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겨우 한 마디 하시는데 그 얼굴이 굳었다. 점잖으시고 허튼 말씀 한 마디 아니하시
는 분이 굳이
사랑채로 소저를 부른 이유치고는 싱거울 정도로 어이없었다. 그런 일일 것이면 복순 아비
에게 전하여
도 될 것을 왜 소저를 굳이 사랑채로 부르신 것이냐? 무슨 내막이 분명 있는 것이다. 그러
나 아무 것도
짐작하지 못한 터라 소혜아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가난한 집안의 찬이 귀빈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성껏 준비를 할 것입니다. 허
면 소녀가 나
가 보아도 되겠는지요?"
나가라 하는 대답대신 진성대군께서 다시금 아기씨를 일별하였다. 뜻밖의 하문(下問)을 하셨
다.
"헛허허. 실로 아기가 총명하고 알뜰하구나. 주변 사람들이 다투어 며느리로 탐을 낼만 한
것이야. 그래,
듣자하니 심히 영리하여 내전께나 족히 읽었다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소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조아렸다.
"망극하옵니다. 어린 촌 것 계집아이가 무엇을 알아 글줄을 익혔겠습니까? 그저 아버님 어
깨너머로 먹
물 갈아드리면서 겨우 천자문이나 떼었나이다."
"영리하고 어질며 알뜰한 줄로만 여겼더니 실로 겸손하고 사리분별까지 밝도다. 나가보거라.
안채의 소
저를 어리다 하여 외인(外人)이 뵙자함도 결례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대군께서 어린 소저에게 대하시는 품이 심히 정중하고 예절바르시었다. 지
금껏 드나
들기 오래이시되 단 한번도 저를 보자 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 이리하실까?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돌아 나왔다. 그 날의 생각을 떠올리며 소혜아씨는 다시금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 날 진성대군마마께서 참으로 이상하다 싶었지만... 대체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
었기에 아버
님께서 이후로 그리토록 심란해 하신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아씨, 아씨!! 저기 주막 앞에 붙은 방(訪) 말이어유. 아, 글씨유, 상감마마께서 혼인을 한다
고 간택령이
내렸다는 방이래유."
다시 달려온 복순이의 숨이 찼다. 마치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이 소리치는 말에 소녀는
미미한 웃음
만 머금었다.
"그래? 상감마마께서 보령이 높아지시니 비로소 대례를 치르시는 모양이지."
금상(今上)의 보령은 이제 약관 열 아홉. 열한 살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시어 지금껏 홀몸
이셨는데 드
디어 안곁을 맞이하시나 보다. 한시 바삐 주상께서 대례를 치르시고 내전이 안정이 되어야
만 월성궁의
미혹에서 벗어나실 것인데... 부친께서 한숨처럼 근심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은 터였다.
"아씨, 중전마마는 어떤 처자가 되시는 것인가유? 천상 선녀 같은 분만 오를 것이구먼요. 인
세의 호사광
영이라 홀로 다 누릴 것이 아닙니까요? 나도 양반 댁 규수로 태어나 곱게 단장하여 궐에 들
어가 상감마
마 눈에 들것이면 중전마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인디..."
"사직의 안주인인 중전마마는 아무 처자나 된다 하더냐? 집안도 권문세가여야 하며 그 덕성
이며 인품이
하늘같이 높아야 중전마마가 되는 것이지. 아버님이 이르시기 중전마마가 되실 처자는 하늘
에 미리 점
지하여 태어나게 한다 하였다. 너도 후생에는 권문세가 미인으로 태어나 간택에 한 번 올라
가려무나. 그
때에 나를 만나면 나를 잘 보아주어야 한다?"
저가 마치 중전마마가 된 양 공상의 나래를 펴는 복순이를 향해 소저는 미미하게 웃음을 머
금었다. 쓸
데 없는 말을 한다 타박하지 않고 곱게 말을 받아주었다.
아씨가 번동 유형원의 집에 도착한 것은 막 오정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이미 아씨가 올 줄
을 알고 있었
던지 청지기는 바로 아씨를 안방으로 안내하였다. 유형원의 내자인 정씨가 다정스레 아씨를
맞이하였
다.
"자산 대감께서 병이 깊으시다 하여 우리 집 나으리께서도 이 며칠 근심이 크셨느니라. 아
기가 근심이
많았을 것이야. 쯧쯧쯧.. 어린 이 나이에 그 살림을 혼자서 도맡아 한다고 얼마나 힘이 들것
이냐?"
"소녀가 힘이 든 것은 없사오나, 아버님께서 항시 그리 병약하시기만 하니 그저 근심입니다.
이런 때에
두곡 아저씨께서 늘상 집안 일을 보아주시니 저가 큰 은혜는 입고 삽니다만 갚을 길이 없어
면구하나이
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대답하는 아기씨의 목소리가 나직하나 예절바르다. 정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
며 어질게 작은 손을 잡아 어루만진다.
"우리 집 나으리께서 자산어른과 남이더냐? 나도 그러하거니와 우리 집 나으리께서도 한번
도 아기의 일
을 귀찮다 어렵다 여긴 적이 없느니라. 쯧쯧쯧... 자산어른께서 부대 기운을 차리시어야 너의
근심이 없
을 것인데... 어린 사람이 어찌 이리 의젓할꼬?"
그때였다.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유형원의 첫째 아들 재응이다. 열일곱. 착하고
소박하게
보이는 소년. 오래 전부터 소혜 아씨와 형제처럼 지냈으되 장성하니 은근히 양가에서 혼사
를 떠보는 바
로 그 청년이다. 말은 아니 하였으되 정씨가 유난히 소혜아씨에게 다정한 것도 그런 내밀한
언약이 있었
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전부터 알아왔고 친밀하게 보아온 사이라도 이미 장성하니 서로 내외하는 처지
이다. 아씨
와 재응소년은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안부만 물었다. 두 소년 소녀의 얼굴이 벌갰다. 고작 두
어 마디로 그
만, 금세 아기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이 어두워지는 고로 소녀는 이만 가보겠나이다. 병약하신 아버님께서 홀로 계신 터이니
소녀가 마음
이 그리하여 오래도록 놀지 못하겠습니다."
"그리 하려무나. 잡아두고 오래도록 이야기도 하고 저녁밥도 먹여 보내련만 네 마음이 편안
치 않은 듯
하여 그냥 가라하여야겠다. 언제고 다시 한 번 놀러 오려무나. 할머니께서도 자주 너를 보고
싶어하신
다. 헌데 바람이 차서 어찌하지? 가마를 내어 줄 것이니 타고 가련?"
"아니옵니다. 되었습니다. 걸어가면 금새인데 저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수고하시는 것은 싫
사옵니다."
"허면은 첫째로 하여금 데려다 주어라 할 것이다. 아기가 밤길을 가는 것이 내가 마땅치 않
아서 그러하
느니라."
싫다 사양하였으되 정씨는 강권하였다.. 지금껏 허물없이 지낸 오라비 같은 사이이다. 밤길
을 걸어가는
것을 아버님께서도 근심하려니 싶었다. 몇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소혜 아씨는 오라버님
께 폐를 끼
치옵니다 하면서 얼굴을 붉히었다. 재응 소년은 의젓하게 말을 받았다.
"폐라 말하지 마시오. 스승님께서 병중이라 하는데 내가 먼저 찾아뵈어야 도리가 아니겠습
니까? 허면은
일어나십시다."
소혜 아기씨는 곱게 절을 하고는 재응 소년을 따라 문을 나섰다. 정씨는 흐뭇한 미소와 함
께 혼잣말을
하였다.
"계산골 저 아기가 날이 갈수록 숙성하여지니 훗날 정작 여인으로 필 것이면 두고두고 곱다
소리를 들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눈여겨 점찍은 아이였다. 알뜰하고 심덕이 비단결 같이 고우며 게다가 그 바
느질 솜씨 조
차 신기였다. 어디를 보아도 미운데 하나 없이 탐이 나는 며느리감이었다.
"영리하고 사리분별 한 번 밝으니 저 아기를 내자로 삼을 것이면 평생 그 사내는 흥복일 것
이야. 홋호
호... 그러고 보면 우리 재응이의 처복은 실로 큰 것이다. 사랑에서 의논들을 하시겠지만 내
년쯤에는 초
례를 치뤄서 아기를 우리 집안으로 들여야지. 말은 아니 하여도 우리 재응이도 은근히 아기
를 바라보는
눈빛이 나날이 달라지는 고로 허기는 서로 오가며 보아두기 이미 오래라... 저 아기 태 중서
난 아기들은
필시 영리한 어미 닮아 영명하기 일등일 것이라, 후에 정승판서인들 되지 못할 것이냐?"
복순이는 정씨 마님이 이것저것 챙겨준 집안 살림거리를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었다. 소
혜아씨는 부
친의 약첩을 가슴에 안았다. 소혜아씨 일행이 집을 나서 궁로통을 지나 막 계산골 쪽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든 참이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남문 쪽에서 북문 쪽 대로를 거침없이 달려오는 일단
의 기마행렬
이 있었다. 약 오십여 필의 늠름한 마두가 한꺼번에 달려오는 광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길에 나다
니는 인마는 아랑곳없이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 말발굽에 채이면 그 자리에서 즉사라. 길을
가던 사람들
이 깜짝 놀라 몸을 피하기 급급하였다. 재응 도련님도 복순이도 소혜 아씨도 너무 놀라 다
른 사람들처럼
급히 몸을 돌이켜 길섶으로 몸을 피하였다.
무엄하기 이를 데 없는 행렬의 선두는 호피 사냥복을 입을 늠름한 청년이었다. 청년이라기
보다는 아직
은 어린 티가 덜 가신 소년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제 턱에 돋는 수염이 거뭇하였다. 불이
담긴 호목
(虎目)에 칼 같이 뻗친 검미가 훤칠한 그는 이마에 비단 건을 두르고 활통을 등에 맸다. 몸
을 꼿꼿이 세
우고 티 한 점 없는 설총마를 몰아 질풍처럼 달려온다.
뒤를 따르는 이들도 모두 활통을 매고 칼들은 비켜찬 늠름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탄 말들
은 하나같이
시정서 보기 힘든 한혈마들이었다. 필시 권세 당당한 집 자제의 사냥놀음길이 분명하였다.
"에구머니나!! "
무슨 심술일까? 앞장서 말을 달려오던 청년은 호호탕탕하게 말을 내몰던 속력을 조금도 줄
이지 않았다.
짓궂게도 말고삐를 당겨 안전에서 걸치적거리는 재응의 머리를 훌쩍 타고 넘어버렸다. 신기
(神技)에 가
까운 마술(馬術)솜씨였다.
"에구머니, 오라버님!"
소스라치게 놀라 소혜 아씨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재응을 부축하였다. 껄껄거리는 짓
궂은 웃음을
날리며 그 청년이 힐끗 그들을 돌아보았다. 분노의 불을 뿜는 아씨와 그 청년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입
술꼬리를 히죽 치켜올리며 그가 씩 웃었다. 금세 그가 탄 말은 대로를 달려가 버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 말 등의 어느 누구도 나동그라진 재응과 그를 부축하는 소혜 아씨를 눈여겨
보아주는 이가
없었다. 호기심이 돋은 터이니 입을 헤 벌리고 그 말들을 바라보던 복순이가 비명을 지른
것은 그때였
다. 말들이 달려가면서 작은 돌들을 튀긴 것이라 그 돌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무에 저런 망할 놈들이 다 있디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저들이 전세나 낸 것이냐?
거리낌 하나
없이 말을 타고 달려가다니. 잘못하였으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여반장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