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0)

려다보기만 하였다. 주름지고 야윈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 후, 그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이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하였다. 지극한 공경의 예를 

치른 후에 

꿇어앉았다. 덜덜 떨리는 야윈 손으로 서찰을 펴들었다. 이윽고 주름진 얼굴 아래로 굵은 두 

줄기 눈물

이 흘러내렸다. 

"전하... 전하! 어찌하여 신에게 이토록 무서운 일을 부탁하옵시는지요? 신은 감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신의 딸년이 궐에 들어가면 평생 허수아비 뒷방 신세라... 저 가엾은 것을 어찌 하라고 신에

게 이런 하명

을 하옵시는지요? 전하... 그저 신은  남기신 이 유훈(遺訓)이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전하, 

흐흐흑흑.." 

군신(君臣)관계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벗이었다. 다정하고 현명하신 선대왕의 은혜로움과 성

은을 받은 

김익현, 마침내 그리운 그분의 어찰을 품에 안고 통곡을 하였다. 원망과 그리움과  안타까움

이 섞인 괴로

운 울음이었다. 그분이 승하하시기 전에  내리신 마지막 유훈을 감히  어찌 거절하랴? 오직 

그 분께 진정

한 충성만을 다짐한 터, 하나 그러기 위하여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을 호굴

에 집어넣야하

는 것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당의 소혜아씨. 그  밤 내내 부친께서 잠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만 있는 

것에 애가 탔

다. 몸의 용태가 좋지 않아 그런 줄로만 알고서 밤 내내 발을 동동 굴렀다. 정성껏 다린 약

대접을 들고 

종종걸음을 쳐보지만, 어둡고 흐린 부친의 안색은 달라질 줄 몰랐다. 

한편 그 날 밤이다. 번동의 유형원. 퇴궐하여 사랑채에 건너온 정씨에게서 오정에 계산골 아

기가 다녀갔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씨는 벙싯 웃으며 자랑을 하였다. 

"대감, 그 아기가 자라면서 갈수록 고와지더이다. 영명하고 덕이 높은 것이야 이미  알고 있

는 일이되 또

한 그 용모라, 어린 티가 다 가시니  훗날 새악시가 되면 곱다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홋호

호. 내년쯤에 

혼사를 치루어야지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뜬 기대에 가득한 안해의 말에 유형원이 흐음 하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난처한 얼굴이었

다. 목에 가시

가 걸린 듯이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음, 음... 그게 말이오. 부인. 난처한 일이 생겼소. 내가 이날 듣고 오기로...  계산골 그 아기

가 아마도 초

간택에 오를 것 같소이다." 

"무어라고요?" 

정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어이없어 한마디 앙탈을 하였다. 손에 들어왔다 여긴  장

중보옥을 엉

뚱하게 남이 가로채려한다니 어지간한 그녀도 노화가 돋은 것이다. 

"아기를 간택에 올리어요? 무슨 그런 도리 어긋난 일이 있사옵니까? 자산대감께서는 조하를 

물러난 지 

오래이며 약조는 아니 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집안과 혼인을 하기로 말이 다 된 것이 아닙니

까? 헌데 그

런 처자를 간택에 올려요? 그 양반이 그렇게 신의가 없는 분인 줄 내가 몰랐습니다." 

"어찌 자산대감께서 먼저 나섰겠소? 그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부인께서 더  잘 알

고 있지 않습

니까?" 

"헌데 어찌 아기를 간택에 올린다 합니까? 권문세가  고운 처자들이 별같이 많고 많습니다. 

빈한한 선비 

집에서 그 딸을 간택에 올리어도 상감마마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할 것입니다. 허고, 중전마마

라 사직의 

안주인이며 그 아비는 권세를 손에 쥔 부원군이 되는 것이니 조하의 당당한 중신들이 서로 

다투어 노릴 

자리이거늘... 어떻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산대감이 그런 생각을 다 하신 것인지오? 

당장에 그 

아기를 간택에 올리려면 가마며 수종이며 비단 의대부터 지어야 하는데 그 집에는 그런 여

유도 없는 터

가 아닙니까?" 

"자산인들 그것을 모를 것인가? 그이가 강직하고 곧으니 어디 시끄러운 부원군 꿈이나 꾸었

겠소? 허나 

진성대군마마께서 선대왕 전하의 유훈을 들어 반드시 아기를 간택에 올려라 고집을  하셨다 

합디다. 선

대왕께서 자산의 따님을 두고 인세에 보기 드문 귀한 관상을 가진 아기다 듣자오시고 유훈

을 남기시기

를 반드시 그 아기를 상감의 비로 올려라 하였다 하니 난처한 일이 아니겠소?" 

"....선대왕께서 유훈을 남기셨다고요?" 

유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근조근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 역

시 솔직히 

열이 난 참이었다. 그야말로 손안에  든 보옥을 억지로 가로채인 듯  하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

나 신하된 도리로 어찌하랴? 순명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자산이 도승지 시절, 선대왕께 참말로 충심을 다 받쳤어요. 선대왕전하께서도  자산을 아끼

기를 마치 사

가의 친우보다 더하였으니 두 분의 그 마음은 감히 남들이 범접치 못할 만큼 굳은 터였소이

다. 선대왕 

전하의 유훈이 간곡하니 어찌 신료된 도리로 그 말씀에 항명하리요?" 

"......아이고. 저는 몰라요!" 

정씨가 팩 골을 내며  돌아앉았다. 당장 "어머니, 겨울쯤에  초례를 치르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부쩍 서

두르던 아들 재응에게 무어라 말을 하여야할지 눈앞이 캄캄하였다.  차마 대놓고 말은 못하

였어도 그 말

을 하며 귀밑이 벌겋게 붉어졌다. 은근히 아기를 두고 사모하는 마음이 깊다는 뜻이었다. 

"듣잡기로 망극한 일이나, 주상께서 눈이 높으시고  이미 월성궁의 여인에게 미혹하여 한참 

정분이 불같

다 하였습니다. 아기가 아직은 어리고  미색이 보잘것없음이라 도도한 전하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되 

후궁에 앉으시는 것이야 왕대비전과 대군대감이 마음대로 정하실 수 있는 일이라... 기가 막

혀서! 이거

야  말로 닭 쫓던 개가 지붕 올려다보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할 것입니까? 

우리 재응이

가 상심이 클 것입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게지요. 양가에서 혼인을 하자 심중으로 그런 뜻은 있었다 하여도 안즉 

입 밖으로 

내어 정한 것은 아니니 정혼하였다 하지도 못할 참이고... 진성대군께서 반드시 아기를 궐로 

들일 것이

다 하고 나에게 아주 대놓고 말씀을 하십디다. 이는 나더러  그 혼삿말을 없는 것으로 물려

라 하는 분부

가 아니겠소?" 

".....아이고, 참으로 그 말이 사실일  것이면, 계산골 아기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일은 이제 

그른 일이구

먼요." 

유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정씨가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어찌하지? 우리 재응 사정도 딱하되, 궐에 들어가 소박만 받을 아기 사정도 딱하옵

니다. 천하

절색이라는 월성궁 마마의 방해며 투기도 만만찮을 것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래서 자산의 근심도 대단한 것 아니겠소?" 

   

그로부터 열흘 후, 

미명이 돋는 새벽 나절. 계산골 동구에 들어서는 꽃가마가 있었다. 

귀한 집 마나님의 행차인지 여염집의 가마와는 아예 댈  것이 아니었다. 여염집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가마는 말 두 마리가 이끌고 가마잡이만도 여섯 명이나 되었다. 뒤에 따르는 아랫것들이 여

나믄 명이나 

되었는데 전부 하나씩 보따리들을 안고 있었다. 일행의 끝에는  네 사람의 가마잡이가 메고 

오는 또 다른 

가마 한 채가 뒤따르고 있었다.  빈 가마인지 자리채를 잡은 가마잡이들  이마에는 땀 하나 

흐르지 않았

다. 

번화한 일행이 멈춘 곳은 김익현의 집 대문  앞이었다. 길을 앞장선 청지기가 이리 오너라! 

고함질렀다. 

대문이 삐끗 열렸다. 

"진성대군댁 부부인의 행차이시네. 오실 줄을 알고 있을 것이니 사랑에 기별을 하시게. 허고 

이 집 아씨

를 뫼실 것이야. 부부인마님을 안채로 안내하시게." 

아무 영문도 모르는 소혜아씨. 찬간에서 나물의 간을 보다가 냉큼 잡혀 들어가 욕간통에 앉

혀졌다. 유모

는 아씨를 욕간시키면서 자꾸만 눈물을  훔쳐내었다. 대체 왜 이러오?  하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었

다. 소혜아씨는 대체 이 모든 소동이 무엇 때문이지 짐작을 못하였다. 

시각이 지체되는가 싶었던 모양이다. 대군댁 하님이 미적거리는 유모를 몰아냈다. 자신이 냉

큼 아씨를 

모셔다가 쓱쓱 화각 참빗으로 머리를 빗기고 비단 댕기로  머리를 여며주었다. 전부 진솔로 

지은 비단 의

대를 펴놓고 빨리 입어라 재촉하였다. 아씨 품에 꼭 맞게 지어진 고운 옷이었다. 송화색  저

고리에 다홍

치마가 고왔다. 유모가 소혜 아씨에게 비단 속저고리를 입히고  그 위에다 덧저고리를 입히

며 눈물을 훔

쳐냈다. 난생 처음 입어 보는 비단옷이다. 고운 옷을 입으면서도 소혜 아씨의 얼굴은 두려움

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린 소녀는 이 모든 일이 그저 혼란스럽고 두렵고 불안할 뿐이었다. 

"마님, 아기씨가 전부 차비를 끝내었나이다." 

대군댁 하님이 안방에 앉은 부부인마님께 고변을 하였다. 문이 열렸다. 소혜아씨는 머뭇머뭇

하며 아랫

목 방석에 앉은 부부인 앞으로 다가앉았다. 

"놀랐을 것이야. 그렇지?" 

"....예, 소녀는 도무지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소헤 아씨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부부인이 인자하게 웃음지었다. 그러나  금세 

정색을 한 얼

굴빛이 서늘하였다. 

"이제부터 내 말을 단단히 명심하고 들어야 할 것이다. 소저는 이 길로 궐에 들어갈 것이니

라. 주상전하

의 안곁을 맞이하기 위하여 간택령이 떨어졌으니 아기도 초간택에 참여케 하라  대군마마께

서 하명을 하

신 것이거든. 오늘 초간택에 참여하는 것은 소저의 일생에 있어서 무한한 광영이라. 마음 단

단히 먹고 

배운 바대로 예절바르게 하여 윗전의 눈에 뜨이어 주상의 안곁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이미 

기별을 하였

으니 부친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들어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너라. 시각이  급하니 

오래도록 지

체지 못하리라."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들 이렇게 놀라우랴? 어린 저를 두고 갑작스레 혼인 말이 나오는 

것도 기함

할 일이었다. 하물며 여염집 혼사도 아니고 주상 전하의 비(妃)가 될 간택에 참여하라니. 소

혜아기씨의 

가맣고 여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 마님... 도대체 이것은... 소.. 소녀더러 궐에  들어가라니요? 배우지 못한 촌것더러 어찌 

이리 망극

한 부분을 하시는지요?" 

"아기가 이미 열다섯이니라. 간택에 참여할 수 있는  연치가 아니더냐? 부친께서 조하의 녹

을 먹은 신로

인 지라, 따님을 곱게 키워 간택에 올림은 당연한 충정이 아니더냐? 이 일은 어른들이 모다 

알아서 정한 

바이니 소저는 아무 말 말고 순명하라! 시각이 급하니 사랑에 나가 부친께 어서 하직인사를 

하고 나오

라. 궐 문이 닫혀지면 낭패가 나느니라!" 

부친 김익현은 소녀를 아예 방안에  오르지도 못하게 하였다. 사랑방 창만  열고 이미 말을 

다 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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