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3화
방금까지만 해도 당장에라도 죽일 듯 싸웠던 시안과 로데릭의 검이 멈췄다.
둘 모두 갑작스러운 난입자의 정체에 놀라고 있었다.
“황녀님? 여긴 어떻게…….”
“검부터 내려놓는 게 어떻습니까, 장군.”
“……이거 실례를.”
로데릭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시안을 한 번 보고는, 검을 회수해 검집에 넣었다.
그걸 보곤 시안의 흑검도 기운으로 풀려나와 정령각인에 수납되었다.
안 그래도 둘의 전투는 바깥에 알리기 힘든 것이었다. 황녀씩이나 되는 이가 나타났는데 지속할 수는 없었다.
시안이 힐긋 헬레네의 뒤쪽을 보았다.
그곳엔 헬레네의 호위로 온 기사들이 몇 있었고, 그 가장 뒤쪽에 에르제가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이 마주치니 에르제가 살짝 손을 흔들어왔다.
헬레네가 찾아온 것은 이곳이 황도인 만큼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에르제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의문을 풀기보단, 일단 헬레네를 응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오랜만이군, 시안 아그리드. 많이 자랐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님은 그때 그대로시군요.”
“후후, 칭찬으로 들으마.”
아닌 게 아니라 헬레네의 모습은 과거 학기 말 무도회 때 본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라면 오히려 방금 보았던 불꽃 쪽.
그때 얼핏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불의 발출이 자유롭고 강력했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재미난 놀이를 하고 있구나. 나도 끼워주겠나?”
황녀의 눈꼬리는 웃고 있는 그대로였지만, 그 속는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눈을 마주하곤, 로데릭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만 놀이는 끝났습니다. 아주 시의적절하게 오신 덕에요.”
“뭐야, 내가 방해했다 이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로데릭이 아쉬운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전투가 끝나 아쉽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 목을 날리지 못해 아쉽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시안이 찡그린 눈으로 로데릭을 마주 보았고.
“시안 아그리드를 찾아오신 듯한데, 이만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로데릭은 헬레네에게 예를 갖춘 인사를 하곤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스쳐 지나가 방을 나설 때까지, 헬레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이더냐?”
“그것이…….”
로데릭이 떠난 방 안에서 그녀가 시안에게 물었지만, 시안도 대답이 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로데릭이 갑자기 찾아와 죽이려고 했다.
그 말을 한다면 당연히 질문이 되돌아올 것이다.
대체 왜 죽이려 했냐는.
‘내가 마룡왕의 사도라는 황자의 착각은 아직 황자랑 로데릭만 알고 있으니.’
아이작 본인에게 들은 얘기였다. 자기는 비밀로 할 테니까 시안 너도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다나.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기에 시안은 떠벌리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나저나 어인 일로 직접 행차를?”
“어허, 찾아온 손님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고 용건부터 묻는 것이냐?”
시안이 깜빡했다는 듯이 사죄를 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테이블이니 침대니 수납장이니 하는 가구들은 이미 모조리 박살 난 후였다.
여관 벽은 로데릭이 오러로 보호한 덕에 크게 긁히거나 갈라진 정도로 끝이 났지만, 그 이외의 것은 처참한 잔해가 되어 있었다.
도저히 손님을 받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헬레네도 주변을 보고는 그 사실을 깨닫곤,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자리를 옮기지.”
* * *
헬레네에게 이끌려 시안이 이동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작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피해 있던 황궁 안이었다.
정확히는 3황녀인 헬레네가 기거하고 있는 별궁.
그곳의 정원에 헬레네와 시안, 그리고 에르제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야, 시안!”
에르제가 활기찬 얼굴로 시안에게 얘기했다. 두근두근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안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왜 그녀가 헬레네와 함께 있는 것인지.
분명 마지막에 보았을 땐 알렌과 함께 크루거 가에 가서 잠시 신세를 진다고 그랬었는데.
“으음, 뭐 거창한 일은 아닌데.”
에르제가 잠시 헤어진 뒤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알렌과 함께 제국으로 복귀해서 크루거 가에 도착한 에르제.
그곳에서 그녀는 손님으로 편하게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로 알렌은 알티마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수련에 들어갔고, 에르제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매일 같이 크루거 영지 주변의 마물을 토벌하고 다니거나 크루거의 기사들과 대련을 한다던가, 그렇게 단련으로 보내길 수개월.
갑자기 황도에서 헬레네가 찾아왔다고 한다.
“황녀님이?”
“음, 크루거 백작을 만나러 갔었지.”
옆에서 차만 마시며 듣고 있던 헬레네가 한마디 보태었다.
그 뒤는 별것 없었다. 수련을 하던 에르제의 모습이 헬레네의 눈에 띄었고, 마침 호위가 더 필요하던 그녀가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했다고.
‘스카우트라니.’
사실 거창한 일이 아니라고 할 건 아니었다.
에르제는 귀족도 아니고 별다른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평민이다.
그런 그녀가 수련을 하는 모습만으로 황녀의 호위대로 들어갔단 것이니까.
‘에르제의 능력이라면 유니크하니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경지는 둘째 치고 그녀의 능력은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뛰어난 은신술을 가진 호위는 귀한 인재이니 그 자리에서 바로 제의를 건넨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랬군.”
“시안은 어떻게 지냈어?”
당연한 이야기의 흐름으로 이번엔 시안이 근황을 얘기할 차례가 되었다.
다만 그의 근황은 나불나불 얘기하기엔 조금 좋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다.
“황녀님의 용건을 먼저 듣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기다리고 계시는데.”
이미 에르제의 근황을 다 들어놓고 뻔뻔하게 말을 돌리는 시안이었으나, 헬레네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말거라. 내 용건이 바로 그것이니.”
“제 근황 말입니까?”
“여러 가지로 들려온 게 많아서 말이지. 그대 행보가 꽤나 흥미롭던데…….”
끄응. 시안이 신음을 삼켰다.
적당히 얘기할 수밖에 없나.
“거인들의 무덤에서 알렌과 에르제와 헤어진 후에, 빙하백령으로 향했습니다.”
이내 시안이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럴 때를 대비해 적당히 둘러댈 이야기는 미리 만들어놓았다.
들키면 곤란한 이야기, 특히 엘리아 여왕과의 일은 최대한 각색을 해가며 그가 얘기를 풀었다.
빙하백령에서 곤욕을 치르고 은거해 있다가, 자카르타 쪽에서 겐 아슬라와 만나 에버웨일로 올라온 일까지.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구나.”
“이렇게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라 즐겁더군요.”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사실 즐거운 일 따위는 없던,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일단 겉으로는 이렇게 얘기했다.
결국 시안의 행보는 외부에서 보기엔, 제국의 군역을 피해 가문에서 가출하여 외국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이나 즐긴 것이었지만.
‘황녀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것 같군.’
다행히도 헬레네도 시안을 벌하는 것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도 훨씬 커다란 굵직한 일이 많으니 일단 넘어가는 것이겠지.
“란이랑 유설이랑도 만났어?”
“응. 어떻게 다들 잘 지내고 있더라고.”
“흐응.”
에르제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늘어졌지만, 헬레네의 반응을 살피느라 바쁜 시안은 그것까지 눈치채진 못하였다.
제삼자인 헬레네만이 옆에서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을 뿐.
“참으로 놀랍더군. 오래전에 도망친 후작가 장남의 이름이 오라버니의 일행 리스트에서 튀어나올 땐 말이야.”
그걸 보고 찾아왔던 건가.
여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여관들에 사람을 보내어 외지인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수색하면 끝나는 일이니까.
‘아그리드 후작.’
그 이름에 시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헬레네를 떠보기 위해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아버님의 설득은 무사히 성공했습니까?”
과거 헬레네는 시안을 통해 아그리드 후작을 제 진영으로 영입하려 하였다.
그걸 기억해 내 묻는 것이었지만, 사실 시안이 알고 싶은 건 아그리드 후작의 근황 그 자체였다.
“2년쯤 집 밖으로 쏘다니다 보니 신경이 쓰이긴 하나 보구나.”
“예, 뭐…….”
떨떠름한 시안의 목소리에 헬레네가 한차례 웃더니, 대답해 주었다.
“가출한 네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모르겠군. 후작은 지금 황도에 와 있단다.”
시안이 눈을 찡그렸다.
결단코 나쁜 소식이었다.
* * *
두두두두두-
지하 유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그 공터 곳곳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단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말이다.
“…….”
이 참극을 만든 장본인, 베르페드 아그리드가 검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었다.
그러며 유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황도 인근에 있던 칠흑마탑의 지부.
건물로 쓰인 유적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마법진이나 장치들, 그리고 이곳에 있던 흑마법사들까지.
이곳 지부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흙 속에 파묻혀 가고 있었다.
-또각.
그때 입구 쪽에서 태연스럽게 걸어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베르페드가 몸을 돌려 그쪽을 보았다.
“협정 때문에 에버웨일에 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나지막한 베르페드의 목소리에 찾아온 이, 아이작 황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왔네. 그나저나 잘도 해주었군.”
아이작이 한마디 툭 내뱉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도 근방에 있는 칠흑마탑의 지부. 이곳은 아이작에게 있어서도 연이 있는 장소였다.
그가 해령궁주와 계약을 치른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그런 장소를 하루아침에 모조리 박살 내버리다니.
아쉬워하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는 아이작을 보며, 베르페드가 콧잔등을 씰룩였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요.”
“경한텐 이미 다 들켰는데 뭐하러 숨기고 연기하고 그러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겠나.”
태연자약한 아이작의 모습을 보며 검을 잡은 베르페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작 황자가 해령궁주의 사도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사태파악을 위해 황궁에 들렀던 그 날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사특한 기운에 몸을 감싸고 있던 아이작의 모습을 말이다.
당장에라도 그 목을 치고 싶은 베르페드였으나, 아쉽게도 제국의 1황자라는 신분은 그조차 움직이기 쉽지 않게 만들었다.
더욱이 아이작 본인이 약한 것도 아니다.
대악마의 사도라는 이름값을 하는지, 간단히 죽일 실력은 아니었다.
“여전히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는군.”
“…….”
죽일 듯 노려보는 베르페드의 눈길을 받아 흘리며 아이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곤, 재밌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웃더니 얘기했다.
“알고 있나? 자네 아들이 지금 황도에 있다네.”
“아들?”
“시안 말일세. 시안 아그리드.”
“아아…… 그거 말이군요.”
그거? 묘한 말투에 아이작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사소한 일이기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가 하고픈 얘기는 이다음이었으니까.
“에버웨일에서 만나서 말이지. 나랑 같이 황도에 들어왔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어딜 쏘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요. 이참에 따끔히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베르페드를 보며 아이작이 웃었다.
“마룡왕의 사도가 되어 있더군.”
그 순간, 검을 잡고 있던 베르페드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