론 희란 자신

도 왕 앞에서 그저 처연한 척 외로운 달처럼 쓸쓸하니 보이지 않는 요염을 떨어댔다. 

어린 왕은 마침내 희란마마의 촘촘한 정해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어린 나이에 커다란 책무

를 짊어지고 

그저 앞으로 나가야 하는 지존의 자리. 높았으나 외롭고, 고귀하였으나 황막한 어린 왕의 공

허한 마음을 

파고들어 단 하나의 여인이 되는 것은 너무 쉬웠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사이이다. 왕은 어느덧 <누이는 희빈 어마마마를 꼭 닮았소>하며 종

종 곁에 있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직 여인을 모르는 어린 왕의 눈 속에  고운 연상의 누이를 몰래 훔쳐보

는 빛이 담기

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희란마마는 짐짓 왕의 연분홍 연정을 모른 척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 비 오는 사냥터 산 막에서 희란마마는 슬며시 비에 젖어 꼭 달라붙은 

얇은 옷자락 

사이로 농염한 우유빛 나신을 뽐내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춥다 애처롭게  흐느꼈다. 

계집의 살갗

에 손만 대도 확 불이 붙어 어쩔 줄 몰라할 사춘기의 어린 왕 춘정을 자극하여 마침내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누이는 콱 죽어버릴 것입니다! 청백지신을 지켜야할  몸으로 이렇게 상감마마께 능욕당

하고, 정조를 

더럽힌 오명을 쓸 터인데 제가 살아서 무엇하겠나이까? 흑흑흑. 말리지 마옵소서. 이 누이는 

그만 이 자

리에서 죽어버릴 것입니다." 

서럽디 서러운 울음 안에서 은장도를 짐짓 빼들었다. 목을 겨누고 이제 죽는다 난리를 피우

며 죄책감과 

당황스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왕의 혼백을 반 빼놓았다. 그날을 생각하며 희란마마는 

슬며시 붉

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었다. 손안의  새. 단국의 국왕은 그였으되,  그를 능가하여 움직이는 

여황은 바로 

희란마마 자신이 아닐 것이던가? 

"일단 중궁의 일을 그리 처리하되 이 몇 년 절대로 상감이 중궁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합

니다. 그 일은 

제가 처리할 일이고요, 정비(正妃)가 혼인하여 회임하지 못함이라. 얼마든지 폐서인 할 빌미

가 아닐 것

입니까? 혁을 왕자로 들이는 일은 아버님이 맡으실 일입니다. 지금껏 주상께서 품으신 계집 

많으시되 

아직은 잉태한 계집이 없음이라. 그저 유일한 혈육은 우리 혁이뿐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저 왕자로 

인정받게만 한다면 우리 혁이가 동궁이 됨은 명약관화한 일이라.  명심하십시오! 아버님. 우

리 세력이 대

대손손 권세를 휘두름은 바로 우리 혁이가 동궁으로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에  달려있음

입니다." 

왕을 받아들인 팔삭 후, 희란마마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산욕을 오래 앓았다. 다시는 

회임하지 

못하리라, 돌계집이 되었다는 전의의 말을  들었다. 그만 맥이 탁  풀렸다. 흐드러진 여체의 

매혹으로 왕

을 거미줄로 감는 것은 잠시잠깐. 금세 새 계집 나타나고  성총 홀라당 빼앗기면 무슨 소용

있으랴? 가장 

확실한 것은 왕의 씨앗을 배태하는 것이었다. 덩실하니 왕자를  낳아 동궁 올려두고 상감이 

흥한 후에도 

실제의 대비전으로 권세를 휘두르려니 하였다. 

희란마마는 여인의 즐거움을 녹진하니 맛보게 해주는 왕의 강건한 일물과 늠름한 옥체를 더

없이 사랑하

였다. 다오 하면 무엇이든 다 주는  그의 너그러움과 당당한 배포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좋

아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왕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이었다. 돈 나와라 하면 돈 나오고,  벼슬 

나와라 하면 

벼슬 나오고 집 나와라 하면 집 나오는 권세가 죽도록 좋았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

도 그것을 손

아귀에 쥐고 싶었다. 요망한 엉덩이 돌려 상감을 휘감고 음탕한 요분질 하여 청명한 성상을 

눈 가려 이 

나라 사직을 망치는 요악한 것이라는 별의별 욕을 다 먹어가며 왕을 유혹한 목적이 무엇이

더냐? 

오직 하나 이제 팔삭동이 그 사내아이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 아기만 왕의 씨앗이라

고 인정받게 

된달지면... 

4년전, 아직은 어리고 유약한 왕이 엄한 왕대비의 힘에  눌려 어름어름 물러서는 바람에 일

이 어그러진 

것에 대한 분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희란마마는 이를 앙다물었다. 아드득 날카롭게  날

을 갈았다. 

"내 반드시 경희궁의 저 늙은 년이 속 타 말라죽는  꼴을 보고야 말리라. 그때 그년이 우리 

혁이를 왕자로 

인정하여주지 않아 이날 이 희란의 처지가 이토록 첩첩합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고야 

말 것입니

다. 아버님." 

그 당시 상감은 나이 비록 어리었되 더없이 숙성하고 강건하였다. 같은 연치의 소년보다 머

리 하나는 더 

있었다. 열 다섯. 자식을 낳아도 열은 낳을 연치가 아니더냐? 그러나 왕대비는 아직 상감은 

보령 어려서 

씨앗 뿌릴 능력이 없다 딱 잡아 누른 것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할마마마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어

도 믿었던 순진한 주상. 그만 용안이 홍당무가 되어 할마마마 말이 맞사옵니다 하고 미적거

렸다. 

게다가 하필이면 또 혁이 팔삭동이로 태어날 것은 무어란 말인가? 

상감의 얼굴을 닮았다 하면 씨도둑은 못한다고 한번 주장해 보련만은, 혁은 또 어미인 희란

마마 낯 판박

이였다. 섬칫햇던 것은 상감과 몸을 섞기 전에 잠시잠깐 불타는 몸을 달래주던 건장한 불목

하니 놈의 얼

굴도 잠시 드러난 듯 하였다. 이러저런  연유로 희란마마의 유일한 소생 혁은 왕자도  아닌, 

그렇다고 정

식 아비도 없는, 말 그대로 희란마마의 사생아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귀한 왕자의 신분으로 

될 아기가 

화냥질하여 배태한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살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그 늙은 암여우 때문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