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다 난리들이라? 같잖구먼!"
"헌데 오직 한 분 소저가 기이한 대답을 하시는지라.. 쇤네가 그 하답을 가슴에 안고 왔사옵
니다."
비로소 무심하던 왕의 용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호오, 그래? 어떤 계집이 무어라 하더냐?"
"그 소저 얼굴은 보지 못하였는데... 선대왕 시절 도승지를 보았던 자산 김익현의 여식이라
하였나이다.
그 대답이 실로 어질고 의젓하여 쇤네가 귀 기울여 듣고 왔사옵니다. 오직 그 분만이 이 세
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 목화라 답을 하셨나이다."
"목화꽃이 가장 귀하다 하였다고? 흠, 제법인데?...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냐?"
"목화가 지면 솜이 피고 그는 곧 무명이라. 가난한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을 꽃이니 어찌 귀
하지 않겠느
냐고 하였나이다."
"그래? 그 계집 기특하구나! 하답이 은근히 색다르고 의젓하니... 광산김씨 익현의 여아라?
알았다!"
그것으로 들을 것을 다 들었고 볼일은 다 보았다. 왕은 나가라 손짓을 하였다.
"짐이 내일 새벽에 사냥터에 나갈 것이다. 내금위더러 그 차비를 하여라. 허고 월성궁 누이
에게 기별하
여 바로 게서 보잔다 전하여라. 누이가 불쌍하니 위로하여야겠다. 너는 내수사로 가서 계집
눈에 확 뜨
일 만한 패물 일습을 챙기어서 이 밤에 가져가거라. 누이가 계속 눈물이라, 짐의 마음이 아
주 찢어진 것
이다."
"간택이라, 궐이 뒤집혀졌는데, 전하께서 사냥터에 가시겠다고요? 왕대비전에서 노화를 내실
것입니
다."
지존의 말씀이되 상궤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어물어물 항명하였다. 곧 죽어도 불가하다 말하
는 장내관
에게 왕은 눈을 치떴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면 손아래 팔걸이라도 집어던질 기세였
다.
"알게 무어냐? 어차피 이 날의 소동이라 하는 것은 할마마마께서 무작정 고집을 피워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냐? 짐의 정이라 이미 하나이다. 어떤 계집이 비(妃)가 되든 짐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이름만 중전
이되 허수아비라. 짐은 월성궁 누이만 있으면 어떤 계집도 필요없다. 허어, 나가라 하였거
늘!! 이 놈 무
진아! 좀더 꽉꽉 주무르지 못하겠느냐? 짐이 말을 타다가 게에 톳이 섰다 하지를 않더냐?"
"헌데 어찌하여 말 등에서 장난질을 하신 것입니까? 아주 쇤네는 간이 졸아 죽는 줄 알았나
이다. 아니
대로를 달려가실 적에 무엇하러 애맨 사람 키를 넘으시는 것입니까? 만약 잘못하였으면 전
하의 옥체도
다치셨거니와 그 선비도 크게 변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다리를 주무르던 젊은 내관이 감히 주상전하를 상대로 한마디 볼멘소리로 치받았다. 그를
두고 방자하
다 타박대신 핫하 웃었다. 마치 여덟 살 먹은 개구쟁이와도 같은 장난기 서린 얼굴이었다.
짧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왕은 히죽 웃었다.
"흥, 심술이 나서 그랬다! 내외가 엄격한데 같잖게스리 젊은 계집과 사내가 나란히 가는 것
이라. 그야말
로 눈꼴이 시더라. 왜, 그러하면 아니 되는 것이냐? 짐이 만든 길을 짐이 말을 타고 달리는
데 어떤 놈이
무슨 말을 한다더냐?"
"아이고, 전하. 옥체가 상하시리라! 그게 근심이옵니다."
"말등에 엎드려 달리기를 한지 이미 여러 해니라. 짐이 실수할 리가 있나. 핫하. 그 앙칼진
계집아이 눈
빛이 어쩐지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짐을 노려보는데 꼴에 당당하기 유도 없더란 말이야.
핫하하... 내
일도 그러 하련다. 이번에는 남문통에서 한 번 그러 하여볼까?"
"제발 마옵소서! 마마. 말이 그리하다가 다리가 상하여 꼬꾸라지기라도 하면 옥체에 큰 변이
나시리라.
쇤네는 전하께서 말을 타실 적이면 그저 간이 달달 떨리어 눈을 뜰 수가 없나이다."
"짐의 재미가 대체 무엇이 있더냐? 그리라도 아니 하면 짐은 심심하고 무료하여 죽어버릴
것이다. 잔
말 말고 더 세게 주물러라! 이 놈이 밥술도 아니 먹었냐? 어찌 이리 팔에 힘이 없는 것이
냐?"
"두어 식경이나 내리 주물러 보십시오. 팔뚝에 쥐가 나옵니다."
"에이, 이 못난 놈! 턱에 수염이 나지 않는 놈이라 힘도 약하구먼. 나가라! 짐은 조하에 나
갈 것이다. 차
비를 하라."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왕은 다리를 뻗어 일껏 다리를 주무르던 내관을 걷어찼다. 나동그라
지는 그를
일별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이 며칠 원치 않는 대례의 일로 심사가 꼬인 터라, 혹여
왕의 심술을
건드릴까봐 내관은 아프다 말도 못하였다.
"의관을 정제하여라."
"예. 마마."
팔 척의 훤칠한 키. 여염집 도령인 양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던지고 정색을 한 채 용포에
익선관으로 성
장하시었다. 개구쟁이 같던 그 웃음이 사라지고 범처럼 당당하고 기상 강한 한 분 자존이
계실 뿐이다.
조하에 나아가 용상에 앉으셨다. 아랫것들이 들어와 고변하는 것을 듣자오시고 척척 분부를
내리시는
눈빛이 날카롭고도 총명하였다.
훤칠한 이마와 우뚝 솟은 콧날, 길게 뻗은 검미가 선명하고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
다. 약간 얄팍
한 주사빛 입술이 선명한 선을 그리며 관옥 같은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있었다. 실로 헌헌장
부라, 저 대
국의 사신들조차 단국의 젊은 국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여 이르기를 '동국의 반악'이라는
별칭으로 부
를 정도였다. 그러나 약간 찌푸린 이맛살에 신경질적인 기색이 역력하고 격한 그 성미가 치
켜 올라간 검
미에 어렸으니 옥의 티라...
보령 열아홉. 휘는 규. 자는 욱제.
선대왕 장조의 한 분 남은 피붙이로 희빈 홍씨의 소생이시다. 탄생 한지 백일만에 원자로
정해지고 걸음
마 시절부터 지존의 도리를 배우고 제왕의 훈육을 받고 자라신 분이시다. 어질고 지혜로우
셨으나 항시
병약하셨던 선대왕과는 달리 한번도 앓은 적이 없을 만큼 강건하고 영명하시었다. 어린 시
절부터 중신
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바로 그 분. 열한 살에 보위에 오르시어 이미 팔 년인데 드디
어 보령이 높아
지어서 안곁을 맞이하사 중궁전을 채우실 참이다 헌데 어찌 이리도 인륜지대사인 혼례를 남
일처럼 심
드렁하게 여기시는가?
그것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음이나, 그 일은 뒷장에서 볼 일이고...
간택에 참여한 소녀들이 다시 방으로 물러나왔다. 소녀들에게는 간단한 점심상이 나왔다. 비
록 조촐하
다 하였으나 궐 안의 음식치레이다. 사가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기이한 반찬이 곁들여진
면상이었다.
어느새 친하여진 보아 아씨와 소혜 아기씨는 각자 상을 받아 마주앉아 맛나게 점심을 먹었
다. 어지간히
어려운 일은 다 끝났고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싶어 홀가분하였다. 작은 목소리로나 재
잘재잘 소곤
거리며 두 소녀는 궐 안의 맛난 음식으로 입 호사를 하였다.
"재간에 오르시는 분들도 다 나가시는 것인가요?"
"원래는 그리합니다. 한 이십일이나 후에 재간에 오르시는 분들을 다시 궐에 부르는 것이
법도지요."
"아 그렇군요."
"허나, 이번은 그러지 아니하다 합니다. 워낙에 상감마마께서 보령이 늦어 국혼을 치르시는
것이라서요,
두어달포를 끄는 간택 절차를 조촐하게 하리라 왕대비전하께서 전교하셨답니다. 재간도 사
나흘 후에 이
루어지고 삼간택도 금세 하리라 하신답니다."
"그렇구먼요."
상을 물린 후에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초간택에 오른 처자들이 앉은 큰방에 상궁들이 들어
왔다.
"모다 일어나시옵소서. 왕대비마마의 전교에 따라 재간으로 가시는 분은 별궁인 화명궁으로
가시옵고,
그 이외의 분은 아침에 온 길을 따라 사저(私邸)로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문을 나서면 나인
들이 안내를
할 것이니 그대로 따르시옵소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안의 소저들이 일어섰다. 이 순간이 바로 재간에 오르는 처자와
탈락한 처자
들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문을 나서 신을 신었다. 상궁이 말한 대로 모든 처자들이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처자는 나이 지긋한 상궁의 안내를 받아 어디론가 떠나고 어떤 소저들
은 나인들을
따라 아침에 들어왔던 궐 문을 향해 돌아가기도 한다. 그 밤에 궐문을 나서는 처자들은 재
간에 오르지
못한 처자들이었다. 소혜아씨 또한 엉거주춤 다가오는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자신도
궐문을 나
가겠거니 싶어서 장옷을 챙겨들고 문쪽으로 항하였다. 뜻밖에도 상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공손하게 읍을 하였다.
"아기씨께서는 재간에 오르셨사옵니다. 별궁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실 것입니다. 내일 모
레쯤 왕대
비마마를 알현하여 낯을 보이실 것이니 쇤네를 따르시옵소서. 이 밤에 거처하실 곳으로 안
내를 하여 드
리겠나이다."
"저.. 저어.. 마마님.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 소녀같이 촌것이 재간에 오를 것입
니까? 저는
당연히 궐문을 걸어 나갈 참입니다."
허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파랗게 질려 부인(否認)하는 소혜아씨의 말에 상궁이 오히려
당황한 눈
초리였다. 다급하니 되물음을 하였다.
"소저께서는 광산 김씨 자산대감의 여식이 아니시온지요?"
"그.. 그러하옵니다만은..."
"그렇다면 소저께서는 틀림없이 재간에 오르셨나이다. 슬기롭고 영명하며 덕성이 높다 이미
소문이 자
자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두 분 대군대감께서 반드시 재간에 올려라 하셨나이다. 경덕궁 왕
대비전하께
서도 심히 궁금해하시는 고로 며칠 후에 직접 뵈옵게 될 것입니다. 허니 쇤네를 따라 오십
시오. 애들아,
아씨를 안내하여라."
나인들이 달려들었다. 억지로 등을 밀었다. 소혜아씨는 오들오들 떨면서 상궁과 나인이 시키
는 대로 따
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담을 넘고 후정을 건너 두려움에 떨며 걸어가니 날렵하고 자
그마한 건물
이 한 채 나타났다.
"아씨, 들어가시지요. 이 밤은 예에서 머무실 것입니다."
재간에 오른 아씨들은 모다 여섯 분이었다. 방이 모자라 그런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
어서인지 한방
에 두 소녀가 거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보아아씨가 소혜아씨의 방 친구가 된 것은 불안에
떠는 그녀에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이미 방에는 저녁 진지상이 차려져 있었다. 사가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진찬이 즐비
한 그 상 앞
에서 소혜아씨 그저 석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껏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입
에 대지 못한
차라 몹시도 시장기가 돌지만 그러나 그 상머리에 붙어 무엇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
씨이다.
보아아씨가 가련한 모습에 안쓰러워 소혜아씨의 팔목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