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5화
시안의 말을 듣고 뽑혀 나오던 베르페드의 검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하.”
어처구니가 없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재밌는 농담도 할 줄 아는군.”
말과는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베르페드가 얘기했다.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랜 기간 칠흑마탑을 상대해온 그는 지옥의 악마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마룡왕.
그 거대한, 최후의 고룡은 다른 악마들이 비견할 수 없을 가장 강대한 존재였다.
소수의 이들은 그가 바로 마법의 시초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마도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것만이라면 어떻게 경시할 수 있겠으나 마룡왕은 심지어 그 육체적 능력 또한 최상위의 존재였다.
그의 비늘은 어지간한 오러로는 흠집도 낼 수 없고 거대한 몸체는 그 어떤 것도 압도한다. 거기다 자유자재로 날 수 있는 비행 능력까지.
베르페드가 알기로는 똑같은 대악마인 해령궁주나 간신히 그와 전투가 성립될 정도지, 그 외에는 그 누구도 마룡왕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 자신이라도 마룡왕을 이길 수 있다 자신하진 못했다.
그런 마룡왕을 시안이 쓰러뜨렸다고?
“물론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마룡왕과의 전투에선 귀마와 프시케가 많은 일을 해주었다. 둘 중 하나만 없더라도 그 싸움을 이길 수는 없었겠지.
심지어 그렇게 셋이 덤비고도 완전히 죽일 수 있던 것도 아니다.
만약 마룡왕이 패배선언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마지막까지 싸웠다면 승패는 정말 알 수 없었을 테지.
“…….”
베르페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안의 전신을 살폈다.
혼자가 아니라고 덧붙이긴 하였으나, 그게 시안의 말에 설득력을 올려준 것은 아니었다.
혼자든 둘이든, 아니, 부대 단위로 덤볐다고 하더라도 마룡왕은 쓰러뜨릴 수 없다.
그게 베르페드의 생각이었으니까.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마룡왕의 사도라는 황자의 말은 틀렸다는 것이냐?”
“예. 멋대로 오해하길래 그냥 내버려 뒀을 뿐입니다.”
“어째서?”
“오해를 풀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들었고…….”
시안이 말끝을 흐리며 베르페드를 보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그조차 마룡왕을 쓰러뜨렸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작 황자에게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
“황자가 방심했으면 했습니다.”
같은 편이라는 느낌을 주어 아이작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사실 이쪽이 주된 목적이다.
아이작은 본인이 말하길 스스로가 해령궁주의 사도라고 하였다.
그 말은 즉, 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란 뜻이었다.
‘해령궁주…… 그 이름이 유달리 눈에 많이 띈단 말이지.’
그가 겪은 온갖 나쁜 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 녀석의 이름이 나온다.
고대 시대 거인을 꼬드기고 지옥계의 문을 연 것도 녀석이고, 제국에게 붙어 전쟁을 일으킨 것도 녀석이다.
엘리아가 자신을 오해하고 공격한 것 역시 해령궁주가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
그가 지옥문을 열지 않았다면 마룡왕이 이 땅에 내려와 엘리아와 마주칠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런 녀석이 아이작 황자를 이용해 아직도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한다.
‘황자는 전쟁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이미 한차례 끝난 전쟁을 다시 한번 일으켜 보겠다니.
아이작은 마룡왕만 끌어들이면 가능할 거라 얘기하고, 실제로 마룡왕이 움직인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마룡왕을 어떻게 움직여.’
마지막으로 마룡왕과 만났던 이인 시안이 보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은거에 들어간 그를 어떻게 찾아낼 것이며, 무엇을 대가로 설득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설득해 봤자 마룡왕은 현재 육신이 없는 영혼 상태다.
정상적인 상태도 아닌 그런 몸을 끌고 얻을 것 없는 지상에 뭐하러 내려오겠는가.
“…….”
그런 시안의 눈을 베르페드가 바라보았다. 그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이.
그러다가 갑자기.
휙!
검을 뽑아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시안의 대응은 빨랐다.
-콰앙!
시안의 검과 베르페드의 검이 부딪혔다. 정확히는 검이 아닌, 검을 감싸고 있는 오러와 오러의 부딪힘.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둘이 서있는 바닥이 깨지고 가라앉았다.
자신의 검을 막은 시안의 흑검을 보며, 베르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확실히…….’
단 한 번의 부딪힘이었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흑마법사들처럼 단순히 힘을 받았을 뿐인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정말로 시안의 말은 사실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베르페드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후작님!”
그때, 둘 사이로 염노가 끼어 들어왔다.
베르페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분노의 기색이 느껴지는 베르페드의 목소리. 그러나 염노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얘기했다.
“도련님의 말도 들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라는 말이냐?”
“꼭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허공에서 염노와 베르페드의 눈이 부딪혔다.
그러기를 잠시, 베르페드가 콧방귀를 뀌며 검을 회수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책임지고 감시해라. 만약 모두 거짓이었고 녀석이 마룡왕의 사도가 맞다면, 네 손으로 녀석의 목을 쳐서 가져오도록.”
“……예.”
시안의 말을 반신반의 정도는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염노를 향한 신뢰가 깊기 때문일까.
베르페드는 의외로 쉽게 검을 거두며 물러났다.
떠나기 전, 그가 슬쩍 염노를 돌아보았다.
“너무 정을 붙였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떠나갔다.
남아 있는 염노가 가슴에 손을 짚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염노.”
시안의 말에 그가 시안을 돌아보았다. 시안, 그리고 옆에 있는 에르제를 보며 그가 얘기했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평소와 같은 웃는 표정으로.
* * *
“염노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릴 때부터 시안 도련님을 모셔온 후작가의 사용인입니다.”
“에, 에르제라고 해요. 시안이랑은 아카데미에서 반 친구였는데…….”
시안이 체크인을 해두었던 여관의 1층. 그곳 식당에서 네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염노와 에르제, 그리고 시안과 헥토르였다.
“뭐가 이렇게 늘었냐.”
“어쩌다 보니.”
헥토르가 술을 홀짝이며 투덜거렸다.
에르제와 담소를 나누던 염노가 문득 헥토르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온화한 염노답지 않게 헥토르를 보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염노. 내 편이니까.”
“쳇.”
시안이 헥토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얘기했다. 헥토르가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까.”
시안이 그리 얘기하자 염노도 하는 수 없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헥토르에 대한 경계의 빛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염노는 헥토르가 뇌력천주라는 이름의 악마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천둥마탑에서 말썽을 부렸던 흑마법사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뿐.
“그나저나,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동쪽에서 뵈었던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많이 지나긴 했지.”
“정말 많이 자라셨군요.”
염노가 감개가 무량한 표정으로 시안을 보았다.
확실히 시안은 이전보다 덩치가 더 커지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과거 아직 어린티가 많이 남아 있던 때에 비해, 지금은 훨씬 더 어른스러운 풍모가 나왔다.
‘그만큼 고생을 하셨단 얘기겠지.’
염노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 자란 시안을 보는 것은 확실히 보람차고 뭉클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시안이 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에버웨일에서 제국의 병력으로 일하던 거인을 베고 도주해, 거인들의 무덤과 빙하백령, 자카르타를 거쳐 제국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간단한 그간의 일은 이미 모두 얘기한 후였다.
“그나저나 사실입니까? 마룡왕을 쓰러뜨렸다는 것이.”
“응. 진짜야.”
태연하게 끄덕이는 시안을 보며 염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을 홀짝이며 뚱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헥토르가 그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에르제는, 사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냥 분위기로 보아 시안이 대단한 녀석을 쓰러뜨렸다는 것만 알아듣고는 제가 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싱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마룡왕이 강림했다면 그만한 파장이 있었을 텐데,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지옥계에 갔다 왔거든.”
“……!”
염노라면 어느 정도는 얘기해도 문제없다.
그런 생각에 시안이 조금 더 진실을 풀었다.
거인들의 무덤에서 봉인되어 있던 거인왕을 풀었고, 그게 요정여왕에게 들켜 오히려 자신이 봉인을 당하게 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프시케의 도움을 받아 지옥계로 도주했다는 얘기.
“프시케요?”
“그쪽에선 겨울의 뱀이라고 불리는 모양인데, 어쩌다 보니 알게 돼서.”
시안의 말에 염노의 눈이 커져왔다.
프시케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겨울의 뱀은 알고 있다.
마룡왕이나 해령궁주와 같은 대악마에 속하는 악마가 아니던가?
그런 악마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시안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염노는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얘기를 안 해준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런 것이겠지. 그리고 빙하백령에서의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도련님의 동급생 중에 유 가문의 아이가 있지 않았던가?’
증거 하나 없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꽤나 진실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시안이 계속해서 지옥계에서의 일을 얘기했다.
귀마라는 노인을 만나 검을 단련받은 것. 그곳에 파멜라 드레이크가 나타나 싸움이 일어난 것.
그리고 파멜라가, 마룡왕을 불러들인 것.
귀마와 프시케의 도움으로 마룡왕을 쓰러뜨리고 그 힘을 일부 흡수했다는 것까지 간략히 얘기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혹시 파멜라 드레이크는……?”
“죽었어.”
“허.”
염노가 과거 영지를 찾아왔던 파멜라의 동생 샤밀라를 떠올렸다.
화사한 미소를 가진 무척 귀여운 아이였는데.
그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초지종은 알았습니다. 정말로 도련님은 마룡왕과 싸우셨던 거군요.”
“그렇다니까.”
시안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믿기 힘든 것들뿐이었지만, 염노는 믿었다.
시안이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시안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느껴지는 시안의 존재감.
이 짧은 기간에 성장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이다.
어릴 때부터 시안을 봐왔던 염노는 이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을 겪을 때는, 언제나 그만한 시련이 찾아왔을 때이다.
“알겠습니다. 후작님께는 제가 잘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믿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 잘 부탁해.”
“그래서, 도련님은 앞으로 어쩌실 예정이십니까?”
“앞으로?”
“후작님께 잘 말씀드리면 멋대로 도망갔던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마룡왕의 사도라는 오해는 풀면 되는 것이구요. 다시 예전처럼 아그리드 가의 자제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염노가 그렇게 얘기했다.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른다. 오늘 본 베르페드의 태도를 보면, 마룡왕의 사도가 아니라는 점만 증명한다면 별다른 처벌은 없을 것 같았다.
에버웨일에서 멋대로 도망간 건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니. 난 안 돌아가, 염노.”
시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염노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를 보며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아니, 애초부터 후작가의 그림자로만 살 생각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