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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2화 (18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2화

대검이 떨어진다. 안 그래도 커다란 로데릭의 검은 그의 오러에 휘감겨 시안의 몸보다도 두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흡사 산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

시안이 검을 들어 로데릭의 대검을 막아냈다.

“큭!”

로데릭의 검이 시안의 검을, 시안 채로 내리눌렀다.

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압력을 받으며 시안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구나!”

로데릭의 눈에 핏기가 올라오며 그가 더욱 힘을 실어 검을 내리눌렀다.

동시에 시안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욱 커지며,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둘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상황은 시안에게 훨씬 불리했다.

지금은 1:1의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캬아악!”

시안의 발이 묶인 것을 보곤 근처의 악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까부터 동포들을 쉼 없이 쓸어버렸던 시안이다. 그 원수를 향해 악마들이 이를 드러내며 쇄도했다.

그러나.

“합!”

로데릭의 일갈이 별궁에 울려 퍼졌다. 강렬한 마력이 담긴 그 함성은 악마들을 모조리 움츠리게 만들었다.

충혈된 그의 눈이 악마들을 쏘아보았다.

“너흰 건드리지 마라.”

황자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용인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그는 악마들의 존재가 탐탁지 않았다.

하물며 그런 놈들이 자신과 결투 중인 상대의 뒤를 친다?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즉 로데릭이 무의식적으로 시안을 자신과 동등한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앙!

그 직후 시안의 검이 로데릭의 검을 흘려냈다.

바닥으로 콰앙! 처박히는 대검을 피해 시안이 옆으로 굴렀다.

로데릭이 악마를 멈추기 위해 잠시 정신력이 분산되었을 때를 노려 검의 압력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더욱이 시안은 그냥 빠져나오지만은 않았다.

옆으로 빠지며 동시에 로데릭의 손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캉!

로데릭이 손목을 비틀어 검의 폼멜로 시안의 검을 쳐냈다.

시안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며 검을 수차례나 휘둘렀다.

‘거리를 너무 벌리면 안 된다.’

로데릭의 대검은 자신의 검보다 훨씬 크다.

거리를 벌리면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최대한 가까이 붙는 게 오히려 유리하다.

캉! 캉캉!

최대한 붙은 거리에서 시안과 로데릭의 초근접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거리가 가깝다 하여 로데릭의 전력이 크게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운신이 불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검의 면과 날, 그리고 폼멜과 손잡이까지 사용하며 로데릭은 시안의 검을 잘 받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뜨문뜨문 빈틈이 보이게 되었을 때.

“합!”

그가 크게 검을 휘둘러 시안을 떼어냈다.

대검의 육중한 무게와 원심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역시 거리를 벌려야 했으니까.

튕겨 나온 시안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틈에 로데릭의 위압에서 살짝 벗어난 악마가 시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콰직!

“키에에에엑!”

시안이 곧바로 놈의 머리를 찍으며 일어났다.

“악마들의 도움 없이 괜찮겠습니까?”

“너 같은 핏덩이 하나 상대하는 데 우르르 몰려들 필요는 없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핏덩이를 보는 로데릭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야수처럼 충혈된 것과는 정반대로 머리는 차갑고 냉철하게 상대의 전력을 살피고 있다.

시안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밤의 오러가 펼쳐지며.

[ 상천검(霜天劍) - 암우(暗雨) ]

검은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키에엑!”

꼼짝도 못하고 비실거리고 있던 악마들이 검은 비에 꿰뚫려 하나둘 절명한다.

로데릭이 눈을 부릅뜨며 검을 휘둘러 비를 쳐내었다.

그사이 시안이 땅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로데릭은 대번에 시안의 목적을 파악했다. 아까처럼 이쪽의 품으로 파고들 생각이다.

그가 검을 휘둘러 시안의 발걸음을 견제했다.

대검의 끝 거리에서 시안이 멈추곤, 다시금 이쪽으로 파고들 틈을 재었다.

캉!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두 사람의 검이 오갔다.

치명적인 일격이 오가기보단 서로가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공방.

서로가 단 한 수에 상대를 절명시킬 수 있었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은 채 견제의 검격만 오가고 있었다.

‘시안 아그리드. 이 정도였나?’

로데릭이, 겉으론 표하고 있지 않았지만 적지 않게 당황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 얼마 전 여관에서 싸웠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경지가 오르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집중력이 최고조로 달하고 있었다.

칼날 같은 정신력으로 집중력을 이어간다.

가느다란 실 위에서 이어지는 극한의 줄타기.

그 실을 끊냐 마냐가 관건인데, 묘하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장군 로데릭. 황실이 자랑하는 군부의 하이마스터.’

그 말대로 시안은 종래에 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올라와 있었다.

하이마스터. 그것은 모든 검을 든 자의 꿈과도 같은 경지에 오른 이.

그런 이를 밟고 지나가야만 해령궁주의 목에 닿을 수 있다.

그 사실이 시안에게 강한 스트레스를 주었고, 그 스트레스는 역으로 지금까지 없던 정신력을 끌어 올려주고 있었다.

‘마룡왕과는 전혀 다른 느낌.’

마룡왕과 싸울 때와는 전혀 달랐다.

단순히 그때는 셋이었고 지금은 혼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뿜는 기세 자체가 마룡왕이 쉼 없이 쏟아지는 운석과 같았다면, 로데릭은 뚫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산맥과 같았다.

‘뚫느냐.’

그 산을 뚫고 지나가느냐.

‘뚫리지 않느냐.’

아니면 닿지 못하고 막히느냐.

아무리 하이마스터라고 해도 심장에 검이 박히면 죽는다.

오러를 이용해 최대한 방어할 수는 있어도 결국 오러는 공격을 위한 기술. 막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시안의 오러는 로데릭의 오러를 뚫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캉! 캉캉!

가느다란 실 하나에 의지한 채 두 사람의 검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의 심장을 꿰뚫기 위한, 서로의 머리를 갈라버리기 위한.

어느 쪽의 실이 먼저 끊어지나 그것에 달린 전투에서.

촤악!

“!”

로데릭의 검이 시안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었다.

깊숙한 상처와 함께 핏줄기가 튀어오른다.

그리고.

그 핏줄기를 뚫고 시안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로데릭의 검은 시안을 베었으나, 결국 죽이지 못하고 끝났다.

그러나 시안의 검은 아직 남아있었다.

로데릭이 검을 회수하며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그가 뒤로 가는 것보다, 시안이 앞으로 가는 것이 더욱 빨랐다.

-푹.

쏟아지는 스스로의 핏줄기에 범벅이 된 흑검이, 로데릭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오러를 둘러 가능한 한 막아내 보려 한 로데릭이었으나 호신용의 오러 정도로 시안의 오러를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시안의 밤의 오러가 로데릭의 오러를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가, 그의 심장에 꽂혔다.

“컥, 컥!”

로데릭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스스로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시야도, 그리고 올라오는 고통도 모두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순간.

헥토르를 막 집어삼킨 해령궁주가 로데릭과 시안을 보았다.

직후 해령궁주의 의식이 잠시 뒤흔들렸다.

로데릭의 심장에 검이 꽂힌 것을 보곤, 지저에 묻혀 있던 아이작 황자의 의식이 해령궁주의 의식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로데릭 경!”

아이작 황자가 삼키기 위해 들고 있던 악마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채 로데릭에게 달려왔다.

그가 오는 것을 보곤 시안이 다급히 검을 뽑아 거리를 벌렸다.

뽑는 도중 한차례 검을 비틀어 심장을 완전히 박살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커흑!”

“로데릭 경!”

아이작이 쓰러지는 로데릭을 붙잡는다.

로데릭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아이작의 옷을 움켜잡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렸다. 하지만 아이작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로데릭의 기억을 자극했고,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로데릭 경……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아이작이 갓 태어났을 때. 아이를 부탁하곤 숨을 거뒀던 황비.

그녀는 로데릭이 젊었던 시절부터 모셔왔던 주군이었고, 그런 그녀가 맡긴 아이를 로데릭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일개 황자로서 보려고 하였으나 자라면 자랄수록 어미와 닮아가는 아이작을 보며 로데릭은 결국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좀 더 엄하게 대해야 했던 것일까. 지옥계와 악마를 끌어들일 정도로 야심이 자라날 줄이야.

그런 회한과 함께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순간이나마 아이작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마지막 회광반조인 것일까? 흐려졌던 그의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고.

“……!”

아이작의 얼굴을 본 로데릭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아이작은, 마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씹어 먹은 것마냥 입 주변이 생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썩은 고기 같은 역한 냄새와 함께, 그 속에 섞여 있는 진한 악마의 향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쩌면 진실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로데릭에겐 이미 그럴 시간도 여력도 없었고.

“어…… 째서…….”

그저 충격적인 장면만을 목격한 채 그의 손이 아이작을 향해 뻗어갔다.

그 직후.

툭.

올라가던 그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며, 로데릭의 눈이 감겼다.

눈을 감은 그 얼굴은 짙은 고뇌와 괴로움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이작 황자?”

해령궁주가 난입했단 생각에 거리를 벌렸던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그를 불렀다.

아이작은 로데릭의 시체를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경계를 풀지 않는 시안이었고.

“잠깐 정신이 나갔었군.”

이내 녀석이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그 얼굴엔 방금까지 보였던 로데릭의 죽음을 슬퍼하는 표정 따윈 전혀 없었다.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즐겁게 웃고 있는 악마만이 남았을 뿐.

“해령궁주…….”

녀석을 보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헥토르가 녀석과 대치를 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녀석만 보이고 헥토르는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별궁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악마들이 지금은 굉장히 숫자가 줄어 있었다.

그나마 남은 악마들도 이쪽으로 달려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해령궁주를 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설마…….

“설마 로데릭을 쓰러뜨릴 줄이야.”

로데릭은, 악마들을 포함해 해령궁주가 가진 모든 패 중에 가장 강력한 패였다.

하이마스터. 그들은 지옥계의 대악마와 필적하는 힘을 가진 경지에 오른 인간들이다.

그 정도의 이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기에, 해령궁주도 아이작 황자를 사도로 삼았던 것이고.

그런데 그 로데릭이 저런 어린 인간에게 쓰러질 줄은.

“역시 네메시스가 아무것도 없이 널 고른 건 아닌 모양이지.”

파지지직!

그의 손에서 벼락이 튀기기 시작했다.

익히 보아왔던, 헥토르의 것과 꼭 닮은 그 벼락을 보며 시안이 이를 갈았다.

딱히 분노가 인다거나 화를 참지 못하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죽인다.’

더욱 살의가 올라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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