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7화
그 순간 시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해령궁주에게 당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분명 로데릭에게 당한 상처 탓에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해서, 녀석의 공격이 가슴에 적중하고.
그대로 심장이 꿰뚫렸다.
‘…….’
그래. 생각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에르제의 말로는 자신은 빈사 상태로 쓰러져 있는 것을 가주가 구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헬레네의 지시로 최상위의 치유 마법을 퍼부어 치료했다고.
하지만 심장이 뚫릴 정도의 부상을 당했다면, 애초에 가주가 구해낼 때까지 몸이 버텼을 리가 없었다.
가주가 구하고 치유마법을 퍼붓고.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즉사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라비가…….”
시안이 아연하게 말끝을 흐렸다.
라비가 자기를 대신해 희생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상황은 이전과 아주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래도 해령궁주를 처치하면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놈을 처치하든 말든 라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소멸했다.
-하아. 이대로 조금만 세월이 지난다면 훌륭히 내 뒤를 이어줄 후계라 생각했건만,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줄이야.
네메시스의 사념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한이 가득한 짙은 한숨이었다.
그녀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시안의 몸속이 비춰 보이고 있었다.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 중앙에 새까만 라비린스의 각인이 박혀 있는.
본디 시안의 손목에 있던 각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심장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인간의 아이야. 라비린스를 잃었다고 하여 설마하니 해령궁주를 내버려둘 생각은 아닐 테지?
시안이 고개를 들어 네메시스의 사념을 바라보았다.
거칠고 황폐하지만, 그럼에도 빛이 사라지진 않은 그런 눈으로.
“당연히 죽일 생각이다.”
아무리 망연자실하였다 하여 해령궁주를 두고 떠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놈을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고, 심지어 이젠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라비가 소멸한 것에 대한 복수.
시안의 눈을 보곤, 네메시스의 사념이 살짝 입을 삐죽이며 얘기했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합격점은 되는 데다 그 아이가 선택한 인간이니…….
“뭐?”
-너를 내 정식 후계자로 삼으마.
그 직후 네메시스의 사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옷이 검어지고 피부가 검어지고 이목구비가 검어진다.
머지않아 완전히 새까맣게 변한 그것은 밤안개처럼 퍼져 나가더니, 시안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시안이 당황했지만 네메시스의 사념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힘을 쓰는 방법이야 굳이 얘기해 주지 않아도 잘 알 테지.
모든 힘을 시안에게 넘기고, 마지막까지 빼앗기지 않았던 힘의 근원마저 넘어온다.
그 밤안개는 점차 시안의 중심으로, 라비의 각인이 새겨진 심장을 중심으로 뭉쳐갔다.
“갑자기 무슨……!”
시안의 심장이 그 힘을 꿀꺽꿀꺽 삼켜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속에서 그 심장을, 라비의 각인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네메시스의 사념이 쓴웃음을 흘렸다.
-라비린스의 몫까지 잘해보거라.
“…….”
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라비의 이름을 꺼내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였다.
이윽고 네메시스의 사념은 소멸하고, 그녀의 근원만이 남아 시안에게 천천히 빨려들고 있었다.
시안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네메시스의 근원 덕분인지 아니면 자각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심장의 각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었구나, 라비.’
명상을 통해 네메시스의 근원을 빨아들이며 그가 옛일을 회상했다.
처음 만났던 때. 깊은 절벽 아래 절망하고 있던 그 아이를 데리고 올랐을 때.
처음으로 빛을 보고 그렁거리던 라비의 모습.
빛을 사랑한 그림자, 흑정령 라비린스.
‘내가 그 빛이라는 거냐?’
눈을 감은 채,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빛이라니.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그냥 스스로의 이름을 찾고 싶어 방황할 뿐인 한 사람에 불과한데.
이윽고 시안이 눈을 떴다.
12번의 심호흡을 거치며 그가 몸속의 기운을 점차 안정시켜갔다.
검은 안광을 흩뿌리며 일어선 그가, 해령궁주의 몸속에 손을 박았다.
‘네가 정말로 나를 빛이라고 생각한다면.’
네메시스의 힘을 쓰는 방법. 사념이 말했던 대로 설명 따윈 필요 없었다.
이미 그의 몸에 본능처럼 새겨져 있었고, 더욱이 라비와 함께해온 세월이 있었으니.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겠지.’
해령궁주에게 박은 그의 팔이 검은 그림자로 뒤덮여왔다. 동시에 그것들이 해령궁주의 몸속에 강렬한 인력을 만들었다.
“돌아와라. 내가 너희의 새로운 주인이다.”
해령궁주가 네메시스를 죽이고 빼앗았던, 그 힘이 다시금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 * *
짙게 피어오른 핏빛 안개 속. 해령궁주는 세 명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꺄악!”
안개에서 튀어나온 수백의 가시가 에르제를 스치고 지나간다.
간신히 갇히는 것만은 피했으나 가시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추적했다.
화륵!
그 가시를 피어오른 불꽃이 모조리 태워버렸다.
“괜찮으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염노가 에르제를 부축하며 물었다. 에르제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그 시각.
-서걱!
베르페드는 해령궁주의 본체에 검을 긋고 있었다.
-얕구나! 얄팍하기 짝이 없어! 그게 하이마스터란 자의 검이더냐!
그러나 검왕이라 불리는 그의 검조차 해령궁주에겐 제대로 먹혀들고 있지 않았다.
얼마간의 부상을 입히는 것은 가능했으나 좀처럼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크군.’
일단 크기부터가 너무 크다. 때문에 어지간한 오러로는 표면의 피부나 기껏해야 근육을 조금 상하게 만들고 그칠 뿐이었다.
뼈와 내장을 베어낼 정도의 일격을 위해선 정신을 집중하여 오러를 모아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고 있으면 해령궁주가 귀신같이 눈치채고 집중을 방해해왔다.
“가주님!”
콰과과과광!
그때 해령궁주의 몸을 따라 폭발의 연쇄가 이어졌다. 그 일순간 해령궁주가 꿈틀거리며 그의 의식이 염노에게 쏠렸다.
베르페드가 눈을 번뜩였다.
찰나의 순간. 그러나 경지에 이른 이들에겐 영원과도 같은.
그 찰나의 순간에 베르페드가 오러를 집중했다. 그의 검 너머로 끝없이 오러가 넘쳐흘렀다.
그 검이 해령궁주의 옆구리를 베었다.
-크아아아아!
내장까지 곤죽을 만들어버리려는 기세의 오러에 해령궁주가 처음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이 번뜩였다. 분명 큰 부상은 맞지만, 그렇다고 결정타가 될 정도도 아니다.
-이까짓……!
그래서 반격하려던 순간.
-……!
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갑자기 몸의 상태가 이상했다. 굳건한 그의 정신이 수많은 경고를 울렸다.
“……뭐지?”
해령궁주의 이상 사태는 그와 대치 중이던 세 명에게도 곧바로 전해졌다.
모를 수가 없다. 가만히 멈춘 것은 물론이고, 그 거대한 몸이 울긋불긋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내.
-우웨에엑!
해령궁주의 입에서, 상처에서, 그리고 억지로 피부를 뚫고선.
수많은 악마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해령궁주가 새로이 병력을 보충하는 것인가 하고 베르페드가 경계했지만, 그렇다기엔 상태가 이상했다.
악마들은 마치 해령궁주의 몸속을 헤집듯이 망치며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해령궁주의 거대한 산과 같던 몸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지며 걸레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쿠에에에엑!
그렇게 오열하는 해령궁주의 앞에.
“그간 많이도 처먹었구나.”
시안이 나타났다.
몸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해령궁주가 눈을 떠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숨길 수 없는 증오와 살의가 시안에게 고스란히 쏘아졌다.
-시안, 시안 아그리드!
“……내 이름은 시안이 아니다.”
시안이 그리 얘기했지만 해령궁주는 시안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자신이 삼켰다고 생각한 시안이 살아서 눈앞에 나타났고, 그리고.
-네놈이…… 네놈이 내 포식의 힘을……!
이 녀석이 자신에게서, 네메시스의 권능을 빼앗아 갔다는 것.
오열하는 해령궁주를 바라보며 시안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핏빛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시안의 시야를 가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안이 검을 내려쳤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잃었다고 생각한 검령. 만년빙정.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프시케의 힘이 담긴 낙뢰가 해령궁주에게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폭발이 터져 나갔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일격이다.
그러나.
‘손맛이 없어.’
시안이 살짝 찡그렸다.
분명 피하지 못할 타이밍에 피할 수 없을 일격을 내려쳤다. 그럼에도 손맛이 없다는 것은…….
“도망갔군.”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핏빛 안개가 걷혀갔고,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던 하늘을 유영하는 고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강림을 풀고 지옥계로 도망갔나?’
놈이 갔을 곳이야 뻔했다. 다시 지옥계로 되돌아갔으리라.
“시안!”
아래에서 에르제가 걱정스레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그곳에는 전투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베르페드도, 그리고 염노의 모습도 있었다.
시안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얘기했다.
“마무리하고 오지.”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며 전혀 다른 차원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옥계. 해령궁주가 도망간 세계.
녀석이 남긴 흔적을 따라 시안이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커헉!
지옥계 해령궁. 오랜 시간 비어 있던 옥좌에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건 영광스러운 귀환 같은 게 아니었다.
한없이 추하고 비참한, 오로지 상처뿐인 귀환.
-시안……! 시안 그놈이 내 힘을!
본신의 치유를 위해 잠시 아이작 황자의 몸으로 돌아온 해령궁주가 옥좌를 거칠게 발로 찼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으며 이빨은 부서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갈리고 있었다.
네메시스의 힘.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공을 들여서 그년을 죽이고 빼앗았는데, 그걸 가로채?
-……용서 못 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지금은 상처를 많이 입게 되었다만, 이 상처만 다 나아봐라.
당장 인간계로 돌아가 그놈을 찾아 찢어먹어 버리리라.
“추레하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령궁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마룡왕…… 네놈이 무슨 일로?
그곳에 있는 것은 눈에 익은 노인이었다. 단 육체가 없는 영체 상태의.
눈을 찌푸리는 해령궁주를 보며 마룡왕이 피식 웃었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뭐라?
자신이 상처 입은 모습을 비웃으러 왔다는 말인가? 해령궁주의 눈에 순간 불이 튀었다.
-이 내가 구경거리란 말이더냐! 아무리 네놈이 이 지옥의 원로라 하여도 그 이상의 무례는 보아 넘길 수 없다! 아직도 네놈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옥에선 힘이 곧 법이며 가진바 격이 곧 서열.
마룡왕은 해령궁주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몸이었지만 해령궁주는 이미 옛날에 마룡왕을 뛰어넘었다는 자신이 있었다.
벌건 눈으로 그리 얘기하는 해령궁주를 보며 마룡왕이 웃었다.
“딱히 네놈 몰골이 재밌다는 게 아니다. 그 왜,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잖나?”
그때, 허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느껴지는 기운에 해령궁주가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죄인의 처형식만큼 재밌는 구경거리가 없다고.”
이내 일렁이는 허공에서 한 사내의 팔뚝이 나타나 해령궁주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직후 보인 사내의 모습에 해령궁주가 저도 모르게 이를 덜덜 떨었다.
-시, 시안 아그리드…….
시안이, 해령궁주의 목을 움켜쥔 손에 더욱 꽈악 힘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