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9화
아이작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에르제가 흐릿한 눈으로 떨어지는 검을 바라보았다.
‘어…….’
어쩐 일인지 머리가 명료하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바라보는 와중에도 아이작의 검은 시시각각 에르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작의 검이 빨려들 듯이 에르제의 목을 향한다.
그의 검엔 다른 무인과 같은 무술의 묘리가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검에 있어선 초보 중의 초보의 모습.
그러나 멍하니 있는 여인 하나 죽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실력이었다.
이윽고 아이작의 검이 에르제의 목에 닿았고.
“!”
그 순간, 에르제의 눈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휘익!
그녀의 몸이 튕기듯 날아가며 아이작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착지와 동시에 단검을 꺼내 겨누며, 그녀가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그 목에서 가느다란 생채기와 함께 핏방울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쯧.”
아이작이 귀찮게 되었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뒤쪽 허공에서 물이 뭉치더니 갖가지 형상을 띤 수백 자루의 무기로 변하여, 쏘아져 내렸다.
캉! 카카카캉!
수없이 떨어지는 물의 무기들을 에르제가 고작 한 자루의 단검으로 모두 쳐내었다.
방금까지 흐릿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지금은 온 세계가 선명하고 또렸했다.
‘힘이 넘쳐.’
어릴 때부터 그녀는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힘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눈에 띄기 힘든 정도였던 능력.
그것이 점점 개화하기 시작한 것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보다 정확히는 시안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특히…… 그 설산에서.’
그류페인 설산에서 하이오크들을 상대했을 때.
악마가 강림한 새끼 오크와 싸웠던 그 순간을 기점으로, 아니, 라비와 만났던 그 순간을 기점으로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콰아아앙!
수백의 무구들이 쏘아지는 와중에 에르제의 머리 위로도 물의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편하게 피하기 위해서는 뒤로 빠져야 하지만, 빠지기만 해서는 끝이 나지 않는다.
체력을 갉아 먹히다 지게 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렇기에 에르제는 오히려 앞으로 뛰었다.
한 걸음 나아갈수록 쇄도하는 물의 무구들이 더욱 빨라지고 강해졌지만, 아직은 그 무엇도 에르제의 그림자를 뚫지 못했다.
이윽고 아이작의 품속까지 파고든 에르제가 놈의 목을 향해 검을 그었다.
-서걱.
그러나 그녀의 검은 아이작의 목깃만 베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가 눈을 찌푸리며 물의 검으로 에르제를 공격했다.
캉! 캉캉!
그러나 접근전은 실력 차이가 명백했다.
검술이라곤 교양 정도로밖에 익히지 않은 아이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단련을 이어온 에르제를 이길 리가 없었다.
아이작은 무인이 아닌 술사에 더 가까운 이였다.
“귀찮게도 달라붙는군.”
아이작이 혀를 차더니 뒤로 뛰었다. 에르제가 바로 추격하려 몸을 앞으로 기울였으나.
투두둑! 그녀의 발 바로 앞에 5자루의 물의 창이 쏘아지며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그 한순간의 틈을 벌려 아이작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콰아아앙!
그러자 아이작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생성되며 별궁의 천장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흑마법사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군.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고…….”
몸을 보호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아이작이 에르제를 쏘아보았다.
해령궁주의 안개 속에서 버티는 걸 보고 악마의 힘을 쓰는 흑마법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싸워보니, 힘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다.
힘을 빌려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악마 또한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악마보다는 인간의 냄새가 더 많이 난다.
“악마의 피가 섞였을 뿐이군.”
소용돌이를 헤치고 들어오는 에르제를 보며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소용돌이를 넘어 에르제의 귀에도 들려왔다.
‘…….’
반인반마. 출생의 비밀일 수도 있을 그 가설을 듣고서도, 에르제의 눈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가 보는 것은 오직 하나. 오로지 적밖에 없었다.
소용돌이를 깎아내고 벗겨내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아이작을 끌어내 죽이는 것.
“큿!”
순간 물줄기가 더욱 가속되며 에르제의 몸을 강타했다.
물이 아닌 흡사 바윗덩이에 맞은 듯한 충격이 에르제를 강타했다.
전신이 저려오는 충격 속에도 에르제의 눈이 빛났다.
그녀가 그림자에 휩싸인 검을 그었다.
몸을 내던진 보람이 있었는지, 그녀는 소용돌이의 핵을 부수고 흩어놓는 것에 성공했다.
힘을 잃고 흩어지는 물줄기 속에서, 에르제가 그 사이에 있는 아이작을 보았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무방비한 상태의 아이작에게 검을 꽂기 위해 달려들었다.
“반쪽짜리가 건방진…….”
그가 입술을 씰룩였고.
그 순간 하늘이 열렸다.
십자 모양으로 쩌저정 금이 가며, 공간이 일렁인다.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키아아아악!
기기괴괴한 악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 *
별궁 깊숙한 곳. 헬레네의 거처를 찾아 향하던 시안이 멈칫거렸다.
-콰아아앙!
별궁 한쪽에서, 천장을 뚫고 소용돌이가 치솟는다.
그가 당장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순간적으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이전에 많이 맡았던 그것. 지옥계의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웅! 웅웅!’
라비가 본능적으로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으로 떤 것이 아니었다.
분노.
다시금, 삿된 이의 손으로 지옥문이 열린 것에 대한.
이내 시안이 현장에 도착했다.
하늘에 열린 십자 모양의 게이트. 그곳에서 쏟아지는 기괴한 형상의 악마들.
그리고 악마들에게서 헬레네를 지키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에르제.
‘에르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그녀가 깨어 있단 점이었다.
분명 그녀는 악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었을 텐데.
그 사실밖에 모르는 시안으로선 그녀가 이 안개 속에서 어떻게 깨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단순히 수적으로 밀리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위협적인 것은 악마들 사이사이로 쏘아지는 아이작의 수뢰탄이었다.
악마들을 상대론 나름 분전하는 에르제였지만 수뢰탄이 하나 쏘아질 때마다 에르제는 크게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난전 속으로, 시안이 곧바로 뛰어들었다.
“시안?”
갑자기 난입한 시안을 보곤 에르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사이 쏟아지는 수뢰탄을 모두 쳐내곤, 시안이 악마들을 쏘아보았다.
그의 등에선 라비의 밤의 오러가 줄기줄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 꿇어.”
고작 한마디. 그 한마디로 모든 악마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강한 압력이라도 받은 것처럼 땅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 광경을 에르제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시안 아그리드!”
순식간에 모든 악마들을 제압한 시안을 보곤 아이작이 이를 갈았다.
“역시 내게 올 생각은 없었군.”
“애초에 나는 마룡왕의 사도가 아니거든.”
“뭐?”
에르제가 눈에 의문을 띄웠으나, 시안은 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다.
대답 대신 그는 땅을 박차 아이작에게 달려들었다.
“……!”
빠르게 쇄도하는 시안을 보며 아이작이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그 피하는 것을 보곤 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히 접근전을 꺼리는 정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본능이 앞선 움직임.
과거, 해령궁주의 힘을 처음 접했을 때가 떠올랐다.
베리엄을 물리치곤 라비가 처음으로 악마의 힘을 흡수할 때.
베리엄의 계약자였던 해령궁주는 라비의 힘을 느끼자마자 꼬리를 자르고 그대로 도주했다.
마치 그때와 같은 움직임.
‘해령궁주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지.’
라비의 목줄은 악마의 힘을 빌릴 뿐인 흑마법사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피했다는 건, 단순한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아이작 황자가 아니군.”
이미 아이작이 아닌, 해령궁주가 강림한 상태라는 것.
마치 헥토르의 몸에 강림한 뇌력천주가 라비의 목줄을 피하려 했듯, 해령궁주 역시 라비를 피한 것이다.
이미 아이작의 몸을 빼앗고 강림한 상태였기에.
“흥, 눈치도 빠르군.”
시안의 말에 아이작이, 아니, 아이작의 몸에 들어간 해령궁주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시안의 머릿속에 마룡왕 때의 일이 떠올랐다.
프시케에게 목줄을 채웠으니 마룡왕 역시 가능할 것이라며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던.
해령궁주 역시 마룡왕에 버금갈 정도의 힘을 가진 악마라 하였다.
프시케나 뇌력천주처럼 간단하게 속박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놈을 충분히 압박하는 정도는 될 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라비의 힘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 네 녀석이 네메시스의 후예인가. 그렇게 처참하게 토막 나 놓고 잘도 후예를 남겨놓았군.”
해령궁주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이미 말투부터가 아이작과 완전히 달랐고, 존재감에 이르러선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아까까진 강한 힘을 가진 인간 정도였다면, 지금은 보다 거대한,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에르제. 황녀님을 데리고 도망가.”
“시안 너는…….”
“네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돼.”
시안이 강하게 얘기하자 에르제의 눈이 잠시 떨려왔다.
그러나 이내 단단히 결의를 다지더니, 헬레네를 안고 빠르게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해령궁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황녀는 이제 포기한 건가?”
시안이 그리 묻자 해령궁주가 피식 웃었다.
“인간 황제의 후예보단 네메시스의 후예 쪽이 훨씬 중요하니까.”
해령궁주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 있는 십자 모양의 게이트에서 기다란 사선이 그어졌다.
그 사선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게이트가 커지더니, 도시의 상공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쏟아지는 수백, 수천의 악마들.
소란이 일면 자고 있는 이들이 깨어나게 되겠지만 이제 와선 상관없었다.
도시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은 자신의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니까.
“황녀는 내 귀여운 수하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도시 위로 비처럼 쏟아지는 악마들을 보며 시안이 눈을 꿈틀거렸다.
당장에라도 가서 막고 싶었지만, 시안은 도저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도주하려 했다간 그 즉시 눈앞의 사내에게 목이 베일 것 같았기에.
“그래, 마룡왕의 사도가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그 영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어째서냐?”
“글쎄.”
시안이 전신에 긴장을 잔뜩 끌어올리며 해령궁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미 만년빙정을 꺼내 밤의 오러를 겹겹이 두르고 있는 전투태세였다.
“프시케의 힘까지 가지고 있군. 참으로 기묘한 인간이로구나.”
완전히 부서진 별궁의 천장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밝은 달빛이 해령궁주의 몸을 비추며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혼자군.’
마룡왕 때는 귀마도 있었고 프시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다.
혼자서 마룡왕에 버금간다고 하는 해령궁주와 맞서야 한다.
“뭐, 죽여보면 알게 되겠지.”
해령궁주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도 얘기하듯 손을 까딱거렸다.
박살 난 천장을 통해 달빛이 길게 들어온다.
분명 그는 아이작의 몸을 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 비친 그림자는 거대한 괴수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