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0화
하늘이 열리고 악마들이 내려온다.
짙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고 악마들이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안개의 탓으로 잠에 빠졌던 시민들이 일어나며 도시 곳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이 비명을 부르며 자고 있던 이들이 강제로 깨어난다.
깊은 새벽 시간임에도 불이 피어오르며 도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지성이 없는 마물들과는 달랐다.
놈들은 단단히 닫혀 있는 집의 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곤히 자고 있던 사람들의 목덜이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간신히 도망 나와 집 밖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거리에도 이미 수많은 악마들이 사냥감을 경쟁하며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평화롭던 도시가 아비규환의 현장에 빠지기까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꺄악!”
어둑한 뒷골목에서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건물 벽에 달라붙은 악마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 얼굴엔 환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체 얼마 만이란 말인가.
해령궁주에게 복종을 맹세한 후, 그의 말만 믿고 기다리기를 수십 년.
그동안 그들은 굶주리고 또 굶주렸다. 항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상황.
그것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놈이 겁에 질려 주저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을 뚝뚝 흘리며, 건물 벽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 직후.
-서걱!
‘……어?’
시야가 기울어진다. 피보라가 피어오르며 웬 목이 잘린 생생한 시체 하나가 보였다.
그것이 자신의 몸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악마는 이미 죽어 사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귀족님.”
아이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단의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 척 봐도 굉장히 지체가 높은 귀족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악마만큼은 아니지만, 두렵기 짝이 없는 존재.
그 중년의 귀족이 아이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곤 검을 찔렀다.
“히익!”
아이가 기겁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그곳엔 아까의 악마와 다른 작은 악마가 심장이 꿰뚫린 채 죽어 있었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악마를 처리한 중년의 귀족이 골목에서 나와 거리로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악마들이 눈이 벌개지며 달려들었으나 그 누구도 그의 한 합을 버티지 못했다.
“후작님.”
그때, 악마의 시체에 둘러싸인 그를 향해 노인이 다가왔다.
“어땠지, 염노?”
베르페드가 상황을 살펴보라 보냈던 염노가 돌아온 것이다.
염노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예를 갖추며 베르페드에게 보고했다.
“황궁의 상공에 거대한 문이 열려있습니다.”
“황궁?”
“예. 악마들은 그곳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쯧…… 그 황자 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나 보군.”
황궁에서 일이 터졌다면 거의 100%의 확률로 아이작이 범인이다.
베르페드는 황궁의 인물 중 아이작 외에 이런 사건을 저지를 이를 알지 못했다.
‘목표는 헬레네 황년가?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일을 키운 거지?’
헬레네만이 목적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런 짓을 벌이고선 황제 자리를 차지해봐야 그 어떤 귀족이 지지를 보내겠는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 이상 신뢰로 봉신관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보면 되었다.
‘아니면 그만큼의 힘을 가졌다는 자신인가?’
그가 알고 있는 아이작의 힘은 해령궁주에서 비롯된다.
그 해령궁주의 힘에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까? 하이마스터인 자신을 포함해 다른 귀족들도 모두 압박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다만.
-꺄아아아악!
시간은 넉넉지 않았다.
베르페드가 염노에게 물었다.
“‘그건’ 뭐 하고 있지?”
정확한 지칭이 없는 말이었지만 염노는 잘 알아들었다. 그것이란 건 시안을 뜻하는 말이었다.
베르페드는 결코 시안을 시안이라 부르는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시안이란 이름은 본디 그의 진짜 아들의 이름이니까.
지금의 시안은 결국 가짜인 그림자에 불과했기에, 베르페드가 그를 시안이라 부를 리가 없었다.
“여관에 잠시 가봤습니다만 없었습니다.”
“쯧. 손 하나가 급할 때 없군. 아니면 황자와 함께 이 일을 일으킨 공범인가?”
“마룡왕의 사도라는 말은…….”
“알아, 알아. 오해라는 말이지?”
베르페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제부터 시안은 마룡왕의 사도가 아니라고 얼마나 귀찮게 하며 설득을 하던지.
그가 황궁 방향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곳의 기운이 무척이나 일그러져 있다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가지.”
“황궁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멍청한 황자를 벌하러 간다.”
찾아가서 뭘 했는지 묻고, 아예 목을 칠 생각이다.
아무리 신분이 황자라고 하여도 이런 일을 벌이고 무사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 도시에서 아이작의 목을 칠 수 있는 것은 자신 하나뿐일 것이다.
같은 하이마스터인 로데릭에게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가 황자를 배신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황궁을 향해 막 발걸음을 옮겼을 때.
“후, 후작님!”
두 사람의 앞으로 한 여성이 나타났다.
악마들을 뚫고 나온 듯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상처투성이가 된 모습. 그런 몸으로도 등에 업은 황녀만큼은 확실하게 보호하고 있는.
황궁에서 도망친 에르제였다.
“너는?”
베르페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르제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 황녀를 등에 업고 나타난 여자.
분명 이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시안의 옆에 있던 그 여자였다.
“에, 에르제라고 해요. 황녀님의 호위대 소속인.”
악마들을 뚫고 도망치며, 에르제는 필사적으로 베르페드를 찾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면 그의 옆일 거라 생각했기에.
하이마스터의 실력은 물론이고 그간 헬레네에게 전해 들었던 귀족들의 인상으론, 베르페드는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가 시안의 아버지란 사실도, 의식하진 않고 있지만, 그녀에게 믿음을 안겨주는 요인이었다.
“용케 도망쳤군.”
베르페드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염노에게 듣기로 황궁은 악마들이 소환되고 있는 근원지이다.
그리고 지옥문을 연 장본인인 아이작까지 있는 상황.
그런 곳에서 아이작의 목표일 게 분명한 헬레네를 데리고 빠져나오다니, 앳된 외모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유능한 듯 보였다.
“실은 시안이!”
그런 베르페드에게, 에르제가 급히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시안이 황궁에 남아 황자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
베르페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에르제의 말을 들었다.
그러곤.
“염노. 이 아이와 함께 황녀를 보호하도록.”
염노에게 지시를 내렸다.
“후작님께서는…….”
“궁으로 가마.”
생각지 못했던 황궁의 상황을 전해 들었으나 그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사태를 일으킨 아이작 황자를 찾아 목을 베는 것.
그가 홀로 황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콰과과과광!
시안과 해령궁주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여파로 헬레네의 별궁은 거의 무너져 내리다시피 했다.
안개가 옅어지며 자고 있던 병사들이 깨어나긴 하였으나 그들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옥문에서 내려오는 악마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콰아아아-!
거대한 물줄기가 용의 형상을 그리며 시안을 덮친다.
시안이 뛰어올라 그 용의 목을 내리쳤다.
빙정의 냉기가 순식간에 물을 얼려버리며 용의 목이 댕강 떨어져 내렸다.
“과연 제법이로군.”
커다란 기술 하나가 칼질 한 번에 무위로 돌아갔으나 해령궁주는 비웃음만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손짓하자 물이 소용돌이치며 구체를 그리더니 그대로 터져 나갔다.
콰과과과광!
‘어떻게 막고는 있는데.’
해령궁주의 기운을 베어내며 잘 받아치고는 있다. 힘을 잃고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어찌어찌 놈의 기술을 틀어막고는 있다.
하지만 뚫고 접근하기엔 여의치가 않았다.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방금까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 무렵.
-콰앙!
외부의 충격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별궁의 외벽이 완전히 박살 나 무너졌다.
“하아…… 노력해도 힘드네.”
외부의 충격은 헥토르가 로데릭에게 당한 여파였다.
건물의 잔해에서 일어나며 헥토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헥토르. 힘들어 보이는군.”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부러졌는지 팔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었고 몸 곳곳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
흘리는 피가 웅덩이를 만들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헥토르를 노려보는 로데릭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헥토르만큼은 아니어도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으며 항상 단정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다.
침착했던 표정도 지금은 분노한 야수와 같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네 쪽도 장난 아닌데?”
헥토르가 힐끔 이쪽을 보며 얘기했다.
시안을 살피고, 그리고 시안와 마주하고 있는 해령궁주를 살핀 그의 눈이 살짝 떨려왔다.
해령궁주의 존재감을 단번에 눈치 챈 것이다.
“저건…….”
“그래. 해령궁주 본인이다.”
“젠장.”
나직히 욕설을 내뱉는 헥토르를 시안이 바라보았다. 용케도 도망치지 않았다. 로데릭을 상대하기엔 아직 부족할 텐데도.
“황자님. 무사하십니까.”
“그래. 경은 조금 고전하는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로데릭이 해령궁주의 곁으로 가 상세를 살폈다.
그는 아이작의 몸에 이미 해령궁주가 강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시안이나 헥토르만큼 지옥의 존재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당연히 황자를 걱정하는 말을 건넨 것이다만, 사실 해령궁주보다는 로데릭의 상태가 더 심했다.
거의 상처가 없는 해령궁주에 비해 로데릭은 헥토르와 싸우며 꽤나 소모된 상태였다.
“저 문은…….”
그가 하늘에 있는 지옥문을 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황자를 배신할 생각은 없지만, 자꾸 이계의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그 방식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런 로데릭을 향해 해령궁주가 대수롭지 않게 손사래를 쳤다.
“걱정 말게. 다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니. 적들만 배제하고 나면 다시 돌려보낼 거야.”
“그렇군요.”
로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황자를 믿고는 있는 그였다.
아이작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물론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아이작이 아니라 해령궁주였지만 말이다.
그 해령궁주가 로데릭을 제쳐놓곤 시안을 보았다.
“시안 아그리드. 어떻게 네메시스의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품에서 보석 하나를 꺼냈다.
작은 흑요석과 같은,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해령궁주가 기운을 불어넣으니 보석이 살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녹아 사라졌다.
네메시스의 심장.
과거 해령궁주가 네메시스를 죽이며 뽑아냈던 심장이었다.
지금은 많이 써서 작은 크기로 줄어 있었지만.
“네놈을 죽이고 이 내가 지옥의 왕이 될 것이다.”
보석에서 퍼져 나온 빛이 주변의 악마들을 쐬며, 시안의 힘으로 꿇려있던 악마들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황제 자리를 노리던 아이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