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00)

약이 오른 복순이가 이제는 까맣게 멀어진 그들을 향해 욕을 하였다. 소혜아씨도 기가 막혔

다. 남이야 

다치건 말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풍처럼 사라져 가는 그 무례한 일행들을 바라보며 혼잣

말을 하였다. 

"무에 저리 방자한 사람이 다 있는가? 이 대로를 마치 저들이 전세 낸 듯 하지  않는가? 국

법이 엄연하거

늘, 사람과 수레들이 번잡하게 지나가는 길을 저렇게 말을 타고 질풍처럼 내달리면 자칫 잘

못하면 사람 

상하기가 여반장이라. 어떤 집 자제이기에  저리도 오만방자하게 대로를 내달리는가?! 하물

며 사람의 키

를 넘다니!! 만약 잘못하였으면 오라버님이 크게 다칠 뻔한 것이 아니던고?" 

허나, 아씨는 모르되 지금 그렇게 말을 타고 대로를 오만하게 달려간 그 청년이 바로 이 나

라 주인이신 

상감마마라!! 

짓궂은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치켜들고 위풍당당하게 달려가던 그 청년이 몇 달 후면 아씨

의 지아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알랴? 말을 타고 달려간 왕도 마찬가지이니 자신이 왕비로 맞아드

릴 소녀를 

그런 식으로 처음 만났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것이다. 

***********

재응 소년은 집 앞까지 아씨를 바래다주었다. 미적미적하여 보았지만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

다. 아쉽게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속의 말 한마디를 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

니다 싶어 꾹 

참았다. 한해나 더 지나면 자신의 내자(內子)가 되려니.... 공손하게 절하는 소혜 아기씨를 바

라보며 맞

절하는 재응소년의 눈에 정이 함뿍 묻었다. 

한참 서서 재응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배웅을 마치고 대문을 들어섰다. 어쩐지  조용

하여 절간 같

던 집안에 사람이 많고 번잡하였다. 이것이 어인 영문인가? 얼떨떨하고 의아해하는 소저 앞

에 청지기가 

나와서 맞이한다. 

"아씨, 돌아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어찌 집이 이리 번잡한가? 빈객이 오셨는가?" 

"오후에 진성대군마마께서 또 오셨습니다." 

"아이고, 그러하였나?" 

"지금 사랑채에 계십니다. 허고요, 아씨. 대군마마게서  쌀섬이며 진귀한 별찬이며 바리바리 

광에다 들여

주시어 아주 난리가 났나이다. 찬모가 자운궁(진성대군의 사저)에서 나왔기로 지금 정지에서 

찬거리를 

마련한다 합니다." 

감사하고 고맙기는 하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가 알 수 없어 

소혜아씨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의 회오리바람을 알지 못한 채 소녀는 

그저 의아

할 뿐이다. 

사랑채. 김익현과 마주 앉은 진성대군은 상에 놓은 술잔을 만족스럽게 비웠다. 앞에 앉은 그

를 바라보았

다. 

"아기가 벌써 열다섯이니 인제 짝을 찾아갈  때도 되었소. 부모의 도리 아니오? 자산.  때가 

되면 제짝을 

맞추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이렇게 고집을 피우지 마시오." 

"대군마마. 소인이 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니오이다." 

말을 받는 김익현의 얼굴은 대꼬챙이처럼 말랐다. 그럼에도 형형한 눈빛에는 고집이 실려있

었다. 

"우리 아이가 철이 들었다 하나  이제 겨우 열다섯. 소꿉장난을 면한  어리디 어린것입니다. 

감히 어데다 

견주어 윗전 앞에 내어놓으리요? 하물며 배운 것도 없고 전에 보셨다시피 용모도 도통 보잘

것없습니다. 

도모지 천지분간도 못하는 철없는 계집아이이올시다." 

"아기의 영명함과 부덕은 이미 근동에 소문난 터. 지나친 겸손은 비례(非禮)라 합디다." 

"아니라니까요. 언감생심, 감히 어찌 미신(微臣)의 무지한  여식을 중궁전 간택에 올리리까? 

부대 그 무

서운 청을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 아이는 도무지 주상전하의 위엄에 걸 맞는 처자가 아니옵

니다." 

"자산. 주상이 벌써 보령 열아홉이오." 

은근하게 말을 건네는 진성대군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끝까지 김익현을 

설득하려 들

었다. 

"이 집의 아기가 열다섯. 연치라 맞추면은 되는 것이고 연분이야 하늘이 내리시는  일. 아기

의 영명함이

며 알뜰한 덕성은 감추어도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 두곡이 말하기를 집의 며느리 삼는다 언

제부터 호언

을 하기에 내가 말하였지. 핫하하, 그 처자 이미 간택에 오를 것이라 꿈도 꾸지 말라고 말이

오. 자산, 이

제 그만 고집을 거두시오."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는지요? 대군대감. 절대로  우리 집 아이는 중전마마 재목이 

아니옵니다. 

그만 망극한 뜻을 거두십시오. 천한 이 몸 또한 도저히 부원군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이것이 무슨 말이더냐? 바로 소혜아기씨를 주상전하 안곁으로 보아 간택에 참여케 하

라고 진성대

군께서 김익현에게 청을 하고 있음인가? 그리고 보면 며칠 전 소혜아씨가 용에 감겨 잡아먹

히는 꿈을 

꾼 것은 이런 운명의 전조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병약하여  깡마른 김익현의 얼굴은 뜻밖에

도 완강하였

다.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내어 약조는 아니 하였으되 두곡과 제가 이미 혼사를 하자 작정을 하였기로  이미 마

음을 굳힌 참

입니다. 가문도 그만하며 드나들기 오래라, 이 집안 빈한한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처지에  사

돈을 맺음도 

흉이 아니라 싶어 결심한 바이니 부대 신이 벗과 약조한 일을 어기게 말아 주옵소서." 

"이보시오, 자산. 사람은 태어나기 하늘이 점지하여준 짝이 있는 법이며 그 쓰임이  다 틀린 

터이오. 집의 

아기는 반드시 궐에 들어와 주상의 안곁으로 대조전에 앉아 이 나라 사직의 혈손을 그 태로 

이어주셔야 

할 분이오. 그대도 알지 않소?" 

진성대군의 얼굴이 엄숙하여졌다. 술기운이 오른 듯 벌건 안색이 꼭 취기만은 아니었다.  더

없이 진중하

고 완강한 어조로 진성대군이 김익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주상께서는 보령 이미 한참 늦었어요. 이태전에 이미 대례를 치르시어야 할 것이되 

내가 어려움

을 무릅쓰고 지금껏 삼 년이나 그 일을 막았소이다. 그  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시겠

소? 바로 집의 

아기가 연치 어려서 간택에 참여치  못할 것임을 두려워 그랬던 것이오.  이제 그만 고집을 

푸시오. 집의 

아기는 반드시 중궁전에 오르셔야 하오이다. 자산께서는  반대하셔도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오!" 

이미 몇 년전에 치러져야 했을 주상전하의  가례를 종실의 큰 어른인 진성대군이  늦추었던 

이유가 드러

났다. 결국은 어린 소혜 아기씨가 자라기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마냥 고집을 피우는  김익현

이 좀 답답하

다 하는 표정이었다. 

"자산도 아시다시피 상감께서는 한없이 외로운 분이시오. 영명하고 강하나 고독한 분이시라. 

내전의 안

주인이 아니 계시니 외로우신 터로, 주상께서 그 요망한 계집의  품에 미혹을 하신 것이 아

니오? 주상께

서 관례를 치른 네 해 전부터 가례를 치뤄야 한다는 왕대비전의 말씀을 이 대군이 어겨가며 

막은 것은 

오직 그대의 따님이 자라기만을 기다린 것이라. 이런 정도면 자산께서 이 대군의 체면도 세

워 주어야 하

지 않소?" 

"망극하옵니다, 대군마마. 허나 아시다시피 이 몸이 사십 줄에 들어 겨우 하나  얻은 여식이 

저 것입니다. 

비록 가난한 살림에 호의호식하며 키우지는 못하였으되 반듯하고 어질게 키웠다고는 자부하

는 터입니

다. 불쌍한 것이라 제 어미를 생후 이레만에 잃고 어미 젖 한번 빨지 못한 터로 안쓰러워하

며 키운 아이

라... 대군대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되 그저 아 미신의 생각은 저 아이를 어질고 유복

한 집안의 며

늘아기로 들여보내 일생을 안온하고 마음 편안하게  살게 하고 싶은 것이 아비의  심정입니

다. 허나 만약 

저 아이가 궐에 들어가게 되면 저 아이 뒷날이 보이지 않으니 아비된 심정으로 어찌 흔쾌하

리이까?" 

"어찌 뒷날을 감히 예측하여 말씀하시오? 대조전의 주인이십니다. 주상의 정궁이예요." 

"상감께서는 이미 달 그림자에 그 영명함이 가리워져 한 시절을 방탕하신 터라 촌것인 미신

도 다 헤아리

고 있사옵니다. 저 것이 내전에 들어간다 하여도 평생 그림자 팔자이며 지아비 소박은 맡아

놓은 것일 터

인데 그를 알고서야 어찌 이 아비가 그곳으로 보낼 것인지요? 하물며 우리 딸아이가 중전마

마가 되신다 

하여도 파랑이 많고 풍파가 잦은 곳이 궐 안의 일입니다. 그 팔자가 어찌 비참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아닙나까? 중궁전에 오른 처자들이 종종 권력다툼에 희생되어 자리를 잃고 목이 잘리

는 일도 다 

반사였지요. 거두어 주옵소서! 절대로 우리 딸아이는 간택에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도무지 씨도 먹히지 않을 만큼 김익현의 고집은 완강하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 것은 

아니다 하는 

강직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진성대군은 끌끌 혀를 찬다. 

"자산은 어찌 이리 이 대군을 민망하게 하시오? 내가 따님을 중궁전에 올리자 하는 것을 마

치 지옥에 내

려보내자 하는 것처럼 여기시니 말이오." 

"......구중심처 궐 안의 일은 바로 복마전입지요." 

"허어, 듣기 거북하구려. 이제 그만 하시오. 자산이 고집을  부린다 하여도 이 대군 역시 고

집을 꺾지 않

을 것이니 말이오. 우리 주상께서 요망한 계집의 치마폭에 미혹하사 아직은 그 총명함이 가

리워서 이 모

양 이 꼴이라 하여도 말이외다. 워낙에 천성이 명민하고 반듯하신  분인 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달 그림자가 아무리 기운이 강하다 하여도 해가 뜨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이제 이 

집의 아기가 

안해로 들어오시면 월성궁 달 그림자쯤이야 대수겠소?" 

진성대군이 도포 소매자락 안에서 굳게 봉(封)을  한 서찰 하나를 꺼내었다. 말없이 봉투를 

주인 앞으로 

밀어 놓았다. 김익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 서간과 진성대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대가 도승지였으니 뉘보다 잘 알 것이 아니오? 바로 선대왕마마  어필(御筆)이오. 승하하

기 전에 직접 

쇠약한 몸을 이끌고 쓰신 어찰이오. 필시 훗날 자산이 깐깐하여 부귀를 바라지 않아 고집을 

피울 것인즉 

반드시 그에게 보여라 하신 것이니... 자산, 형님마마께서 저승서도 바라시는 일이오. 그대가 

아니 된다 

고집 부려도 따님은 중전마마가 되실 게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오! 아니 내가 반드시 그

렇게 만들 것

이오. 허니 헛된 고집은 이제 그만하시오." 

"대군대감!" 

"그대의 따님께서는 오직 금상의 연분으로 탄생하신 분이오. 하늘이 점지하사  내신 분이오. 

이 대군은 

그리 알고 있소이다. 운명이 정한 팔자이외다. 이만 갈 것이니 밤서 잘 생각하여 보시오. 열

흘 후, 이월 

스무 나흗날로 초간택의 날이 정하여졌소이다. 그날 내자와 함께 가마를 보낼 것이오.  그때

는 다시 번거

롭게 사양하사 이 대군을 힘들게 하지 마시구려." 

훌훌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 진성대군은 떠나갔다. 김익현은 상위에 놓인 서찰을 그저 두

려운 듯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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