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00)

"일단 요기나 하십시다. 동무께서는 긴장하여 어쩔 줄을 모르시되  이와 일이 이렇게 된 터

로 우리가 당

황하여 우왕좌왕하여도 궐문이 열리지는 않을  것이오. 마음을 느긋하니 먹고  궐 구경이나 

당차게 하고 

나가십시다." 

소혜아기씨 할 말을 잊고 있다 문득 보아아씨를 바라본다. 고맙고 감사한 빛이 작은 얼굴에 

넘쳐흘렀다.

작은 목청으로 보아아씨에게 치하하였다. 

"동무는... 어찌 그리 어질고 또 따뜻하시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밝고 담대하시니 

내가 그만 

동무에게 의지가 되는 것이오." 

"김씨 동무는 나이는 어리시되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영명하고 덕성이 높으시오. 아까 

어떤 꽃이 가

장 귀하느냐 하문하신 그 말에 동무가 대답한 말씀이 기가 막히니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라. 내

가 짐작하기... 동무는 필시 삼간택에 오르실 것이오." 

소혜아씨는 보아아씨의 말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천무당만부당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실로 청천 날벼락 같은 그런 말씀은 마시오. 나는 절대로 삼간택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오

르지도 못할 

것이되 오르기도 싫소이다. 재간에 오른 것도 기가 막힌데 어찌  그 일까정 감당할 것인가? 

나, 재간택에 

오르면 왕대비전에 아뢰어 궐서 내보내 주시어요 애원할 것입니다." 

'글쎄, 그것이 뜻대로 될까요?' 

보아아씨, 혼자 그런 생각을 하였다. 곤하여 상을 물리고 나인의 시중을 받아 소세를 한  다

음 연해 잠이 

드는 소혜아기씨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버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타고나기 사람의 격이 다 있다 하였는데 이  소저야말로 타고

나신 왕비마

마이시다. 어질고 영명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여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인덕까정 가지고 

계신 분이

라. 첫눈에는 용모도 별로 보잘것없다 싶었는데 찬찬히 보아하니  안즉 어려서 여인으로 피

지 않아 그런 

것이지 연치차고 여인으로 곱게 가꾸고 나면 절색이라 소문이 날 것이야. 나는 후에 반드시 

중전마마와 

동무였다 하는 광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런 분과 견주어  윗전 앞에 나감도 실로 망신이

라, 내가 반드

시 꾀병이라도 앓아 내일 궐에서 도망치리라." 

처음 본 동무조차 감탄하여 이미 왕비마마라 생각하여 심중의  우러름을 받는 소혜아씨. 아

무것도 모르

고 곤한 터라 새근새근 깊은 잠이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의 소용돌이를 전혀 모르고 평화로운  얼굴이다. 그러나 이미 정

해진 숙명이

라. 얼마나 많은 운명의 고비를 넘기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괴로움을 거쳐야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되는지

를 그녀가 알 수 있었다면 이토록 편안하니 잠을 이루지 못 할 것이다. 하물며 지난날, 자신

이 쏘아보았

던 그 무뢰한과 부부지간 인연을 맺어 온갖 우여곡절을 엮어 갈 것임을 아직은 잠이 든  소

혜아씨도 모르

고 석강 중인 왕도 모르는데... 

***********

2. 

도성(都城) 북문 밖. 

울창한 수림(樹林)을 헤치고 계곡을 달리며 질탕한 사냥놀음을 즐겼다. 곤한 몸을 이끌고 돌

아오는 길

이었다. 활짝 열린 성문을 도도하게 달려가는 왕의 말 옆에서 딱 붙은 백마 한 마리. 담비털

로 만든 사냥 

조끼를 입고 호피 모자를 쓴 남장미녀가 말 등에 올라타 있었다. 젊은 국왕의 총애를 한 몸

에 모으고 있

는 그녀. 바로 월성궁 마마였다. 

주상 전하로부터 감히 <큰마마>라는 무엄된 칭호까지 받은 그녀 희란마마. 나이 스물 일곱. 

비 오는 날 

사냥터 산막에서 소년왕을 감히 유혹하였다. 계집의  지분냄새에 피끓어 짐승처럼 으르렁거

리는 사춘기 

소년 앞에서 보란 듯이 비에 젖은 옷자락을  슬쩍 풀었다. 보령 열 다섯. 불 맞은  짐승처럼 

마구 날뛰는 

어린 왕의 동정(童貞)을 요염으로 휘감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계집의 단꿀로 성체를 단번

에 함락시켰

다. 

그 날부터 어린 왕은 간교한 희란마마의 넓고 깊은 치마폭에 휘감겨 천지분간 하지 못하고 

미혹하였다. 

작정하고 희란마마가 그를 유혹한 줄도 모르고 순진한 소년왕은 누이의 정조를 경솔한 짐이 

깨고 말았

다 후회하여 반드시 책임지마 결사적으로 나섰다. 희란마마의 존재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왕

대비전의 만

류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길러주신 서모님들까지 다 쫓아내며 필사적으로 처음 얻은 여인을 

지키리라 

하였다. 충언하는 신료들을 관복벗겨 몰아냈고, 아첨하는 신하들로만 곁을 채웠다.   

희란마마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은근슬쩍 조하일을 간섭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후의  일

이었다. 아비

인 정안로를 당당한 좌의정으로 올려두고 하나 둘 조하에 심기 시작한 세력이 어느새 한가

득. 희란마마

의 요염한 눈짓 한번에 헤벌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소년왕의 눈과  귀를 단단히 막았다. 

정안로를 필두

로 그들 떼가 정사(政事)를 농단한 것도 벌써 4년째. 말 그대로 허수아비라, 왕은 말만 지존

이시되 희란

마마의 아미 한번 찌푸리는 것에 간이 달달, 그저 바닥에 엎드려서는 누이 하잡는대로 하여

주께 이런 터

였다. 

이미 단국의 하늘에는 해가 있으되 온통 달 그림자로 가득했다. 

번화한 거리로 사냥복 차림의 왕 일행이 접어들었다. 권문세가들만 살고 있는 번동. 높은 담 

안. 당당한 

풍채를 빛내며 거뭇한 기와를 인 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선 궁이 나타났다. 화려하고 번

듯한 품이 주

변의 여염집과는 규모가 틀렸다. 월성궁. 거대한 대문에 붙은 편액이 눈부셨다. 

금상께서 총애하는 누이를 위하여 직접 하사한 편액이다. 

월성궁 높은 담을 바라보며 희란마마가 왕의 옆으로 말을  붙였다. 살그머니 하소연하는 목

소리가 미풍

에 흩날리는 버들가지인 양 하늘거렸다. 

"마마, 이대로 환궁하시렵니까?" 

"핫하. 누이를 두고 어찌 그냥 가리? 이 밤은 월성궁에서 침수할 것이다 하였소." 

호탕한 왕의 한마디에 월성궁 마마의 입술에 함뿍 웃음이  물렸다. 손뼉이라도 치듯이 좋아

라 하였다. 

"아이, 좋아라! 그럴 줄 알고 소첩이 말간 술 한 병 숨겨놓았지?" 

"역시 누이는 영리하거든. 짐의 입에 혀같이 척척. 매사가 신통방통이니 어찌 곱다 아니하겠

어?" 

"몰라요! 이 밤에 전하를 뫼시면서 얼마나 소첩을 사모하는지 알아볼 것이야!" 

살긋이 웃음을 물고 살그머니 곁눈질하는 품새가 꿀이 뚝뚝  흘렀다. 은근히 감아오는 목소

리에 스민 요

염함에 어리숙한 젊은 왕은 그저 헤벌레 하였다. 

왕의 말을 필두로 하여 오십여 필의 마두가 한꺼번에 월성궁의 대문을 넘어갔다. 이윽고 굳

게 다시 닫혔

다. 질탕하고 첩첩한 환락의 밤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의대를 갈고 욕간을 한 후에 수라상을 받으리라 하였다. 도승지가 엎드려 절하고는 제발 환

궁하시어야 

합니다 하는 간청도 뿌리쳤다. 월성궁의 침전에 좌정한 왕은 편안한 도포차림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간

청을 밀어냈다. 

"짐은 새벽에 환궁하리라 하였지 않는가? 급한 일은 좌의정이 있으니 게에다 말하면  될 것

이야." 

"허나 전하. 내일은 삼간의 날이오니 부대 참석하시어야 하옵니다. 정궁마마의 선을 보는 중

차대한 자리

이니, 반드시 참례하라 왕대비전의 엄한 전교가 내려왔나이다." 

"어허, 짐이 아니 간다 말하지는 않았느니라! 틀림없이 내일 그 자리에만 참석하면 되지  않

느냐 이 말이

다!" 

왜 두 번 말을 시키냐는 것이다.  성질 급하고 격한 터이니 벌써 왕의  미간에 푸른 심줄이 

서렸다. 목청에

도 슬슬 삐쭉 신경질이 돋았다. 

"그깐 허수아비!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랴? 짐에게는 그저 누이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들어라 하듯 내튕기는 혼잣말이 방자하고 무서웠다. 주상더러 더 이상 어찌 강요하리오? 어

찌할 수 없

이 승지가 절하고 돌아서 나갔다. 싫은 일만 골라서 시키는 그의 뒷꽁무니를 바라보는 왕의 

얼굴에는 심

술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산해진미만 골라 장만한 밤 수라상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고운 비단 의대로 갈아입고 밤단

장을 한 월성

궁 희란마마가 문턱을 넘었다. 진분홍 저고리에 금박을 박은  초록색 치마선이 은은한 향내

를 풍기며 바

람에 휘날렸다. 망설이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답삭 왕의 옆자리에 파고들었다.   

"또 깐깐한 도승지 저이가 환궁하시라 하였지요?" 

"짐이 무쇠야? 허구헌 날 궐서 일만 하라게? 짐이 그저 요 어여쁜 이를 잠시라도 곁에 두는 

것을 못마땅

하게 생각한 할마마마 할만한 일이라니, 원..." 

"말씀은 의연하시지만, 그래도 왕대비전 말씀은  거역하지 못하시면서! 대례의 일이  코앞에 

닥친 터이니 

그 분이 그렇게 전하를 재촉하시는 것이지요." 

"짐의 정은 오직 하나라, 아무리 말을 하여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그래, 짐의 일

편단심을 믿을 

것인가?" 

   

희란마마. 새큰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왕을 향하여 눈을 흘겼다. 커다랗게 고운 눈에 벌써 눈

물이 반쯤 

고였다. 이제는 피해갈 수 없는 국혼을 앞에 두고 성총을 뺏어갈지도 모르는 새 중전마마가 

나타날 참이

니 어찌 심란하지 않으랴? 

물론 왕은 총애하는 누이를 생각하여 차마 혼례를 치르지  못하리라 생고집을 피웠다. 허나 

중궁전을 간

택하여 국혼을 치루시사, 내전을 채우고 사직을 이어받을 대통을  이어야하는 일은 왕의 가

장 기본적인 

책무였다. 그를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덤덤하니 왕의 일탈을 못 본 척 두고보던  점잖

은 진성숙부

까지 나서시었다. <이제 그만 하옵소서> 한마디하시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성대군에게는 빚이 있었다. 

선대왕 아바마마의 동복아우이시며 오직  충심만으로 가득한 분이셨다.  한눈한번 팔지않고 

노심초사 어

린 왕 자신을 보필해 온 분이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왕은 진성대군만은 믿었다.  하물며 

아바마마께서 

흥하시기 전, 그의 손을 잡고 당부하기를 <오직 진성  숙부를 믿고 매사 의논하라> 하시지 

않던가? 

4년전, 희란마마의 일로 왕이 난리 난리를 부리고 광증(狂症)을  피워댈 때, 오직 왕을 편들

어준 이가 진

성대군이었다. 

"보령 젊으시어, 잠시잠깐 여인의 요염에 취함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요. 하물며 군왕은 무

치라 하였나

이다. 내전의 일로 소란함도 망신이라, 그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잠시 놓아둡시오." 

그 말 한마디로 왕대비전에 잡혀간 희란마마의 목이 무사하였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그때

는 어렸다. 

내전의 일이라, 왕대비전이 서슬푸르게 호령할 때 왕도 그녀를 위하여 막아줄 힘이  없었다. 

그것을 해준 

이가 바로 진성 숙부였던 것이다. 그런  분까지도 이제는 국혼을 치루시오 하였다. 더  이상 

못한다 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나도 희란마마는 왕의 정궁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본인도 알고 왕도 어

찌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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