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2화
콰앙!
로데릭의 대검이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그 검을 받아 흘렸다.
빗겨나간 대검이 여관의 테이블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절반으로 가르며 떨어졌다.
“대장군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놓고 사람을 죽이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너에게는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과거가 있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로데릭이 화염거인을 데리고 에버웨일을 점거했을 때 반요정들과 수인들을 풀어준 그걸 말하는 건가.
“황자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 얘기는 이미 끝난 후였다.
그때의 일로 반역죄라도 씌울 낌새였으면 시안이 아이작과 함께 황도까지 올 리가 없었다.
“괜찮다. 황자님은 내가 설득할 테니.”
그러나 로데릭은 꿋꿋하기만 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를 말을 하고는, 가로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푸른 오러가 씌인 대검이 시안의 허리를 갈라버릴 듯 쇄도했다.
채 흘려 넘길 수 없을 속도와 각도였다.
캉-!
시안이 검을 세로로 들어 로데릭의 검을 막았다.
로데릭의 거력과 대검의 무게에서 오는 힘이 고스란히 시안의 검과 손목에 쏠렸다.
‘큭.’
무겁다.
최근 받아본 그 어떤 공격보다 묵직한 일격이었다.
흑검이 제멋대로 떨려오며 시안의 손 역시 부르르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데릭이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저 무거워 보이는 검을 자유자재로, 제 몸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것이 과연 하이마스터의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시안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인지.
“마룡왕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엘리아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물어봤지만.
“딱히.”
그렇지 않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럼 뭐 때문인데?
시안의 의문을 읽었는지, 로데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이유라도 알고 가라는 듯이.
“황자님은 너를 영입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려 하시지.”
“그랬죠.”
“이전 전쟁은 사실상 거인을 중심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도 따랐지만, 다음은 그렇지 않아. 거인이라는 방패막이가 없는 지금, 전쟁에서 소모되는 것은 제국의 장병들이다.”
요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전과 다르게 막대한 병력이 소모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제국의 장병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강군이지만.”
로데릭이 시안을 쏘아보며 얘기했다.
“자네의 존재가 제국의 영광을 보장해줄 것 같진 않군.”
“…….”
이유는 알았다.
아이작이 시안을 보고 다시금 전쟁을 꿈꾸기 시작했으니, 그걸 막기 위해 시안을 죽이겠다는 얘기다.
일단 처리만 하면 뒷수습은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대충 시안이 먼저 뒤통수를 쳤다는 식으로 거짓을 고할 수도 있고, 혹은 뒤에 가서 모든 사실을 얘기하곤 처벌을 받겠다 나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이작의 헛된 야망을 꺾어놓는다는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다.
“황자의 제안은 거절했을 텐데요.”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거절이죠.”
시안이 사뭇 억울하다는 듯이 얘기했으나.
“흥, 어느 쪽이든 다를 건 없어. 네가 이 황도에 희희낙락 들어온 것만으로 황자님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콰앙!
그리 얘기하며 로데릭이 검을 휘둘렀다.
그 일격에 여관방의 모든 가구가 모조리 박살 났다.
그러나, 이 정도 소란이 일고 있음에도 방으로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소리를 막아뒀군요.”
로데릭이 마나의 막을 펼쳐 방에서 새어 나가는 소리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들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겠지.
에버웨일에서의 일로 반역죄를 씌우겠다 뭐다 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들키지 않는 쪽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장 깔끔한 건 아무도 모르게 죽이고 가는 거니까. 더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을 거다. 네가 이 방을 나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추가로 시안이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여러모로 의도와 목적이 들어간 마나막이었지만.
“덕분에 저도 더 편해졌습니다.”
“뭐?”
시안에게도 더욱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도에서 제국의 대장군을 죽이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 전투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건 시안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시안의 도발에 로데릭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이가 없겠지.
대륙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인인 그가,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뒷배만 믿고 있는 놈이 입만 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한마디 해주려던 로데릭이, 다음 순간 시안을 보곤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만년빙정.
그 검의 냉기와 함께, 밤의 오러가 피어올라 방 안을 가득 뒤덮기 시작했다.
* * *
시안과 하이마스터인 로데릭과의 전투. 그러나 싸움은 의외로, 시안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밤의 오러가 공간을 모두 점하며,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에서 라비가 쏘는 암우(暗雨)가 지속적으로 로데릭을 괴롭혔다.
오히려 하이마스터인 그가 떨어지는 검을 피해 시안의 공간을 공략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이게 마룡왕의 힘인가?’
로데릭은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시안의 힘이고 시안의 오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시안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
그렇기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압박감이, 마룡왕이 것이라 생각했다.
캉!
천장에서 떨어지는 검을 쳐내며 그가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대검이 시안의 머리를 으깨버리기 위해 쏘아진다.
시안이 흑검을 쳐올려 대검의 궤도를 틀어버리곤, 그대로 로데릭의 옆구리를 노렸다.
“흡!”
로데릭은 피하지 않았다. 캉! 숨을 들이쉼과 함께 강철과도 같은 강도로 변한 그의 오러가 시안의 검을 막았다.
그렇게 오러만으로 흑검을 막은 그가 대검을 올려쳤다.
카앙-!
“큭.”
대검을 받아낸 시안의 몸이 살짝 허공에 떴다. 로데릭의 힘이 그의 무게를 띄워버린 것이다.
발이 공중에서 벗어나자 로데릭이 눈을 빛내며 검을 내질렀다.
허공에서 이 검을 피해낼 방법은 없을 터.
팡!
그러나 시안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러의 발판을 만들어 그대로 로데릭의 뒤로 돈 것이다.
사라진 시안의 모습에 로데릭이 잠깐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마룡왕의 마법을 쓴 것인가 생각이 들었기에.
카앙! 캉! 캉!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뒤로 돌아 시안의 검을 받아냈다.
시안의 검이, 환영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사방에서 그를 덮쳤지만, 로데릭은 두어 번 대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검격을 쳐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검을 내지르며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귀마에 비해서 느리고 기교도 떨어지지만.’
그 대신, 더욱 단단하고 묵직하다.
어느 쪽이 더욱 우위고 그런 것을 정할 수준이 아니다. 양쪽 다 검에 있어서는 끝을 본 경지였으니.
콰앙!
그때, 로데릭의 검에 시안이 쭈욱 밀려났다.
얼얼한 손바닥의 느낌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나랑 비교하면.’
기교는 얼추 비슷하거나 귀마에게 배운 자신이 조금 더 위다.
하지만, 힘과 무게에서 많이 뒤처진다.
본래라면, 순수한 검 실력으로만 본다면 상대가 두 수는 더 앞서 있다.
두 수 차이는 그 어떤 운적 요소가 작용해도 결코 메울 수 없는 차이였다.
하지만.
‘마나의 양만큼은 내가 위다.’
수많은 악마들에게서 흡수하여 녹여낸 힘. 그에 더해 마룡왕의 육신에서 뽑아낸 힘과 프시케에게 건네받은 힘까지.
아무리 로데릭이 수십 년 동안 마나를 쌓아왔다고 해도,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나의, 오러의 단순한 양만큼은 시안이 앞서는 상황.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 승기를 잡아야 한다.
시안의 검에서 오러가 길게 뻗어 나왔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시린 듯 날카로운 검격이 로데릭에게 쇄도했다.
빙정이 자아내는 검로를 보며 로데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대검에 피어 올린 오러를 더욱 키우고는 크게 올려쳤다.
쾅!
시안이 쏘아 보낸 검기가 사라지며 로데릭의 오러 역시 깎여 나간다.
시안이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검기를 쏘아 보냈다.
쾅! 쾅! 쾅!
서로의 오러가 깎이고 깎여 나간다.
어느새 전투의 양상은 소모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좋지 않군.’
로데릭이 눈을 찌푸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시안의 오러가 자신보다 많다는 것을.
‘저 나이에 어디서 저 많은 마나를 끌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십중팔구 마룡왕에게 빌린 것이겠지.
그렇게 납득하며 로데릭이 생각을 이어갔다.
이대로는 좋지 않다. 소모전을 계속하면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과연 큰소리칠 만하군.’
그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감 넘치는 시안의 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보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안 아그리드는, 확실히 자신과 겨루는 것이 가능한 수준의 경지였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마나의 양만큼은 인정하는 바이다만, 검술 실력만큼은 아직 자신이 한 수 위다.
캉!
검기 하나를 쳐내고, 그가 곧바로 자세를 낮추었다.
시안이 스스로 우위에 있는 마나량으로 승부를 보려 한 것처럼, 로데릭은 검술로 승부를 보려 하였다.
[ 대룡격(大龍格) ]
그의 발이 크게 바닥을 박차곤, 그대로 시안에게 쇄도했다.
한쪽 어깨를 전방에 두곤 검을 뒤로 당긴 자세.
이내 곧바로 시안이 거리 안에 들어왔고, 그가 검을 위로 올려쳤다.
푸른 오러가, 마치 용과 같이 그의 대검을 휘둘러 감싸고 있었다.
“…….”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시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로데릭의 쪽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파지지직!
로데릭의 푸른 용을 향해 검은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둘의 눈이 마주치고, 흑검과 대검이 서로 맞물리려던 그때.
-콰앙!
검이 맞닿기 직전, 그 사이에서 폭발이 일었다.
그것은 둘의 전투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만큼 작은 폭발 역시 아니었다.
쿠웅!
시안의 흑검이 튕겨 올랐고 로데릭의 대검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
“…….”
시안과 로데릭이 눈을 찌푸리더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여관방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방금의 폭발을 일으킨 불청객이 와 있었다.
“남의 영업장에서 칼부림이나 하다니, 대장군이란 이름이 울겠습니다.”
특징적인 붉은 머리와 여자치곤 커다란 키.
“시안, 오랜만이구나.”
소메르 제국의 제3황녀 헬레네 폰 비스마르크.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녀가 시안의 방에 찾아왔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에 시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찾아온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으니.
“시안!”
헬레네의 뒤쪽 그림자에서,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기척 하나 없이 에르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