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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74화 (17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4화

베르페드가 눈을 찡그리며 아이작을 보았다. 그 눈에는 의심의 빛이 가득했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농담이 아니다만?”

베르페드의 말에 아이작이 농이 아니라 단언했다. 그러곤 에버웨일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얘기했다.

빙하백령의 여왕이 그를 보고 마룡왕의 사도라 발작했고 정화교단의 성녀가 그렇지 않다고 증언했던.

“하지만 내 눈에는 훤히 보이지. 녀석은 확실히 마룡왕의 기운을 품고 있었어. 성녀를 어떻게 속여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레흐를 포함한 천도맹의 사람들은 성녀의 감별 능력을 믿고 있지만, 아이작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그만해도 성녀의 눈으로부터 해령궁주의 사도란 사실을 잘 숨겼지 않았던가.

마룡왕이나 해령궁주쯤 되는 대악마라면 자신의 사도를 정화교단에서 보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

가만히 그걸 경청하는 베르페드. 그에게 아이작이 덧붙여 얘기했다.

“참고로 빙하백령의 여왕은 실종되었다네.”

“……그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여왕이 어째서 실종되었는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실종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베르페드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큰일이 벌어졌는데 그에게 보고가 올라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녀석이 마룡왕의 사도고 빙하백령의 여왕과 대립했다? 그 결과가 여왕의 실종이고?’

만약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시안은 요정여왕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된다.

‘그 정도로 강했던가.’

베르페드가 예전에 보았던 시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보기엔 분명, 또래들보다는 훨씬 강했지만, 여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고작 몇 년 안에 그 정도로 강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빙하백령의 요정여왕은, 그 경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없었지만, 하이마스터에 버금갈 정도의 대마도사라 알려져 있었다.

‘단기간에 강해지는 방법.’

그 방법이라면 베르페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로 지옥의 악마와 계약하여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박멸해도 흑마법사 놈들이 아득바득 올라오는 이유였다.

대가 없이 얻는 힘이란 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상상하지 못할 이는 없을 테니까.

그중에서도 마룡왕쯤 되는 이의 사도가 된다면, 여왕을 쓰러뜨릴 만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앞뒤는 맞는군.’

앞뒤는 맞다. 생각해 보면 과거 마룡왕의 사도라던 파멜라 드레이크를 색출해 낸 것도 시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안이 아카데미에 있을 시절에도, 마룡왕이 마물을 풀어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일도 있었다.

시안과 마룡왕의 접점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지난 전쟁에서 마룡왕이 코빼기도 안 비치지 않았던가.”

“…….”

“그래서 에버웨일에서 시안을 발견했을 땐 정말 놀랐지. 동시에 생각했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아이작이 자랑스레 하는 얘기를 들으며 베르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마냥 눈을 빛내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어떤가 후작. 이렇게 된 거 아들과 함께 나를 섬기지 않을 텐가. 시안을 통해 마룡왕을 끌어들이고, 자네 또한 나를 받쳐준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 없을 거야.”

그것이 아이작이, 베르페드가 흑마법사를 증오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였다.

황도까지 시안과 함께하긴 했지만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다.

베르페드를 설득한다면 시안도 함께 굴러들어 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작이었다.

“……역시 못 참겠군.”

그러자, 싱글벙글한 아이작을 보며 베르페드가 검을 잡았다.

서걱!

일순간에, 자비도 주저함도 없이 검을 휘두른다. 검왕이라 불리는 하이마스터의 검이 공간을 가르며, 아이작의 몸도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찰팍.

반으로 갈라진 아이작의 상체가 바닥에 떨어지나 싶더니, 한 움큼의 물로 변해 퍼져 나갔다.

남아 있던 절반의 하체 역시 물이 되어 그대로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쯧.”

베르페드가 혀를 찼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던 것처럼.

처음부터 황자 본인이 찾아온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황자였기에 나름의 예를 갖추려 하였지만.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악마의 힘을 쓰면서 입을 터는 꼴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찰팍.

베르페드가 유적을 떠나갔다. 그의 발이 방금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자비 없이 밟으며 지나갔다.

잠시 후.

웅덩이가 솟아오르더니 다시금 인간의 형체를 만들었다.

아까와 똑같은 아이작의 모습.

“이런, 이런. 황실의 권위가 이리 떨어졌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아이작이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베르페드가 남긴 참상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폭삭 무너져 내린 지하유적과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수십의 흑마법사들.

그들이 흘린 피가 호수가 되어 유적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작이 웃으면서 다가가, 피 웅덩이 속에 손을 넣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남아 있어서 다행이야.”

이 칠흑마탑에서 아이작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

그건 유적도 아니고 기타 시설도 아니고, 하물며 흑마법사 동료들도 아니다.

이곳에 이렇게 호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피.

아이작의 손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피 웅덩이 속에 퍼지더니, 이내 그곳에서 결정을 이루며 입체적인 마법진을 그려갔다.

이윽고 그 마법진은, 두어 번 빛을 내며 깜빡이더니 가라앉아갔다.

“후후.”

눈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며, 괴로운 표정으로 죽어간 흑마법사의 시체들.

그들 사이에서 오로지 아이작만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헬레네가 떠나고 시안의 옆에는 에르제가 남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나 풀라는 헬레네의 배려였다.

두 사람이 여관 바깥으로 식사를 하러 나왔다.

“총장님을 만났다고?”

“응. 다시 아카데미를 열겠다고 하셨어.”

“언제?”

“글쎄. 정확한 시기는 못 들었지만 아마 그렇게 늦진 않을 거야.”

시안이 헤어질 때의 제레흐를 떠올리며 얘기했다.

그때 보였던 그의 의욕을 생각해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건물이나 그런 것은 모두 남아 있고, 사람만 다시 모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면 다시 복학할 거야?”

“생각해 보겠다고 얘기는 해놨는데. 너는? 생각 있어?”

“으음…… 근데 이미 황녀님 곁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고…….”

에르제로서는 그다지 갈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이유 자체가 더 좋은 인맥과 더 좋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황녀의 호위라고 하는, 인맥이든 직업적으로든 최상급의 일을 하고 있는데 굳이 아카데미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척을 하며, 에르제가 시안을 흘깃 곁눈질했다.

돌아갈 이유가 굳이 없긴 했지만, 그녀는 시안이 간다고 하면 같이 갈 생각이었다.

이미 그 생각 외에는 머리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나는 일단 집의 일부터 해결해야 하니.’

그런 줄 꿈에도 알지 못하는 시안은 스스로의 일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작을 따라 제국에 들어온 이유.

언제까지고 도망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아그리드 후작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게 마무리되고 나서야 그다음 행보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후작이 황도에 와 있다고.’

헬레네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부터 와있다고 한다.

황도에 온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황실에 얼굴을 비추러 온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곳 근처의 칠흑마탑을 쳐부수러 온 것이라고.

전쟁 중에는 굳이 황실을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영지에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지금 칠흑마탑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황자와는 달리 황녀는 칠흑마탑에 부정적인 것 같군.’

베르페드의 근황을 얘기하며 헬레네는 칠흑마탑에 공공연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녀는 화염마탑에서 수학한 몸이다. 마탑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들이, 고통 없이 달콤한 힘만을 탐하는 흑마법사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는 익히 유명한 바였다.

‘황도에 있다니 마침 잘 됐어.’

뭐 어쨌든, 베르페드 아그리드가 황도에 있다니 마침 다행이었다.

아그리드 영지에 쳐들어가 대뜸 담판을 짓는 것보단 이곳 황도 같은 곳에서 담판을 짓는 것이 보다 나을 테니까.

“그렇지. 크루거 가에도 서신을 보

내볼까? 루스카야랑 가까우니까 금방 올 수 있을 거야.”

“알렌?”

“응. 알렌도 너 보고 싶다고 그랬었거든.”

시안이 그 푸른 머리의 소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시끄러운 작은 정령도.

그가 피식 웃었다.

“됐어. 그쪽에도 일이 있을 텐데 괜히 귀찮을라.”

“그래도 부르면 올 거 같은데…….”

“일이 다 끝나면 내가 찾아가 볼게.”

황도에서 베르페드 아그리드와 만나서.

싸움을 하든 뭘 하든 제대로 담판을 짓고 나서 찾아가 보면 되리라.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자유의 몸이 된 기념으로 방문하면 될 것이고, 잘 풀리지 않는다면.

‘도망가는 형태가 될지도.’

추적을 피해 잠시 몸을 의탁하는 느낌이 될 수도 있다. 크루거 백작도 천도맹의 사람이라 하니 홀대받지는 않겠지.

‘물론 그렇게 되지 않게 잘해야 할 테지만.’

시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은 이 황도다. 이 황도에서 자신의 모든 일이 결정되리라.

“그래서 그때…… 응?”

조잘조잘 얘기하는 에르제의 말을 들으며 대로변을 걷던 중.

시안이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에르제가 의아해하며 그를 보았지만, 시안의 시선은 앞쪽에 못 박혀 있었다.

“시안? 왜 그래?”

양옆으로 모르는 시민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그 사이에서 시안이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후작님이 오셨어.”

“후작님? 아! 시, 시안네 아버지?”

왜인지 자기가 긴장하는 에르제를 뒤로 하며, 시안이 저 앞에 서 있는 베르페드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쪽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염노의 모습도.

‘건강해 보이네, 염노.’

그에 살짝 안도하며, 그가 베르페드를 향해 걸었다.

에르제가 급히 옷매무새를 점검하곤 시안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베르페드는 그녀 쪽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 명. 시안뿐이었다.

“잘도 돌아왔구나.”

“그럴 만한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르페드가 차가운 눈으로 시안을 바라본다.

기르던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눈초리가 평소보다도 배는 더 차가웠다.

그러나 그걸 받고 있는 시안은 태연하기만 했다.

“용서는?”

“면목이 없긴 하군요.”

죄송하다가 아닌 면목이 없다.

미미한 차이였지만 그 둘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건 명확히 후작가와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아니,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베르페드는 시안의 말에 전혀 화를 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탐색?’

분노라기보단, 자신을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가.

잠시 고민하던 시안은,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황자한테 들으셨습니까?”

황자에게 들었든 아니면 에버웨일 쪽에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 것이든.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전자가 정답이었던 듯하다.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살기까지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시안이 웃었다.

그가 웃자 베르페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햅니다.”

“오해? 그럼 그건 뭐지?”

턱도 없는 소리라는 듯 베르페드가 턱짓으로 시안의 손목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라비의 정령각인. 아마 이곳에서 마룡왕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시안은 마룡왕의 기운을 모아 손바닥에서 밤의 오러를 피어 올렸다.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기운에 베르페드의 검이 반쯤 뽑혀 나왔다.

황자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마룡왕을 쓰러뜨리고 강탈한 힘입니다.”

시안의 말에 반쯤 뽑히던 검이 우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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