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천둥벌거숭이들까정 궐에 들라 하는가? 아기도 어른들이 나가라 하니 마지못해 들어오신
것이 맞지
오?"
소혜아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고 활달
하게 흉금을
털어놓은 그 아씨에게 호감이 들었다. 아씨는 자신의 이름이 보아이며 아침부터 어른들에
의하여 시달
릴 대로 시달렸다 푸념을 하였다. 이마살을 찌푸리며 짜증까지 냈다.
"실상 간택이라 하는 것은 다 형식이고 거짓이외다. 보시오. 지금 나간 고운 아씨가 이조판
서의 따님이
신 중전마마 제일 후보라오."
"아, 고우십니다."
"그렇지요? 허고 저기 앉은 키가 훌쩍하니 크신 아씨가 바로 왕대비전의 친척이라 하오. 내
가 듣기로 왕
대비마마께서 중궁전에 앉힐 것이다 하신 처자랍니다."
소혜 아씨는 보아 아씨가 눈짓하는 대로 몰래 고개를 돌려 훔쳐보았다. 입이 딱 벌어질 정
도로 덕성이
있고 아릿다운 소녀였다. 침착하고 반듯한 앉음새가 달랐다. 꼬박꼬박 졸기까지 하고 속살거
리며 까불
어대며 어린 티를 벗지 못하는 그들과는 아예 격(格)이 다른 듯 하였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아이고, 참으로 덕성이 여실하십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아까 나가신 분인데 병조참판의 손녀가 있었소. 그이 또한 아름다운 태
도와 고귀한
품성이 중전마마 자리에 딱 맞춤이라, 아마 그 세분이 삼간택까지 갈 것 같소이다. 저 세 처
자를 뽑자고
우리 같은 말괄량이들까정 앞장세움이라. 사람을 이렇게나 피곤하게 하는 것이오. 하기는 나
쁠 것도 없
소이다. 평생 들어오지 못할 대궐 구경을 한 번 하였다는 것도 자랑일 테지. 눈 내려깔고 얌
전한 척 하며
윗전 앞에 나아갔다가 돌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여인치고는 말을 하는 품새가 시원시원하고 활달하였다. 보아 아씨는 자신이 대제학 심우정
의 막내딸이
며 나이는 열여덟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소혜아씨도 자신을 소개하였다.
"소녀는 이제 열다섯이며 아비는 관직을 버린 지 오래인 처사입니다. 그저 얼떨결에 들어왔
나이다."
"기이하오. 초간택에라도 오를 것이면 집안이 권문이거나 궐의 어른과 각별한 인연이 있어
야 하는 것인
데요? 누가 그대를 모시고 온 것이오?"
"그냥... 진성대군댁 마님께서 들어가라 하시어 들어왔나이다."
보아 아씨는 소혜아씨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였다.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찬찬히
소혜아씨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가맣게 타고 여위어 볼품없는 소녀의 맑은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표나지 않게 몰래몰래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보아아씨는 혼
자 생각에 잠
겼다.
'진성대군께서는 종실의 가장 웃어른이 아니신가? 주상전하께서도 감히 그 말씀을 거역하지
못한다 하
였다. 그런 분이 천거를 하여 모시고 들어온 아씨가 바로 이 아기라고? 겉으로는 볼 것 하
나 없고 나이
도 심히 어리며 집안 또한 권문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 아기를 대군께서 간택에 올린 것인
가?'
방문이 열리고 상궁이 나타났다. 다시금 예닐곱의 소녀를 안내하여 다른 방으로 건너가라
하였다. 그 일
행 중에는 소혜아씨와 보아아씨도 끼어있었다.
소녀들이 대기하여 기다린 방보다 두 배는 더 크다란 방이었다.
발을 친 아랫목에는 종실 어른들이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눈을 흡뜨이 뜨고 소녀들의 흠을
잡아내려고
하는 상궁 내관들도 수풀처럼 몰려와 문 밖에 둘러있었다.
소녀들은 각기 나인들이 안내하는 대로 방석에 나란히 앉았다. 방석에는 미리 소저의 아비
의 성과 이름
이 적힌 표적이 붙어있었다. 다른 소녀들은 자리에 앉는데 소혜 아씨만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잠시 망설였
다. 방석을 옆으로 밀어놓고 맨바닥에 곱게 앉았다.
옆에 책상을 놓고 앉아있던 승지가 한 명 한 명 명부를 넘기며 소저들의 본관과 아비 이름,
그리고 연치
들을 웃어른들께 아뢰었다.
"한 명 한 명 똑같이 소저들께서 덕성이 높아 보이고 그 고귀한 아름다움이 빛이 나니 어찌
주상전하의
홍복이 아니랴? 대군께서는 하문하시지요?"
영의정 홍이성이 수염을 떨며 한마디 입에 발린 칭찬을 하였다. 옆에 앉은 진성대군을 바라
보았다. 진성
대군은 또 옆에 앉은 효성군을 바라보았다. 금상의 중숙부이신 효성군은 선대왕과는 태는
다르지만 두
분뿐인 종실의 큰 어른이시다. 형님의 말없는 재촉을 받고는 입을 열었다.
효성군의 시선이 닿은 곳은 오른쪽 두 번째 자리였다. 다른 처자들과 다르게 방석을 밀어놓
고 맨바닥에
앉은 소혜아기씨에게 물었다.
"소저는 어이하여 앉아라 하는 방석을 놓아두고 맨바닥에 앉았는가? 그 이유를 듣고 싶구
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아졌다. 당황하고 놀라 어린 소혜아기씨 얼굴이 벌개졌다. 묻자
오시니 대
답은 하긴 하는데, 목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마냥 가냘프게 흔들렸다.
"마, 망극하옵니다. 소, 소녀는... 다만... 앉으려 방석을 보자하니, 아버님의 본관과 함자가 그
위에 적혀
있었사옵니다. 딸 된 도리로 어찌 감히 사친의 함자를 깔고 앉으리오. 차마 그리는 못하리라
싶어, 맨바
닥에 앉았습니다. 허물이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허어, 참으로 효심이 지극하도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하였는데, 소저의 대답이 참으로
아름다운지
고! 어린 터인데 말 한번 기가 막히는구나. 대체 누구의 여식이라 하였노?"
효성군이 감탄하였다. 소혜아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소녀들도 얼굴을 발갛게 붉히
었다. 황황
히 방석에서 내려앉았다. 그것 때문에 소혜 아기씨의 작은 얼굴은 더 벌개졌다.
"계산골의 광산 김씨 익현의 여아이옵니다."
승지가 비책을 넘기어 대답하였다. 종친께서 누구냐 하문하시고 관심을 보이는 처자였다. 시
키지 않아
도 이름 옆에 비점을 쳤다 재간에 올렸다 그 뜻이다.
"김익현이라?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구먼. 그이가 형님, 선대왕시절에 도승지에 올랐
던 자산이 아
닌가 하옵니다만..."
"그렇다 싶다. 그이가 염직하다 형님전하께서 총애함이 컸던 터였지. 느지막이 여식을 하나
얻었다 하더
니 저 소저가 그 아이인 모양이구나."
"그러한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산의 얼굴이 다소 보이옵니다."
소혜 아씨를 바라보는 효성군의 눈길에도 인자함이 넘쳤다. 그가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감히 간택에 올라온 소저들을 시험하여 그 슬기와 덕성을 살피자 함이니 하문하노라. 소저
들은 대답을
할 지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 무엇일꼬?"
소녀들이 생각에 잠겼다. 차례로 대답하라 하였다. 어떤 소녀는 장미화, 어떤 소녀는 연꽃을
말하였다.
보아아씨는 풍염함과 볼품으로 보면 참으로 일등이라, 천하에서 가장 귀한 꽃은 모란입니다
낭랑한 목
청으로 답변하였다.
"그리하여 시문가객이 황후장상에 비유할 적에 모란을 드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
한 꽃은 모란
꽃이라 생각합니다.
소혜아씨 차례였다. 긴장하여 고개도 채 들지 못한 채 아기씨는 나직한 목청으로 대답을 하
였다.
"...소..소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은... 목화송이, 무명꽃이라 생각하옵니다."
"허어. 소저 말이 심히 기이하도다. 어찌하여 무명꽃이 가장 귀한 꽃인고?"
하문하시는 분은 진성대군이었다. 지금껏 도통 입을 열지 않던 분이 관심을 가지고 다시 묻
는 유일한 답
변이었다. 방안의 모든 시선이 당장 다시 소혜아씨에게 몰려왔다. 긴장하여 달달 떨면서도
심중의 뜻을
수줍은 목청으로 밝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을 따뜻하게 입히는 꽃이 무명이옵니다. 천지간
귀한 것으
로 목화를 따를 것이 없다 생각하옵니다. 다른 것은 모다 그저 보기 즐기기는 좋으나 지고
나면 그 뿐이
지요. 아무 보람이 없는 것이지만 목화꽃은 지고 나면 바로 무명 타래가 되고 이는 곤고한
백성이 즐겨
입는 옷감이 되는 것이니 어찌 귀물이 아니라 하겠나이까? 소녀의 좁은 소견으로는 참으로
귀하고 고마
운 꽃은 오직 하나 목화뿐인가 하옵니다."
"아비가 어질고 강직하니 여식도 따라서 의젓하고 덕이 깊은 것이라... 허어, 목화라... 목화
꽃이 제일 귀
하다? 백성을 입히는 꽃이니 귀하다?... 기특한지고! 어린 것이 속도 한 번 깊구나."
진성대군이 저절로 감탄 반 혼잣말처럼 하시었다. 효성군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리었다. 소혜
아씨를 바
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그런데 문 뒤에서 소저들이 묻고 대답하는 것을 엿듣는 귀가 하나 있었음이라. 방안의 사람
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 그림자가 살며시 뒤란을 돌아 사라졌다.
검은 그림자는 잰걸음으로 전각과 회랑을 돌아 제일 번듯하고 웅장한 전각으로 스며들었다.
그늘에서
빠져나온 그림자의 주인공은 늙은 내관이었다. 궁녀들이 지켜선 문 앞에서 나직하게 아뢰었
다.
"전하, 쇤네 장내관이옵니다."
대답 대신 안에서 문이 열렸다. 방안에 들어선 그는 엎드려 깊은 절을 하였다.
"그래, 동정을 살피고 왔느냐? 잘 되어 가더냐?"
점심 수라를 젓숩고 잠시 차를 마시는 시각이다. 용포에 익선관은 벗어두고 편안한 도포 차
림에 옥동곳
을 꽂은 소년왕이 비스듬히 보료에 드러누워 있었다. 젊은 내관이 왕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
었다. 고귀한
기상이 하얗고 훤칠한 이마에 어리었다. 어깨가 넓고 이제 막 턱을 덮을 정도인 수염이 거
뭇하였다. 반
쯤 감은 눈에는 가끔씩 번갯불 같은 신광이 내비추이고 있었지만 솔직히 청년왕의 용안에는
짜증스럽고
권태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래. 숙부께서는 어떤 하문을 하시고 또 그 계집들은 무슨 대답을 하더냐?"
"효성군마마께서 하문을 하셨사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 무엇이냐 하셨나이다.
소저들께서
갖가지 꽃을 다 말을 하는데,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창포꽃을 곱다 말하시는 분이 여럿 되었
나이다."
왕이 코방귀를 뀌었다. 몸을 일으키어 서안에 팔을 고였다.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
며 심드렁하
게 내뱉었다.
"흥, 입에 발린 소리. 짐 눈에 들자 별별 계교를 다 꾸미는 것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소리로
창포꽃이 곱
다 한마디를 하였더니 당장에 소문이 퍼졌구먼. 짐을 한번도 보지 못한 계집들이 먼저 나서
창포 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