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00)

아기씨의 천복이옵니다. 궐의 귀인께서 어제 초간 때의 일을 전해들으신 터로, 아기씨의  효

성 지극하심

을 전해듣잡고 상으로 내리신 것입니다."   

자꾸 권하였다. 몇 번이고 사양하였지만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 소혜 아기씨는 

마지못해 나인

이 걸어주는 화려한 노리개를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 보옵소서. 단장이 끝났나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낯선 얼굴이 면경 속에 박혀있었다. 아기씨는  놀란 눈초리로 단장한 자

신의 초라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계집은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을 들었다. 작고 까만 자신의 얼굴도  그 

아침에는 대

가집 귀한 처자 인 양 그럭저럭 볼만해졌다.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어린 소녀는  자신에게 

닥쳐온 이 모

든 일이 생시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어제 아침만 하더라도 아버님의 녹두죽을 끓여드릴 것이

다 하며 무심

하게 대문을 나섰는데...... 단 하루 상관으로  이제 절대로 들어올 염도 꾸지 못했던  대궐에 

앉아 항아님

의 시중을 받는 몸이라니. 

바깥에서 흠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났다. 사내의 목소리이되  마치 계집처럼 가늘은 목청이 

방안의 사정

을 살피었다. 

"소저들의 차비가 끝났니까? 창희궁의 전하께서 하냥 기다리신다는 기별이옵니다." 

"아이고. 서두르시지요. 시각이 늦었나이다." 

갑자기 나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아기씨를 재촉하였다. 문을 나서니 이미  가마가 

기다리고 있

었다.     

"따르시지요. 재간에 오르신 분들은 왕대비전이 거하시는 창희궁으로 나가실 것입니다." 

중간에 오른 다섯명의 소녀가 탄 가마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왕대비전이 거처하시

는 창희궁으

로 옮겨갔다. 

궐의 가장 웃어른이신 왕대비전하께서 원래  대궁인 성덕궁의 자경전에 거처하셔야  법도이

다. 

허나 5년전, 월성궁 희란마마의 일로 온 궐이 발라당 뒤집어진 이후였다. 더럽고 천한  것이 

주상을 능멸

하는 이 곳에 다시는 발길을 하지 않으리라 일갈하시고 왕대비전하께서는 창희궁으로  거처

를 옮겨버리

셨다. 

성덕궁의 바로 곁에 있어 가을과 겨울이면 또 다른 법궁의 노릇을 하는 경덕궁으로 옮기셨

으면 그나마 

상감의 체면이 덜 구겨졌으리라. 허나 왕대비께서는 월성궁의 계집이 성덕궁의 금원(禁苑)에

서 상감을 

희롱하며 질탕한 술자리를 벌었다는 말씀에 아연 노하시었다. 죽어도  게도 아니 갈란다 하

셨다. 삼궁

(三宮)중에서 가장 격이 떨어지고 규모도 옹색한 창희궁으로 떠나버리셨다. 올곧은 선비들이 

상감더러 

이제는 조모님마저 궐에서 쫓아내느냐 아연 들고 일어난 것은  그 날 이후부터였다. 불측한 

계집하나 거

느리느라고 강상(綱常)의 도리마저 유린한 대폭군이라는 비난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날부터

였다. 

그런 사정을 알리 없는 소혜 아씨. 재간에 오른 처자들 틈에 끼여 창희궁의 통명전 앞에 다

다랐다. 수많

은 나인과 상궁이 수풀같이 늘어선 가운데 석계(石階)를 올라 창희궁의 중궁인 통명전 안으

로 들어섰

다. 

거처하시는 귀인께서 공식적인 접견을 하시거나 잔치를 여는 곳으로 이용되는 곳이  통명전

이다. 

특이하게도 정면 9칸이나 되는 커다란 건물이지만 가운데 3칸만 앞퇴를 열었고 나머지 6칸

에는 머름*을 

달아 창을 달았다. 바닥에 온돌을 깐  방은 하나도 없고 스물 한 칸  전부 우물마루로 깔아 

고주*에 문골

을 들이고 문짝을 달아 폐쇄하고는 내부를 전체 한공간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드는 듯 위엄이 스민 공활한 실내에는 소녀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있었다. 

이윽고 차상(茶床)이 나왔고 금세 왕대비전이 지밀상궁 이하 여나문명의 궁녀들을 거느리고 

듭시었다. 

왕대비전하의 뒤로는 왕실의 여인네들이  따르고 있었다. 진성대군 부부인.  효성군 부부인. 

왕대비마마

의 혈육이자 선대왕 전하의 동복누이이신 명온공주마마. 명선옹주마마. 태상대왕의 후궁이시

며 효성군

을 생산하신 인선궁 덕빈마마. 명선옹주마마를 생산하신 혜원궁 효빈마마이셨다. 

"어허, 아름다울세라! 이날 주상을 위하여 세상의 가장 어여쁜 꽃들이 피어있구먼." 

한마디 덕담을 내리시는 왕대비전하의  옥안은 마치 관음보살님처럼  어질고 후덕하시었다. 

먼저 왕대비

전하께서 좌정하신 연후에 다른 왕실의 여인네들이 따라 각자의 직분과 지위에 따라 부채살

처럼 벌려 

앉으시었다. 중간택에 오른 소녀들은 일제히 상궁의 인도에 따라  바닥에 엎드려 깊이 고개

숙였다. 왕실

의 여인네들에게 수인사를 치뤘다. 

"모두다 어질고 고우니 이날 고가 중궁전을 채울 인연을  어찌 고를지 그저 어지럽구먼. 허

허허." 

"어마마마 말씀이 맞나이다. 소저들 하나같이 꽃 같고 봉황 같으니 아름다운 구슬같이 영롱

한 아기씨들 

사이에서 어찌 옥석을 가려낸답니까? 소녀의 욕심으로는 그만 이 처자들 다 주상의 안곁으

로 올려드리

고 싶을 뿐입니다." 

"허나 그 일을 위하여 모인 자리이니 미룰 수도 없지요. 마마, 소저들을 시험하시지요." 

인선궁 덕빈마마께서 감히 왕대비전하에게 청하시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왕대비전하께

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만히 고개짓을 하니 곁에 시립하고 있던 상궁이 나인을 시켜 쟁반 다섯 개를 

내놓았다. 

쟁반에는 명주실 한타래와 오얏만한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중궁전은 이 나라 주인의 정궁이며 훗날  고귀한 태로 사직의 반석을 이을 동궁을  생산할 

몸이 아니더

냐? 가지는 뿌리에서 비롯됨이며 열매는 씨앗에서 연유함이라.  배태한 어미가 어질고 영리

하면 반드시 

그 자손도 어질고 늠름한 법이라 하였다. 고는 앞으로 세자의 어미가 될 소저들에게 지혜를 

시험하고자 

하느니라." 

나인들이 쟁반 하나씩을 소녀들 앞에 각각 놓아주었다. 대체  이것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일

까? 

"보면 알 것이되 구슬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있느니라. 지금 나인이 향을  피울 것인데, 

향이 다 타기 

전에 이 구슬 구멍에 실을 꿰거라." 

문득 소녀들의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졌다.  그쯤은 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금세 그 웃음

기가 가시고 말았다. 이어지는 왕대비전하의 음성이 싸늘하였다. 

"쉽다 미리 자신하지 말아라. 꿰어보면 알 것이야. 구멍은 일직선으로 뚫린 것이  아니라 구

불구불 하단

다. 누가 어찌 끝까지 실을 꿰는지 한번 꼭 보고 싶구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옆에 앉은 나

인들에게 도움

을 받을 수 있느니라."     

나인이 향로에 길다란 선향(線香) 하나를 꽂았다. 슬슬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다섯 소녀

들은 난감한 얼굴로 자신들의 앞에 놓인 실과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힘없는 명주실을 바늘

도 없이 작은 

구멍에 꿰는 일도 어려운데, 하물며 그 구멍조차 구불구불하다고? 이를 어찌 해결하랴? 

소녀들은 제일먼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멍보다  작은 바늘을 청하였다. 처음에는 

소혜 아기씨

도 그럴까 하였다. 하지만 구멍이 구불거린다  하지 않던가? 바늘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가만

히 구슬을 바라보았다. 이를 어찌 하나? 아 어쩜 그런 방법이...... 

옆에 시립하여 앉은 나인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시  일

어나 문을 열

고 나간 나인이 얼마 후에 돌아왔다.   

아기씨는 먼저 구슬 구멍 하나에다가 나인이 건네준 그릇 안에  든 꿀을 발랐다. 그런 다음 

나인이 잡아

온 개미허리에 가는 명주실을 감았다. 가만히 개미를 꿀이 발라지지 않은 반대편 구멍 안에 

밀어넣었다. 

구멍 안에서 잠을 자다가 얼떨결에  잡혀온 개미. 어리버리 비틀거리다가  달콤한 꿀냄새를 

맡았다. 이것

이 웬 꿀이냐? 개미는 기어가기 시작하였다.  느른느른 잘도 기어갔다. 맛난 꿀단지를  찾았

다. 반대편 구

멍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손가락이 개미를 살며시 잡아올렸다. 허리에 감긴 무거운 실을  풀

어주었다. 그 

보답으로 개미는 그야말로 꿀단지에 홀라당 빠졌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나!" 

방안에 둘러앉은 모든 여인네들 입에서 감탄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허기는 개미가 꿀냄새를 맡으면 천리에서도 기어오지. 허나 개미를 이용하여 실을 꿸 생각

을 하다니. 

참으로 영민함이라! 대체 이 여식은 뉘라 하였노?" 

"전하. 이미 전하여 올린 광산 김씨 익현의 여아이온 줄 아옵니다." 

"뭐라? 너가 바로 그 아이였더냐? 이리 가까이 오너라." 

윗전이 부르시니 어찌할 수 없다. 소혜 아기씨, 동당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왕대비전  앞으

로 나아갔다. 

인자하게 미소지으시며 손짓을 하시었다. 작은 손을 잡아 어루만져주시며 과분한 덕담을 해

주시었다. 

"보아하니 영민한 관상이며 눈매도  봉안(鳳眼)이구나. 침착하니 자태에 기품이  어리었으며 

어려운 자리

에서 놀라지 않고 지혜를 짜낼 줄 아니 너가 참으로 귀인이로다." 

"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저 소녀는 어린 촌것이라 눈앞이 캄캄하옵니다. 감당하기 과분한 

말씀이시

라.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부부지간 인연이라, 하늘에서 내리신 것이지...... 휴우. 내 너를 삼간에 올릴 것이니 어디 한

번 두고 보

자구나. 만약 네가 주상의 눈에 뜨여 중궁으로 간택된달  지면 내...... 선대왕의 혜안을 믿을 

것이니...... 

이는 모두 천리(天理)이겠지." 

알쏭달쏭 소혜 아기씨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한숨과 함께 내뱉으시었다. 삼간

택에 올린다

는 말씀에 날벼락을 맞은 듯 새파랗게 질린 아기씨의 얼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 하였다. 

왕대비마마께서는 소혜 아씨말고도 이미 삼간택에 올리기로  내정된 병조참판의 손녀와, 친

정쪽 먼 친척

의 딸 이름이 적힌 단자를 대전 내관에게 내려보냈다. 

"주상께서는 무턱대고 간택의 시일을 끌자 하시되 좋은 일을 미루면 마(魔)가  낀다 하였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국혼의 일. 무에 미룰 일이 있을 것인가? 사흘  후에 대전에서 삼간의 처자를 선

보일 것이니 

그리 알라 전하라." 

"분부 명심하여 봉행하겠나이다." 

삼간에 오른 세 처자는 돌아갈 때 이미 경희궁으로 올 때와는 또 다른 큰 대접을 받게 되었

다. 사흘 동안 

머무를 경덕궁의 영춘전으로 돌아갈 때 육인교를  탔다. 차지내궁(次知內宮)* 등 근 50명의 

호송을 받고, 

중궁의 몸가짐에 관한 웃전의 봉서까지 가진 글월 비자까지  따라왔다. 그날 밤부터 상궁이 

나와 소녀들

에게 궐의 법도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얼떨결에 궐에 끌려들어온 소혜 아씨. 이차처자 흘러가는 일에 잘못 휘말려들었다. 잘못하다

간 정말 어

처구니없이 중궁전에 잡아 앉혀질 팔자가 된 셈이라. 근심으로  하늘이 노래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

다. 밤에 홀로  넓디 넓은 방에  비단 이불  덮고 눕기는 하였지만  그저 아뜩하였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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