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도록 빨리 가거라 재촉할 뿐이었다.
"아버님! 소녀가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요? 아니 들어가면 안되는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기씨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설풋 서려있었다.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소녀는 싫사옵니다! 호사광영도 싫고 중전마마가 되는 것도 싫사옵니다. 아버님 뫼시고 그
저 예전대로
살 것입니다! 아니 들어 갈 것이어요!!"
"어허. 간택에 참여한다 하여 다 궐서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윗전 앞에 한번 나아
갔다 온다 이
리 생각하려무나. 네 평생 어디서 궐 구경을 할 것이냐? 어여 가거라. 부부인께서 기다리신
다. 귀인을
하냥 기다리게 하는 것은 결례이니라. 어서 가거라."
그러나 소혜아씨 고개를 흔들었다.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마
침내 김익현이 버럭 역정을 내었다.
"너가 참으로 이 아비를 우세시키는구나! 자식이라 할 것이면 아비의 말을 제대로 들어 순
명함이 첫째라
하였거늘!"
"아버님!"
"너가 그 전에는 이러지 아니 하더니 이렇게나 불손함이라. 어찌 대군마마께 이 아비가 고
개를 들 수 있
단 말이더냐? 어서 가거라. 늦어 궐 문이 닫혀지면 낭패이니라. 너가 어리석고 촌 것이라,
아마 이 밤으
로 초간택에서 밀려나 다시 나올 것이다. 허니 걱정말고 어여 가거라, 이 아비는 밤서 네가
차려주는 녹
두죽을 먹을 것이다."
"...허면은 소녀가 잠시 다녀 올 것입니다, 아버님. 유모더러 녹두를 담가놓으라고 하였으니
밤서 녹두죽
을 하여 드릴 것이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이제는 참으로 어찌할 수 없다 싶어 댓돌 아래 소혜아씨는 마지못하여 인사를 하였다. 그러
나 그렇게 아
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이별한 두 부녀지간이 다시 편안하게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임을
김익현은 너
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님을 내보내고 문을 닫는 김익현의 노안에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부친
의 무너지는 마음을 소혜아씨는 꿈에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조정에서는 금혼령 이후, 전국에서 올라온 처녀 단잔 중에서 추릴 것은 추리고 보탤
것은 보태어
초간택에 오를 오십여 명의 단자를 뽑은 후였다.
실상 간택이라 하는 것은 명목의 절차일 뿐이었다. 금혼령을 내려 간택한다 그 뿐이지 이미
내전의 어른
들이 내밀하게 점지한 여아를 뽑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내전의 어른 심중에 든 여아
가 누구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궐 안에 드는 고운 처자들 모두다 자신이 중궁전에 앉을
꿈을 꾸는 것
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성덕궁.
상감께서 거처하시는 지엄한 대궐의 정문인 창희문 앞에는 연신 화려한 등자와 가마들이 밀
려들었다.
그 가마에서 내리는 꽃 같이 아릿다운 소녀들은 연신 내 딸이 중전마마가 되게 하여 줍시오
하고 기원하
는 제 아비 어미, 유모와 수종들을 뒤로 하고 창희문을 들어섰다. 궐 문 앞에는 거대한 무쇠
솥이 놓여
있었다. 간택에 오른 처자들은 그 무쇠 솥뚜껑을 밟고 넘어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혜아씨가 타고 온 진성대군댁 가마가 궐 문 앞에 도착한 것은 초간택에 오른 소녀들이 다
들어간 후였
다. 막 궐문이 닫히리라 대고(大鼓)소리가 나던 참이었다. 가마에서 내린 소혜아씨, 연초록빛
깁을 댄
장옷을 팔에 걸치고 이미 적막한 궐 문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레둘레 하였다.
일단 소녀는 길고 높은 궐 담과 우뚝 솟은 창희문의 위용에 기가 팍 죽었다. 궐 문 지키는
병정들이 몇
백 명인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군기 엄연한 모습에 오금이 저렸다. 이대로 도망을 갈까 하였
다. 그런 그
녀를 잡아챈 것은 진성대군댁 하님이었다.
"어서 들어가소서. 들어가실 적에는 궐 문 앞의 솥뚜껑을 밟고 들어가시는 것이 법도입니다.
허고, 아씨.
오늘 초간택에서 빠지어 재간에 아니 들면은 저녁에 다시 궐문을 나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쇤네가 기대
리고 있을 것이니 걱정이랑 말으시고 어서 들어가십시오."
"참으로 약조하였네! 반드시 기다려주소. 이 촌 것이 예가 감히 어디라고 얼굴을 내밀겠는
가? 내가 어지
러워 천지분간이 아니 되니 잠시 들어갔다 금방 나올 것이오. 어멈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
소."
소혜아씨는 진성대군댁 하님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하였다. 반드시 그러하겠다는 언약을 받
고서야 주저
주저 무쇠 솥을 밟고는 궐문을 들어갔다.
그러나 어멈은 아씨의 작은 몸이 상궁의 인도를 받아 저만치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문틈
으로 지켜보
다가 냉큼 돌아섰다. 가마잡이들을 재촉하여 어서 집에 가자 하였다. 가마군이 어이가 없어
아씨를 기다
린다면서요? 하고 되물었다.
"기다릴 필요 없네! 오늘 중으로 아니 나오실 것이야! 기다려도 소용이 없으니 그만 가세!"
"하지만 나오시면 어찌 하우?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기씨 같이 보이던데 어멈이 기대
린다 하여놓
고 없으면 아기씨가 요량도 없이 허둥지둥 할 것이라. 차마 인정으로는 그리 못할 것이오!"
"아이고, 절대로 아니 나오시니 그만 하고 가자니까!! 마님께서 이르시기 아기씨는 이미 중
간택에 오르
신 몸이라 하였어. 절대 아니 나오실 것이야."
어멈은 가마군을 재촉하여 그 자리를 떴다. 진성대군댁 가마인 줄 남이 알면 필시 시끄러울
것이다 하였
다. 아씨만 내려주고 잽싸게 사람 눈을 피하여 돌아오라 마님이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 "잘 모시어야 할 것일세. 대군마마께서 이르시기 그 처자는 반드시 재간에 올라 중궁전이
되실 것이라
하였어. 지금 보기는 비록 미천하고 보잘것없되 대군마마께서 오래 전부터 두고 본 아기라.
주상전하께
서 관례를 올리신 직후, 금방 국혼을 치러야 하는 것을 저 아기가 어려서 연치 차지 않아
그를 기다린다
하여 몇 년이고 미룬 터이야. 허나 어멈은 아무 말도 말고 아기가 무어라 물어도 네, 네만
하고 입을 봉
하게. 대군마마께서는 소저에게 누가 될라 아무 말도 아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셨어.
허고 이미 주
상의 총애를 차지한 월성궁의 계집이 간악하여 혹여 주상이 다른 여인을 볼까 항상 호시탐
탐 해악을 끼
치려 노리고 있음이라. 만약 대군께서 그 아기를 데려왔다 알게 되면 결코 그 아기를 가만
두지 않을 것
이니 자네는 사람 눈을 피하여 금새 돌아오게. 자네가 진성부에서 나온 것을 아무도 알게
하면 아니 되
는 것이야!"
하님은 사람이 볼세라 자꾸 가마군을 재촉하였다. 금세 자리를 떴다. 차가운 바람만 휭하니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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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모르고 어린 소혜 아씨. 푸른 치마에 녹색 당의를 차려입고 어여머리를 곱게 틀
어앉힌 상궁을
따라 내전으로 접어들고 있는 참이었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게
곁눈질하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언제 다시 궁궐에 들어와 볼 것인가?
몇 십 채, 몇 백 채인지도 모를 만큼 장엄한 고루 거각들이 늘어섰다. 화려한 단청이 눈을
어리는 건물들
이 번듯하게 늘어섰다. 푸른 수로를 지나는 석교를 지나 몇 개인지도 모를 문을 지났다. 아
름드리 수목
들이 번듯하게 늘어선 정원이며 건물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또한 모두다 비단의대를 차려입
었다. 옥돌
같이 차고 아름다운 사람들 뿐이라, 소혜 아기씨, 그저 여기가 천상인지 인세인지 모를 만큼
황홀하였
다.
긴 회랑을 지나 한참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기와집 축대 앞에서 상궁이 공손하게 읍을 하
였다.
"오르시지요. 초간에 접어드는 소저들께서 모다 모여 있는 곳이니 아씨도 올라가옵소서."
어리버리한 채 소혜 아씨는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궁녀들이
열어주는 문
으로 들어섰다. 십여 칸이 넘는 방은 마치 회랑처럼 길쭉하였다. 기름먹인 장판지가 번들거
리고 창에는
비단 휘장을 둘렀으며 옥주렴을 드린 화려한 치장에 어린 소녀는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방
안에는 자신처
럼 똑같이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고운 소녀들이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이미 방에 들어 앉아있는 소녀들을 일별하는 순간, 소혜 아씨의 마음은 한결 진정되었다. 비
교하여 자신
이 제일 어린 듯 하였고 못나기도 제일이라, 순간적으로 기가 죽었다. 그러나 금세 안심도
되었다.
수풀 같이 많은 사람 중에서 초간택에 올랐다는 것은 이미 그 소저의 가문이 범상치 않다는
뜻이다. 사
직의 주인인 왕의 지어미가 되는 일이다. 가문으로나 인물로나 덕성으로나 한 점 빠짐이 없
는 처자들만
추리고 추린 터이다.
소혜 아씨, 부끄러운 눈을 들어 슬쩍 삼삼오오 모여 있는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다 명문
대가에서 천
금으로 고이 자란 티가 엿보였다. 비단 의대로 차려입고 분세수 곱게 한 얼굴로 단정하게
앉아있는 모습
이 그림 같았다. 전부다 자신보다 더 어여쁘고 고귀하고 영리하게 보이었다. 오히려 안심이
었다. 이런
쟁쟁한 집안의 고운 소녀들 틈에서 못난 자신이 어찌 위전의 눈에 뜨일 것인가? 원한 바대
로 이 밤에 궐
문을 걸어 나갈 참이다 싶으니 오히려 침착해졌다.
'이날 못난 촌것이 감히 궐에 들어왔다 큰 창피를 한 번 당하고 금세 나가게 될 것이야. 아
버님 말씀대로
평생 하기 힘든 대궐 구경이나 단단히 하고 가야지. 복순이 그것이 나에게 조르기 반드시
궐 안 이야기
를 하여 줍시오 하였으니 내가 잘 보고 들어야 할 것이다. 헌데 유모가 녹두를 담가 놓았는
지 모르겠구
먼. 정신이 산란하여 잊어버렸으면 어쩌지? 아버님께서 녹두죽을 듭시겠다 하였는데... 아이
고, 나는 다
싫다! 빨리 일을 마치고 나갔으면... 아침부터 사람을 어찌나 날치게 잡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
제야 곤하여 잠이 올 것 같구나...'
이런 저런 생각에 햇살 드는 양지에 앉은 소혜아씨, 자신도 모르게 벽에 기대어 졸고 말았
것다? 다른 소
녀들이 어이없어 손가락질을 하고 히죽거리며 비웃는 것도 알지 못하고 병든 닭처럼 꼬박꼬
박 조는 좁
은 어깨위로 말간 햇살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가만가만 흔드는 것을 느꼈다. 소혜 아씨는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입가
에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낯선 소녀였다. 반듯한 가르마를 탄 검은 머리타래가 탐스럽다. 하
얗고 복스러
운 인상의 아씨였다. 다정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져 있었다.
"아기가 곤하였나 보오. 하지만 눈을 떠야 할 것이오. 지금 우리가 몇 사람씩 나아가 윗전에
선을 보이어
야 하는데 얼마 후이면 우리 차례가 오는 듯 하오."
큰 일을 앞에 두고 졸음에 겨운 스스로가 민망하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는 소혜
아씨를 두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아기는 안즉 연치가 어린 고로 아마 나처럼 아침부터 유모에게 어지간히 시달렸
나 보구려.
도통 이 간택이라 하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소이다. 이미 중궁전이 정하여 있음에도
어찌 우리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