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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1화 (18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1화

시안의 힘 탓에 황궁 쪽에선 강제로 누워 있을 수밖에 없던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개가 옅어지며 황궁에서 잠들어 있던 이들도 일어나기 시작했고, 당연히 황궁은 난리가 났다.

도심지와 마찬가지로 비명이 난무한다. 병사와 기사들이 다급히 무구를 들고 응전해 보지만 그들은 악마보다 약했고, 심지어 머릿수조차 악마들이 많았다.

“어떻게…….”

자신들을 포위하는 악마들을 보며 시안이 신음을 삼켰다.

마룡왕 외에는 지금껏 라비의 힘에 저항했던 악마들은 없었다. 그 프시케조차 굴복하지 않았던가.

‘저 보석.’

원인은 명백했다. 해령궁주가 들고 있는 빛나는 작은 보석.

저 보석이 흩뿌리는 빛이 악마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라비의 목줄을 모조리 끊어버렸다.

풀린 악마들은 무차별적으로 황궁을 공격하며, 그중 일부는 별궁 쪽에 남아 시안과 헥토르를 포위하고 있었다.

-캬아아악!

악마들이 달려든다. 시안이 가장 앞에 오는 놈의 허리를 갈랐다.

서걱.

그 너머로 이어지는 수백의 악마들과, 뒤쪽에서 비웃음을 띄우곤 관망하는 해령궁주가 보였다.

시안이 해령궁주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악마를 상대했다.

한 놈 한 놈, 시안의 일검에 쓰러져 갔다. 그 참혹한 광경에도 악마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꼭 세뇌라도 당한 듯한 모양새였다.

스스로의 목숨보다, 시안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빼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

‘해령궁주의 목줄인가.’

지옥계에서 1년여 간 굴러본 입장에선 악마들의 이런 행동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놈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닥불에 뛰어드는 부나방마냥 달려든다는 것은 무언가 더 큰 강제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체력 안배를 하면서.’

한 무리의 악마들을 썰어 넘기니 또 한 무리의 악마들이 쇄도한다.

시안이 검에 담긴 오러를 더욱 키웠다.

이런 전투에선 체력과 마력의 배분이 중요하다. 검을 휘두를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시안이 마력을 더욱 불어넣었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촤촤촤촤촥!

검을 긋자 눈앞에 보이는 한 무리의 악마들이 모조리 갈려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시안이 멈칫했다.

갈려나가는 악마들 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시안 아그리드!”

대장군 로데릭. 그가 악마들의 잔해를 뚫고 시안을 향해 돌격했다.

그의 대검이 시안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시안이 간신히 검을 들어 흘려내었으나, 흘려냈음에도 손이 저려올 정도의 충격이 내달렸다.

로데릭이 검을 회수하곤 다시 내려쳤다.

쾅! 쾅! 쾅!

한 번 한 번이 땅이 패일 정도의 충격이 몇 번이나 내려친다. 쏟아지는 검의 압력 속에서 시안이 로데릭을 상대해 갔다.

“시안. 황제 폐하를 모시는 후작가의 일원이면서 황자님께 검을 들이대는 것이냐?”

전투의 한중간 로데릭이 그런 얘기를 꺼냈으나, 안타깝게도 시안에겐 전혀 영향이 없었다.

시안은 사실 후작가의 사람도 아닐뿐더러 지금 황자는 황자가 아니었으니까.

“저게 아직도 황자로 보이는 겁니까?”

“뭐?”

“해령궁주는 이미 강림했습니다. 당신이 아는 아이작 황자는 이제 없어요.”

시안의 검과 맞닿은 로데릭의 검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간극이었으나 그 틈을 놓칠 시안이 아니었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카앙!

대검을 쳐내고 한 발자국 내딛으며, 시안이 검을 찔러 들어갔다.

“큭!”

로데릭이 급하게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시안의 검이 로데릭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로데릭의 뺨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허튼소리로 날 현혹하려 들지 마라.”

피를 본 로데릭이 다시금 단단히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허튼소리라 생각합니까? 이걸 보고도?”

시안이 주변을 가리켰다. 황궁의 상공에 열린 거대한 지옥의 문과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악마들의 향연.

그것은 인간이 해낸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래.”

로데릭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방금의 한 번. 그 한 번의 흔들림 이후로 그는 더욱 단단히 정신무장을 하였다.

다른 일보다도, 눈앞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금의 그에게 무엇보다 확실한 진실은 시안이 아이작에게 칼을 들이밀었단 사실뿐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악마들의 방해를 뚫고 하이마스터를 쓰러뜨리는 것. 그건 단신으로 마룡왕을 상대하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는 일.

그렇게 시안이 로데릭과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와중.

“멍청한 녀석.”

해령궁주는 헥토르를 상대하고 있었다.

상대한다곤 하지만 일방적인 전투였다.

해령궁주가 쏘아 보내는 물줄기를 헥토르는 받아치는 것만으로 버거워했다.

콰앙!

“컥!”

하늘에서 생성된 방대한 양의 물의 창이 헥토르를 포위하곤 떨어진다.

헥토르가 전격의 벽을 만들어 막아내었으나, 한두 개의 창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헥토르의 몸에 상처를 내었다.

간신히 급소는 피했지만 어깨와 허벅지 부분이 크게 찢어지며 헥토르가 비틀거렸다.

“줄을 잘 서야 할 거야. 저 녀석과 나 중 누가 왕이 될 것인지.”

해령궁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헥토르의 주변에서 물의 입자가 원을 그리며 생성되었다.

이윽고 그 입자들이 보이지도 않은 가느다란 바늘을 쏘아 헥토르의 목에 쏘아졌다.

몸을 웅크리며 어떻게든 버티는 헥토르였으나 점점 그의 몸이 빨갛게 물들며 흘러내리는 피의 양도 더욱 많아졌다.

이윽고 해령궁주의 맹공이 한차례 멈추고, 헥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해령궁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헥토르의 눈에 깃든 투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에.

“……왕이니 뭐니 그딴 건 난 몰라.”

퉤. 그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얘기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말을 듣곤, 해령궁주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멍청한 오우거 놈이…….”

폭풍산의 천둥오우거 뇌력천주.

그 커다란 덩치와 반대로 뇌는 작기 만한 멍청한 놈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대로였다.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붙는 것이 유리한지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을.

“주제를 가르쳐 줘야겠군.”

해령궁주가 웃으며 옆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바로 옆에 있던 악마의 목이 잡혔다.

갑작스러운 일에 악마가 얼굴에 의문을 띄우며 버둥거렸으나.

와드득!

그 직후 목을 붙잡힌 악마는, 크게 벌린 해령궁주의 입속으로 삼켜져 들어갔다.

제 부하를 포식하는 해령궁주의 모습을 보며, 헥토르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 * *

조금 전.

베르페드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안과 해령궁주는 한창 전투를 치르던 중이었다.

‘황자와 싸우고 있다고 하더니.’

시안과 아이작의 전투.

황궁의 정문, 제3별궁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지만 풍겨오는 기운만으로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비교적 팽팽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였었나.’

시안의 숨은 실력에 살짝 놀란 베르페드였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행보를 조금 틀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는 제3별궁이 아닌 황궁의 본궁으로 향했다.

아마 병상에 누운 황제가 있을.

잠시 후 황제의 침소로 향하니.

“폐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활로를 만들어내겠습니다!”

“그래…….”

기사에게 업혀선, 수십의 기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악마들을 뚫고 있는 황제와 그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황실의 뛰어난 근위대가 악마들을 뚫고 있었으나 악마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황제는 잘 떠지지도 않는 침침한 눈을 애써 들어 올리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때.

-촤촤촤촤촥!

그들의 발을 묶고 있던 일단의 악마들이 일순간에 썰려나갔다.

기사들과 황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옷깃에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베르페드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황제 폐하.”

그가 악마들의 피로 가득한 대전에 서슴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악마들의 피는 불쾌했으나 황제의 앞에서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오오…… 와주었는가…….”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베르페드를 맞이했다.

이번 일 때문에 어딜 다치거나 기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질병의 탓에 몸이 많이 쇠해 있는 황제였다.

“헬레네 황녀님도 이미 보호 중입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헬레네도 구해주었는가……. 고맙네.”

황제를 업은 기사가 베르페드의 옆에 바짝 붙었다.

베르페드가 악마들을 처리하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궁을 벗어날 무렵.

-콰아아앙!

뒤쪽 제3별궁 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리는 것이 들렸다.

베르페드가 잠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헬레네 황녀를 확보했고 황제까지 보호했다. 이걸로 모든 일이 끝났을 때의 대비는 완벽해.’

이번 사건이 무사히 해결되었을 때의 대비는 완벽했다.

국정에 혼란이 오는 것은 헬레네 황녀가 잘 처리할 것이고, 그런 헬레네 황녀와 황제를 구한 베르페드의 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

아그리드 후작가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질 것이고, 제국의 평안은 언제나처럼 유지되리라.

다만.

‘……조금만 더 버텨보거라.’

이 모든 것은 사건을 무사히 해결했을 때의 얘기.

즉 해령궁주를 죽일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시안이 놈과 싸우고 있을 별궁 쪽에서 고개를 돌리며, 그가 황궁 바깥의 안가를 향했다.

* * *

해령궁주가 닥치는 대로 악마들을 포식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서 입에 넣는다. 그때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헥토르는 이것과 비슷한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시안이 내 힘을 조금 뺏어갔을 때.’

시안과 처음 만났던 천둥마탑에서의 그날. 자신에게 목줄이 채워졌던 그날.

그가 자신의 힘을 일부 빼앗아 그걸 검으로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현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단 시안과 달리 해령궁주는, 일말의 자비도 없는 압도적인 포식이었다.

이윽고 주변의 악마를 모조리 먹어치우곤 해령궁주가 헥토르를 보았다.

탐욕과 굶주림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헥토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거리를 벌리려 뒷걸음질을 쳤으나.

“!”

어쩐 일인지,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멈춰 있는 헥토르를 향해 해령궁주가 다가와 한 손으로 헥토르의 머리를 틀어 쥐었다.

꽈악!

머리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악력이 그의 머리를 붙잡는다.

헥토르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버둥거렸으나 해령궁주의 팔은 쇠기둥처럼 단단하기만 하여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네 녀석도 와라.”

해령궁주가 씨익 웃더니 입을 벌렸다.

그 아가리 속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생명체의 입속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올라올 수 없는 심연.

“으아아아악!”

일말의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헥토르가 해령궁주에게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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