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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3화 (18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3화

다시 보니 해령궁주의 몸은 더 이상 아이작 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입가에 묻어 있는 섬뜩한 핏자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드러난 피부가 푸른 결정과 같은 것으로 조금씩 덮이며, 지금에 와선 거의 몸 절반이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육체의 한계를 점점 높여가는 건가.’

인간의 몸에 강림한 악마는, 당연하지만 본래의 제 실력을 낼 수가 없다.

지옥계에 있는 본래의 육체보다 인간의 육체가 훨씬 더 약하기 때문에.

별다른 단련도 되어 있지 않은 아이작 황자의 몸보다 지옥계에 있을 본신이 강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육체의 성능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방법은.

‘악마들을 먹어서.’

마치 라비가 쓰러뜨린 악마의 기운을 빨아들였던 것처럼, 녀석 역시 악마들을 포식하여 육체의 한계를 높이고 있다.

놈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 주변을 가득 메우던 악마들 대다수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점.

그리고 헥토르가 사라진 것 역시 그 추측을 뒷받침했다.

아마도, 녀석도 라비와 같이 네메시스의 힘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아틀란타의 기억으로 본 바에 따르면, 네메시스란 존재를 죽인 것이 바로 해령궁주이니 그 힘을 뺏어 가졌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라비.’

‘웅-!’

라비를 부르니 전의가 가득한 든든한 대답이 들려온다.

녀석이 사용하고 있는 네메시스의 힘은, 본디 라비가 받아야 했던 것.

그렇다면 되찾아와야 한다.

다시는 녀석 같은 삿된 존재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시안이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녀석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육체의 한계가 높아졌다곤 하나 해령궁주는 본질적으로 술사나 마법사와 같은 존재.

그렇다면 대응법도 달라질 건 없다. 계속해서 달라붙으며 틈을 노리는 것.

‘여기!’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붙으니 온몸에 빈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중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을 급소를 향해 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녀석의 몸 주변에 달한 검이, 일순간 느려졌다.

인근의 대기가 일렁이며 검의 속도가 느려진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휘두르는 것처럼.

“흥!”

해령궁주가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팔을 휘둘렀다.

콰앙!

막대한 수량의 물줄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시안의 가슴을 쳐냈다.

시안의 몸이 크게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 정도로 당황할 시안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자세를 잡곤 무사히 낙법을 취했다.

그러나.

‘큭…….’

착지한 시안의 발이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며, 가슴에서 짙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까 로데릭과 싸우며 당한 상처. 본래 같으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다.

그런 상처를 입은 곳에 놈의 일격을 맞았으니 자세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시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수십 개의 물의 폭포가 사선으로 쏘아져 내렸다.

시안이 다급히 검령 백화를 꺼내 들어 허공에 휘둘렀다.

검이 그리는 원을 따라 하얀 불꽃이 파도처럼 피어오르며 시안을 감쌌다.

그 백염의 구체 위에 해령궁주가 쏘아 보낸 수십의 폭포가 부딪쳤다.

쏴아아아아-!

순식간에 대량의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주변이 뿌옇게 뒤덮였다.

아까 해령궁주가 펼쳤던 안개는 이미 걷힌 지 오래였으나, 이곳 별궁만은 다시금 아까와 같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변해버렸다.

그 안에서 시안이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의 예리한 감각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모든 장애물과 적을 판별할 수 있었다.

“소용없다!”

그러나 안개가 통하지 않는 건 해령궁주 역시 마찬가지.

물의 군주인 그가 고작해야 수증기 속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시안이 내지른 검을 가볍게 막아내며 해령궁주가 시안의 가슴팍을 향해 발을 올려 찼다.

탁.

그러나 시안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뒤로 뛰었다.

발이 닿긴 하였으나 충격은 거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시안은 눈을 찌푸리며, 그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상처가 화끈거리며 몸을 불살라 버릴 것처럼 달아올랐다.

‘좋지 않은데.’

도저히 좋은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아까 해령궁주가 아직 아이작 황자의 몸을 그대로 쓰고 있을 때. 그때도 단기간에 결판을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놈은 강제로 육체를 변이시키며 강림의 한계를 끌어올렸고, 반대로 자신은 로데릭과의 전투로 인해 큰 부상을 입은 상태.

지금 당장은 얼추 공방이 오가고는 있으나, 머지않아 균형이 크게 무너질 것은 뻔했다.

‘오래 싸우면 안 돼.’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단 일격에 결판을 내는 것.

그때.

“쏴라!”

“발사해!”

주변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라보니, 황궁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별궁 주변을 감싸며 포위를 한 상태였다.

황궁에 침입한 악마들 때문에 발이 묶여 있던 그들이 드디어 이 별궁까지 도달했던 것.

사방에서 해령궁주를 향해 검기와 마법들이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 버러지들이…….”

그러나 그에 맞서 해령궁주가 한 일은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한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의 공격이 해령궁주를 감싸고 있는 역장에 삼켜져 사라졌다.

깊은 지저에 가라앉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뭣……!”

“당황하지 마라! 계속 공격해!”

당황하는 그들과 크게 독려하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해령궁주에게 있어선 귀찮은 개미 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쯧.”

그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가볍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땅에서 칼날 같은 물줄기가 솟아오르며 포위망을 따라 원을 그렸다.

끄아아악! 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 마법사 중 몇몇은 미리 기운을 감지하고 막아보려 하였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들 중 단 하나도 해령궁주의 공격을 막아낸 이는 없었다.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도록 해라. 내가 완전해지는 모습을.”

해령궁주가 그리 말하며 앞을 보니.

어느새 눈앞에 있던 시안이 사라져 있었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해령궁주가 기사들의 포위망을 무너뜨린 그 한순간.

일순간의 틈에 시안이 땅을 박찼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그의 손엔 프시케의 힘이 담긴 만년빙정이 들려 있었고, 한눈을 판 해령궁주의 머리를 쪼개기 위해 얼음의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나가떨어진 황궁의 기사들. 해령궁주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한 마법사들.

그러나 그들은 해령궁주의 신경을 아주 조금이라도 돌리는 데 성공했고.

시안이 모든 것을 건 일격을 강행하기엔 충분할 정도의 틈이었다.

시안의 모든 기운을 담은 일격이 떨어져 내렸다.

해령궁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몸의 반쪽, 이미 결정화가 모두 진행된 왼쪽의 팔이었다.

카가가가가강!

놈이 손바닥으로 시안의 검을 막으려 하였으나 빙정은 놈의 팔을 깨부수며 파고들었다.

피 같은 건 쏟아지지 않았다. 부서지는 결정의 파편들만 비산하여 사라질 뿐.

‘이걸로 안 되면…….’

손바닥부터 시작해 손목, 팔꿈치, 그리고 어깨.

시안의 검은 막힘없이 파고들어 갔고.

“흥.”

그러나, 모든 것을 갈라버릴 것 같던 검은 놈의 어깻죽지를 파고든 시점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해령궁주의 오른팔. 아직 결정화가 진행되지 않은 아이작 황자의 팔이.

“커헉!”

시안의 심장을 꿰뚫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모든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시안은 반사적으로 검을 꽈악 틀어쥐었다.

라비가 깃든 정령의 검.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이.

“네메시스 그년이 참으로 별것도 아닌 걸 남겼구나.”

멀찍이 들리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안이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눈앞에서 강하게 점멸하는.

사위를 뒤덮는 어둑한 빛무리였다.

* * *

새까만 시야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한 여성이 목소리였다.

-넌 이미 충분한 경험을 얻었다. 혼자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 그를 버리고 떠나가라.

무척이나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것인지 아닌지, 시안은 그것조차 분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가득 찬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어리석기는. 하찮은 정으로 우리의 사명을 내팽개칠 셈이냐?

질책과 타박의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어린 자식을 타이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래…….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멍청한 녀석 같으니…….

잘못을 책망한다기보다는 짙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어째서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안쓰러워하는 듯한.

시안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시안!”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처음 보인 것은 군의 막사와 같이 느껴지는 천막의 천장.

그리고 걱정스레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르제의 얼굴이었다.

“에르제?”

“정신 차렸구나!”

끄응.

시안이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아!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에르제가 걱정스럽게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그 팔에 기댄 채 시안이 찌푸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황군의 막사야.”

처음 느꼈던 인상이 맞았다. 정말로 이곳은 군의 막사였다.

시안이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꽈악 상체를 압박하듯 매여져 있는 붕대. 갈아 입혀져 있는 깨끗한 환자복.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을 잃었을 때의 일은 물론, 쓰러지던 순간의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령궁주에게 당한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아그리드 후작님이 다시 황궁에 갔다가 널 데려오셨어.”

“가주가 나를?”

“응? 어, 어어.”

베르페드를 거침없이 가주라 부르는 시안의 말투에 에르제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상황이 얼추 납득이 갔다.

자신은 해령궁주에게 당해 쓰러졌고, 죽기 직전에 가주가 발견해 구출해낸 것이다.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고 구출을 했다는 사실이 의외이긴 하였으나, 어찌 됐든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쪽에 기대듯 세워져 있는 자신의 검이 있었다.

시안이 그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라비?’

이상했다.

검은 평상시의 흑검의 모습이 아닌,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회색의 검이었다.

라비가 깃들기 전의 빈 정령의 검.

‘라비!’

그가 다급히 라비를 불러보았으나 평소와 같은 활기찬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안의 눈이 떨려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머리는 저절로 돌아가며 앞뒤 상황을 추측해버렸다.

네메시스의 힘을 탐내는 해령궁주. 그 앞에서 쓰러져버린 자신.

그리고 베르페드가 올 때까지 자신이 해령궁주의 손에 마무리되지 않은 것.

‘설마 네가…….’

라비가 스스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런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해령궁주의 손에 죽지 않고 베르페드에게 구해질 수 있던 것이다.

그 대신 라비는, 놈에게 흡수당한 것이고.

시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약한 탓에 벌써 두 명이나 놈에게 당해버렸다.

헥토르. 그리고 라비린스.

“앗! 일어나면 안 된다니까!”

에르제의 걱정스러운 손길을 떼어내곤 시안이 일어섰다.

환자복 위에 외투를 걸치곤, 빈 정령의 검을 허리춤에 패용했다.

할 일이 많았다. 갑자기 웬 군의 막사에서 눈을 떴는지 알아보고, 가주를 만나보고.

‘그리고.’

그리고, 되찾으러 가야 한다.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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