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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5화 (18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5화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아침.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기를 손질하고 컨디션을 체크한다. 간단하지만 든든히 아침을 먹고 결전의 열의를 다진다.

주둔지는 지금 전쟁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야밤에 쳐들어오진 않았군요.”

안개에 뒤덮인 루스카야를 보며 베르페드가 황녀에게 얘기했다.

저 안개는 물론 그 아래에 포진해 있는 수많은 마물들.

이쪽이 취약한 밤중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그저 밤새 꿈틀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후작도 준비하게. 나도 몸을 좀 달궈놔야겠군.”

황녀가 허공에 불꽃을 피어보였다.

그녀 역시 그저 지위만 높을 뿐인 유약한 황녀가 아니다. 화염마탑에서 정식으로 수학하고 마탑주의 인정을 받은 마법사.

이윽고 모든 이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돌겨어어어억-!”

황도 탈환을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황도 인근에 빼곡히 포진하고 있는 마물들을 향해 황군이 달려들었다.

궁병들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고 기병부대가 갉아먹듯이 마물들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반격하는 마물들과 보병들이 기다란 전선을 형성했다.

“악마다!”

“그놈은 기사님한테 맡기고 도망가!”

마물들 곳곳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악마들은 기사들이 달려들어 막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들은 고위 악마는 아니었다.

스스로 계약자를 찾아 타락시켜 대륙에 강림할 정도가 아닌, 그저 해령궁주의 밑에서 기고 있다가 명령을 듣고 나왔을 뿐인 저급의 악마.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물 따위보단 훨씬 강력하여 몇 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달라붙어야 했지만, 그래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황군의 뒤에선 황녀, 그리고 마법사 부대가 포진하여 화력을 보충했다.

그들이 커다란 마법 하나를 날릴 때마다 마물 무리 사이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그렇게 뚫어봐야 순식간에 다시 메울 정도로 마물의 숫자가 많긴 했지만.

“가자.”

“응.”

그렇게 전투가 이어지고, 시안은 한발 늦게 에르제와 함께 출발했다.

두 사람은 동쪽 방향으로 전장을 크게 우회했다. 동시에 마물 무리 중에 가장 취약해 보이는 부분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파고든다.

둘의 임무는 단순히 마물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아닌, 마물을 뚫고 나가 황도에 웅크리고 있는 해령궁주를 처치하는 일이었다.

일차 목적지는 황도의 동문.

-서걱!

“캬아아아아!”

그의 검이 한 차례 번뜩일 때마다 몇 개나 되는 마물의 수급이 떨어진다.

흩날리는 피를 보며 흥분한 다른 마물들이 시안을 찢어발기기 위해 달려들지만 누구도 시안을 멈출 수 없었다.

피와 육편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그 사이로 시안이 저 멀리 반대편 전장을 힐긋 보았다.

그곳에서 역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불기둥이 터져 나가는 중이었다.

시안과 에르제가 향하고 있는 황도의 동문과는 반대로, 서문 쪽을 향하고 있는 베르페드와 염노가 있는 곳이다.

현재 황군에서 가장 큰 전력은 베르페드와 시안 두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을 갈라 양쪽에서 해령궁주를 협공하겠다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마물을 돌파하는 것뿐이라면 전력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낫겠지만, 어차피 두 사람이 이런 마물들에게 발이 묶일 이들도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이대로 돌입한다.’

베르페드 쪽을 잠깐 바라본 시안이 다시금 스스로의 전장에 집중했다.

그의 손에는 흑검을 비롯한 그 어떤 검령도 없었지만, 빈 정령의 검 한 자루로 그는 충분히 마물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가끔가다 그의 사각을 노려 접근하는 마물들도 있었지만, 그런 놈들은 에르제가 귀신같이 모두 잡아내었다.

“시안, 상처는 괜찮아?”

황도의 동문이 슬슬 보이게 되었을 때쯤, 에르제가 시안에게 물었다.

지금 생긴 상처가 아니라, 일전에 있었던 중상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응. 문제없어.”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로데릭과 해령궁주에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큰 상처를 입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듣기로 기절한 사이 치유마법을 퍼부었다던데 그 효과가 있는 모양.

이윽고 두 사람이 황도의 동문 앞에 도착했다.

도시에 가까워졌기에 시야를 가리는 안개는 결코 자연현상으론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바로 코앞의 시야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묘하게 숨쉬기도 불편했다.

마치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폐부에 압박이 오고 있었고, 팔다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령궁주가 깔아놓은 장소.’

전쟁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상대가 준비한 전장.

이미 그것은 전장이 아닌, 함정이라 불러 마땅한 장소였다.

그러나 돌아갈 순 없었다.

‘라비.’

자신 대신 해령궁주에게 몸을 던진 라비의 행방. 그리고 헥토르의 행방까지.

물러서기엔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때.

“흥! 어딜 가려고 하느냐!”

콰앙!

둘의 앞에 거대한 둔기가 떨어져 내렸다.

단숨에 둘 모두를 짓이겨버릴 듯이 떨어져 내린 둔기를, 시안과 에르제가 잠시 물러나 피했다.

시안이 문 쪽을 올려다보였다. 안개의 탓에 눈으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정도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날카로이 벼려진 시안의 감각은 시각 하나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바짝 서 있었다.

해머를 회수하여 어깨에 걸치는 거대한 악마. 황도의 동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그러나 시안이 놀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너, 헥토르냐?”

그 목소리가 익히 들어본 것이었기 때문에.

해령궁주에게 포식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물론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지금 평소와 같은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커다란, 거의 성문과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얼굴.

오우거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어쩌면 그냥 목소리가 매우 닮은 다른 악마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헛소리 마라! 이 몸의 이름은 뇌력천주다! 그딴 나약해 보이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녀석의 이마에 난 뿔에서 파지직 벼락이 튄다.

시안이 안도했다. 비슷한 다른 악마가 아니라 본인이 맞는 것 같다.

단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이 안개 속에서도 흉측한 빛을 흩뿌리는 시뻘건 안광에선 제대로 된 이성을 찾아볼 수 없었고, 몸 곳곳에도 굵은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해령궁주님께 다가가는 녀석은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뭔가 당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단순히 목줄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닌, 정신적으로 세뇌를 당했다거나 그런 듯한.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살아 있음에 안도하는 숨이 절반, 그리고 남은 절반은 한심함이 느껴지는 숨이었다.

그야 납득은 간다. 해령궁주의 손에 잡혔으니 녀석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지.

탓!

시안이 땅을 박차 뛰어올랐다.

“그냥 자고 있어라.”

이 모습을 보니 어쩌면 본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 마당에 세뇌를 풀겠다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을 찾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그냥 재우는 것이 최선이다.

“무슨…… 뭐, 뭣!?”

빠악!

시안이 놈의 턱을 차고는, 훤히 드러난 명치에 칼등을 갈겼다.

“커헉!”

헥토르, 아니, 뇌력천주의 눈이 돌아가며 입에 게거품이 물렸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놈의 거구가 쓰러졌다.

“가자.”

“으, 응.”

시안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닫혀있는 동문을 베어버리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에르제가 잠시 쓰러진 뇌력천주를 보았지만, 이내 시안의 뒤를 따라 황도에 입성했다.

* * *

성문 안쪽, 황도 내부의 안개는 바깥보다도 한층 짙었다.

바깥도 이미 기이할 정도로 짙은 안개였으나 이 안쪽은 느껴지는 결이 달랐다.

그냥 안개라기보단,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부에 들어온 듯한 불쾌감.

본디 새벽안개라 하면 청량감이 느껴지게 마련이지만 이 안개는 끈적거리고 불쾌한 느낌밖에 없었다.

‘백화가 있었다면 다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 하얀 불꽃의 검령이 있었다면 불쾌한 안개 정도야 날려버리며 나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에겐 검령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빈 정령의 검, 정령 없이는 그저 철검밖에 되지 않는 그 검뿐.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갈 거야?”

“당연히 거기밖에 없지. 황궁.”

에르제의 물음에 시안이 대답했다.

해령궁주가 있을 만한 곳이라곤 황궁밖에 없다. 혹시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우선은 황궁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 맞았다.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이 안개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물과 악마들이 득시글대던 황도 바깥과는 달리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의 기운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

안개는 도시의 중심부로 향할수록 더욱 밀도가 커져갔다.

그러다 이내.

“저건……?”

황궁이 보여 왔다. 그곳에 보이는 풍경에 시안과 에르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토록 웅장했던 황궁이 안개로 이루어진 구체와 같은 것에 덮어 씌워져 있었다.

이 근방에 퍼져 있는 안개와는 명백히 다른, 물리력까지 가지고 있는 안개의 장벽.

그 앞에는 시안과 에르제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한 두 사람이 있었다.

“왔군.”

서쪽 문으로 도시로 침투했던 베르페드와 염노.

두 사람은 황궁을 둘러싼 안개의 장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뭡니까 이게?”

시안이 베르페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단순명료하게 대답했다.

“몰라.”

그들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초에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마법에 조예가 깊은 염노라면 무언가 눈치챌 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도 고개를 저었다.

해령궁주의 힘은 이 세상의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옥계의 힘이었기에 자신이라고 해도 알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캉!

베르페드가 검을 들어 베어보았지만 안개의 장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염노가 불을 질러보기도 하고 에르제와 시안 역시 오러를 일으키면서까지 칼질을 해보았지만 장벽엔 금 하나 나지 않았다.

시안이 잠시 물러서서 황궁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폈다.

먹먹한 안개의 구체로 둘러싸인 황궁.

그러나 완전한 구체는 아니었고 위쪽의 높이가 조금 더 높은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의 알과 같은.

‘알……?’

그런 생각을 하니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황군이 도시 앞에 뻔하게 주둔지를 차리는데도 습격하지 않았던 이유. 절호의 기회인 밤에도 그저 황도에 웅크리고만 있었던 이유.

그게 이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때.

-두근.

시안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몸을 감싸는 강렬한 위화감. 그 위화감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쩌적, 쩌저적-!

황궁을 둘러싼 안개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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