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6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곁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됐어. 그럴 나이도 아니고.”
염노가 시안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그가 시안을 아낀다고 해도 그의 주군은 베르페드다. 돌아가야 했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시안을 보며 염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 시안이 묵고 있는 여관을 떠났다.
가는 길, 그가 짙은 회한이 섞인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애초부터 후작가의 그림자로만 살 생각은 없었다.
시안에게 들었던 그 말은 충격적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론 ‘역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 옛날, 처음 시안과 만났던 곳은 바로 사고현장이었다.
다른 이는 모두 죽었고 어렸던 시안 혼자만이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던 그때, 후작님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줍기로 결정했던 그때.
염노는 똑똑히 보았다.
흐려진 정신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후작님을 관찰하는 시안의 눈을.
‘그때부터였지.’
후작님의 명령으로 염노는 시안의 교육 담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후작님의 아들인 진짜 시안의 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그림자.
그 교육에서 염노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시안이 후작가의 순종적인 시종으로 자라도록 하게끔 교육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막 교육을 시작했던 무렵 시안은 무척 반항적인 아이였고, 그에게 후작님의 은혜와 감사를 알려주는 것만큼 고된 일이 없었다.
몇 년에 걸친 교육 끝에 시안의 눈에서 반항기를 빼는 것엔 성공했지만.
‘역시 아니었어.’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건 자신뿐이었던 것 같았다.
반항기가 빠진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시안이, 스스로의 속내를 숨길 수 있을 만큼 자랐던 것뿐.
‘나는 실패했던 거군.’
실패했다. 시안을 길들이라는 주군의 명을 받들지 못했다.
길들인 줄 알았던 야수는 알고 보니 처음부터 목줄 따윈 채워져 있지 않은 채였다.
그 사실을 알았는데.
“후후.”
어째선지,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늘을 보던 염노의 고개가 다시 내려왔다. 그 얼굴엔 이전엔 볼 수 없던 후련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실패했다고 하는데도 전혀 슬프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그 무렵.
“괜찮겠냐?”
슬슬 밤이 되어 에르제는 헬레네의 곁으로 돌아갔고, 시안과 헥토르만이 여관에 남아 있었다.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한테 반기를 들겠다고 한 거 아냐?”
헥토르가 시안에게 물었다.
말과는 달리 딱히 걱정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헥토르에게 이미, 마룡왕의 힘을 얻은 시안은 걱정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물었을 뿐.
“상관없어.”
시안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대답했다.
일종의 선전포고. 어차피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다.
마침 오늘이 타이밍이 맞았을 뿐.
‘대장군과도 그 정도로 승부가 나지 않았었으니.’
베르페드가 모든 걸 버리고 추적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의 손에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물론 세간의 평으론 베르페드가 로데릭의 반수 위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로데릭을 상대로 그 정도로 싸울 수 있었으면 베르페드를 상대로도 그럴 수 있다.
‘그럼 남은 건.’
시안이 제국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인 베르페드와의 대담.
어떻게 우연히 황도에 그가 머물고 있던 탓에 일찍 마무리가 되었다. 깔끔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이작 황자.’
해령궁주의 사도라고 하는 아이작 1황자. 그 녀석의 일이 남아 있다.
‘먼저 건들긴 힘들긴 한데.’
다만 먼저 손을 쓰긴 힘들었다.
신분부터가 황자였으며,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야망은 있으나 실현되긴 힘들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참이고, 대장군 역시 전쟁을 원치 않고 있다. 그리고 헬레네도 있으니 아이작의 야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았다.
‘굳이 내가 뭘 할 이유는 없지만.’
해령궁주의 사도라고 해서 시안이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녀석이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것.
정확히는 자신을 통해 마룡왕을 끌어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귀찮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황자라는 신분까지 있으니 뭐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먼저 건드리면 받아친다.’
가만히 놔둔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겠지만, 먼저 건든다면 잠자코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신분이 차이가 나도 마찬가지다. 시안이 그렇게 신분에 구애받는 성격이었다면, 빙하백령의 여왕을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해놨으면 집에 돌아가지도 못할 거고, 갈 데라고 있어?”
“글쎄. 일단 잠시 황도에 머물러 있다가…….”
아이작 황자의 동태를 잠시 지켜보고.
만약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 같다면.
“……여행이나 떠날까.”
옛날부터, 한 번쯤 넓은 세상을 봐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세상은 후작가의 작은 저택이 전부였으며, 그다음이라고 해봐야 에버웨일의 아카데미가 끝이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이 있어 대륙 곳곳을 다니긴 했으나,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과는 거리가 먼 여정이었다.
“설마 그때까지 날 데리고 다닐 생각은 아니지?”
“후, 글쎄.”
“적당히 좀 봐줘라…….”
시안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에겐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건 과거의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진짜 시안 아그리드의 그림자로서만 살아오며 그의 수발을 들던 자신은, 다른 미래 따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진짜 시안이 죽은 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악마와 거인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제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 전쟁이 끝난 지금, 자신은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비슷한 것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앞으로 그가 할 일은 하나였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 이 자유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것.
‘처음은 황자로군.’
첫 대상은 해령궁주의 사도인 바로 그였다.
* * *
새벽이 깊었다.
거대한 황궁이 위치한 대도시, 황도 루스카야도 밤이 되면 불이 꺼질 수밖에 없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도시. 모든 이들이 잠에 빠져든 시간.
땅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츠츠츠츠츠.
피어오른 안개가 황도를 모조리 뒤덮었다.
처음엔 옅은 연기 정도였던 그것은 머지않아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어졌다.
결코 자연현상이라 할 수 없는 기현상임에도, 일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갖가지 이유로 새벽까지 깨있던 시민들이, 안개를 들이마시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엎어져 쓰러졌다.
“……!”
잠을 자던 시안이 흠칫 놀라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창을 열어보았다.
그곳엔 이미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도시의 정경이 보였다.
“이게 대체…….”
그가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에겐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이 기운.’
황도를 뒤덮은 이 안개에서 느껴지는 기운. 자신에겐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창해랑 비슷하다.’
해령궁주의 힘을 일부 빼앗아 정련한 검령, 창해의 기운과 매우 흡사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한 가지.
‘황자가 움직이기 시작했군.’
역시 그만한 야망을 가진 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시안이 당장 외투를 걸치곤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헥토르!”
그가 먼저 들른 곳은 바로 옆인 헥토르의 방이었다.
쿵쿵. 몇 번 거칠게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찌푸린 시안이 이윽고 강제로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우지끈! 손잡이가 부서지며 문이 열린다.
“하암~ 뭔데 대체?”
그렇게까지 하며 들어가니 그제야 게슴츠레 눈을 뜨는 헥토르가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을 침대에서 끌고 나와, 강제로 창 앞으로 데려갔다.
바깥을 바라본 헥토르의 눈이 번쩍 크게 뜨였다.
순식간에 잠이 모두 달아난 그였다.
“이거 설마?”
“그래. 놈이야.”
해령궁주.
헥토르 역시 놈의 기운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헥토르는 실제 지옥계의 주민인 만큼 그가 느끼는 강렬함은 더욱 컸다.
“도, 도망갈 거지?”
평상시의 녀석 답지 않게 살짝 떠는 모습을 보곤, 시안이 말없이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여관 1층에 내려가 보니 한창 마시던 중에 당했는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 자고 있군.”
다가가 깨워보았으나 그들 중 일어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전원이 이렇게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아마 이 안개가 모종의 작용을 하는 모양.
‘나랑 헥토르가 무사한 것은 지옥계의 기운에 저항이 있기 때문인가?’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시안이 헥토르를 데리곤 거리로 나왔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안개 속. 그 누구도 일어나 돌아다니는 이가 없는 조용하고 먹먹한 도시의 풍경.
그 안개 저 너머에.
-……!
거대한 괴수의 그림자가 포효하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거리감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장소.
녀석을 보곤 헥토르가 눈을 크게 떴다.
“해, 해령궁주!”
시안이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헥토르에게 물었다.
“녀석이 해령궁주인가?”
“그림자밖에 안 보이긴 하지만, 실루엣이 비슷해.”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안개 속 괴수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게 해령궁주.
지난번 바다거인 아틀란타의 기억 속에서 보았을 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그때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하긴 그 정도 변신은 일도 아닐 테니까.’
마룡왕도 프시케도 모두 본체와는 별개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해령궁주 역시 당연히 할 수 있겠지.
그보다도.
“대놓고 강림하다니…….”
“여, 역시 본인이겠지? 환영이나 그런 게 아니라?”
“환영이라기엔 기운이 너무 짙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 짙은 안개는, 온전히 해령궁주의 기운으로만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물론 사도인 아이작이 오랜 준비를 거쳐 힘을 발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저렇게 그림자까지 보인 이상 본인이 강림했다 생각하는 쪽이 편하리라.
‘녀석의 목적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
아이작의 야망과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작은 제국의 영광을 위해 대륙 통일을 꿈꾸는 것이지만, 해령궁주의 목적은 대륙을 지배하는 것 그 자체.
놈에게 아이작과 제국은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수단에 불과하단 뜻이다.
‘그렇다면 그걸 위해 녀석이 할 일은…….’
시안이 녀석이 할 법한 행동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구어어어어.
-쿠아아아!
안개 너머에서, 전신이 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어느 한 쪽에서만 밀고 오는 것이 아니다. 도시의 모든 성문을 통해, 온 거리를 뒤덮으며 물의 병사들이 짓쳐 들어왔다.
‘정령인가?’
물의 정령으로 보이는 놈들의 행선지는, 단 한 곳.
황도의 중앙에 위치한 황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