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7화
황궁을 향해 행군하는 물의 정령들. 그 정령의 대군을 보며 시안은 선택을 해야 했다.
앞쪽의 황궁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뒤쪽의 해령궁주의 그림자로 향할 것인가.
‘황자는 어느 쪽에 있지?’
판단의 기준은 한 가지였다.
해령궁주의 사도인 아이작 황자는 어디에 있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뒤쪽의 그림자가 맞을 것이다.
악마의 강림은 계약자의 육체를 통해 진행되니, 뒤쪽에 있는 해령궁주의 그림자가 있는 쪽에 놈의 사도인 아이작 황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황자의 목적은.’
황자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뒤쪽은 답이 아닐 수도 있다.
황궁을 향해 진격하는 정령의 대군들. 당연히 놈의 목적은 황궁을 장악하는 것일 터.
그중에서도 더욱 큰 목적은 명확했다.
‘헬레네 황녀.’
3황녀 헬레네.
늙고 병든 황제가 정무에서 물러난 이후로 아이작 황자와 함께 황궁 세력을 양분한 그녀.
아이작에게 있어선 스스로가 제위에 오르는 가장 큰 장해물이 바로 그녀일 것이다.
이 안개 속에서 그녀만 처리할 수 있다면, 아이작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제국은 오래도록 신분 사회를 유지해왔고, 심지어 아이작은 대장군과 군부의 지지를 얻고 있으며 해령궁주까지 뒤에 업고 있다.
정통성과 힘을 모두 갖춘 아이작 1황자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현재 헬레네 이외에는 없었다.
‘황자는 헬레네 황녀를 죽이러 가겠지.’
그렇다면 결국 강림한 해령궁주도 그쪽에 있다는 뜻이다. 강림이란 것은 본디 계약자의 몸을 빌려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시안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황궁 쪽으로.
헬레네를 구해오는 것이야말로 아이작의 계략을 가장 훼방 놓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거기에 에르제도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그녀도 위험했다. 헬레네의 호위로 일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헥토르. 황궁 쪽으로 가자.”
“뭐? 꼭 그래야 돼? 딱히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뒤쪽으로 가든지.”
시안의 말에 헥토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찍이 안개 너머로 보이는 해령궁주의 실루엣.
그걸 보곤 구시렁거리던 헥토르의 입이 딱 멎었다.
“자, 황궁으로 가자!”
그러더니 제가 먼저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해령궁주가 무서운 모양이다.
‘황궁에 놈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걸 알게 된다면 또 겁먹고 투덜거리기 시작할 수 있으니.
자신만 아는 정보는 꾹 숨긴 채 시안이 헥토르를 데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황도 루스카야가 워낙 거대한 도시라 순전히 거리가 먼 것도 있었지만, 그 모든 길을 물의 정령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정령들은 매우 난폭하고 호전적이기까지 해서, 시안과 헥토르를 발견하면 눈이 뒤집히며 달려들었다.
“쿠루루루루!”
“몇 번째냐 이게!”
또다시 달려드는 일단의 물의 정령들을 향해 헥토르가 손을 들었다.
그 손에서 파직거리는 번개가 자리하더니, 몇 줄기나 되는 섬광이 달려드는 물의 정령들에게 쏘아졌다.
파지지지지직!
헥토르의 번개를 맞은 정령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험악해 보이고 덩치도 큰 물의 정령들이었으나 그 누구도 헥토르의 벼락 한 줄기를 버티지 못했다.
간신히 헥토르의 벼락을 피해 다가온 녀석들도 몇 있었지만, 그조차 문제 될 건 없었다.
[ 검령(劍靈) – 뇌명(雷鳴) ]
애써 다가와 봤자 시안의 검격에 일거에 쓸려나가는 물의 정령들.
아무리 숫자로 밀어붙이려고 해도 놈들은 시안과 헥토르 단 두 사람을 뚫지 못했다.
“야! 큰 놈이다!”
그러던 중, 정령 중에서도 유달리 덩치가 큰 개체가 등장했다.
조금 칙칙한 색깔인 다른 정령들에 비해 색부터 청명하기 그지없었으며, 덩치가 못해도 두 배는 큰 녀석이었다.
그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스피드로 쇄도하는 물의 정령을 보며, 헥토르가 견제의 의미로 벼락을 날렸으나.
-파직!
그의 벼락은 그대로 놈을 투과해 인근의 지면과 건물에 흩어질 뿐이었다.
불순물이 섞여 전기가 잘 통하는 일반적인 개체들과 달리, 순수한 물로 이루어진 녀석은 헥토르나 뇌명의 번개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물러서.”
물론, 번개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여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헥토르의 공격이나 시안의 뇌명을 무위로 돌릴 수는 있었으나.
[ 검령(劍靈) – 백화(白花) ]
-화르륵!
시안이 든 백색의 검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놈을 통째로 모조리 태워버렸다.
치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특수 개체가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
그렇게 조우하는 물의 정령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시안과 헥토르가 차근차근 황궁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가서 뭐 하려고? 다 자고 있는 황궁에서 도둑질이라도 하게?”
“헛소리. 황녀를 구하러 갈 거다.”
“황녀를?”
시안이 간단하게 당면 목적을 설명했다.
놈들의 목적은 십중팔구 황녀의 목일 것이다. 황녀가 죽게 된다면 황자의 야망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그러니 황녀를 구하러 간다.
“쳇, 내가 왜 인간들 대빵을 구하러 가야 하는지.”
“앞으로도 편하게 관광을 다니고 싶으면 협조해. 황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나면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나는 건 생각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쯧.”
헥토르가 귀찮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반론을 하지는 않았다.
모습을 보니 시안이 없을 때 한 지상 구경이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간단한 상의를 이어가며 물의 정령을 처치하다가.
이윽고 두 사람이 황궁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활짝 열린 정문과 정문으로 밀고 들어가는 정령들이 보였다.
개중 일부는 담을 넘어가는 놈들조차 있었다.
“완전히 작정을 했군.”
이 정도 병력이면 수면 안개가 없다고 하더라도 황궁의 방비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이작 황자가 철저히 준비했다는 얘기.
황도는 자신의 영역인 만큼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왔던 모양이었다.
“가자.”
“엉.”
거리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싸워왔지만 황궁 정문에서 싸우는 것은 부담되었다.
정령들을 쓰러뜨리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적들에게 포착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니까.
결국 두 사람은 주변을 잠깐 살핀 후, 정령들이 비어 있는 틈을 찾아 살며시 담을 넘었다.
“황궁 지리는 알아?”
헥토르가 시안에게 물었다.
대륙 최대의 도시 루스카야에 위치한, 대륙 최대의 건물인 황궁.
어찌나 거대하고 복잡한지 제대로 된 지도가 없이는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곳이었다.
“대충.”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황궁의 상세한 지리는 모르지만, 말 그대로 대강은 알고 있었다.
황제의 침실이나 황궁 비고 같은 비밀스러운 구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황자 황녀들이 기거하는 별궁의 위치 정도는 예전에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제3별궁은 이쪽이야.”
3황녀 헬레네가 기거하는 제3별궁. 정문을 기준으로 서쪽에 자리한 별궁이었다.
시안이 앞장서서 헥토르와 함께 3별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
별궁 앞에 도착한 시안과 헥토르가 그곳에서 우뚝 멈췄다.
제3별궁의 정원. 헬레네의 취향인지 흐드러진 장미꽃이 피어 있는 그곳에서, 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역시 왔군.”
대장군 로데릭.
그가 애용하는 대검을 땅에 꽂은 채로 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군…….”
“황자님께서 네놈이 올 거라 얘기하더군.”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자신이 아이작에게 가세할 생각이 없다는 건, 녀석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를 막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겁니까?”
“그런 명령이다.”
시안이 검령 백화를 양손으로 잡곤 로데릭을 겨눴다.
“전쟁은 반대한다고 그래놓곤, 잘도 돕고 있군요.”
“……황자님께선 이미 내 생각보다도 더욱 일을 진행시켜 놓았더군.”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달리는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격이다. 이제 와서 내리기엔 너무 늦었어.”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비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로데릭을 이곳에 배치했다는 것은 안쪽엔 이미 아이작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일 터.
시간이 없었다.
“야, 먼저 가라.”
“헥토르?”
그때 시안의 앞으로 헥토르가 나섰다. 시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황녀를 구해야 한다며? 그리고 황녀뿐만이 아니라 그 검은 머리 여자도 있을 거 아냐.”
에르제 말인가?
확실히 시안의 목적에는 에르제를 구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말하지 않았는데.
“너 혼자 괜찮겠어?”
“괜찮고 자시고. 내가 보기엔 여기가 훨씬 안전해 보이는데?”
헥토르가 턱짓으로 3별궁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니 풀풀 난다. 저 안쪽에 해령궁주가 있는 거 아냐. 놈의 사도나.”
가까이 오기 전까진 주변의 안개 탓에 몰랐으나, 여기까지 오니 훤히 알겠다.
해령궁주는 도시 바깥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빨리도 눈치챘군.”
“쳇.”
헥토르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아무튼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령궁주랑 싸울 마음은 없으니까 날 데리고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리 얘기하며 녀석이 양손을 벌렸다. 그 손 사이로 수십, 수백 줄기의 벼락이 생성되었다.
그 뒷모습을 보곤 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럼 맡기지. 죽지 마라.”
“난 절대 안 죽어.”
그리 대답하는 헥토르를 두곤 시안이 별궁 안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로데릭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검을 들어 내려쳤지만.
-콰앙!
앞에서 쏘아낸 헥토르의 벼락에 검이 지잉거리며 바들바들 떨렸다.
그 잠깐의 틈 사이에 시안은 이미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로데릭이 혀를 차곤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헥토르를 향해 검을 겨누며.
“동료랑 올 줄이야. 잘도 이 안개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군.”
“흥, 나한테 이딴 잡기술이 통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가. 너도 흑마법사인 모양이구나.”
로데릭이 검을 치켜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리니, 일순간 하늘을 찌르는 탑을 목도하는 느낌마저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헥토르를 향해 내리찍었다.
콰앙!
“어쩔 수 없이 놈들과 손을 잡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참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손속을 두지는 못할 것 같구나.”
반으로 갈라진 정원. 자욱이 피어오른 먼지를 보며 로데릭이 얘기했다.
손맛이 있다. 살짝 얕은 느낌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도 괜찮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상을 입힐 일격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하인 놈들이랑 비교하지 말아주지?”
갈라진 대지 위에서, 헥토르가 상처 하나 없이 서 있었다.
전신에 벼락을 튀기며, 동시에 그 머리엔 작은 뿔 두 개가 돋아나 있었다.
그걸 보곤 로데릭이 눈을 크게 떴다.
“폭풍산의 천둥오우거, 뇌력천주라고 한다.”
곧이어 헥토르의 전신이 벼락으로 화(化)하기 시작했다.
“흑마법사가 아니라 이미 강림한 악마였나…….”
그걸 보며 로데릭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