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9화
유설이 복잡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단순히 사건이 터졌을 때 계속 기절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알 수 없는 기억과 지식들.
미처 정리되어 있지 않은 그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녀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 기억 속에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극히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전혀 모르는 인물과 지식들이 범람하며 그녀의 머리에 찌르는 듯한 두통을 안겨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결코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
“설아!”
그때, 프시케가 깨어난 유설에게 달려들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유설이 그녀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미간의 주름이 잠시 풀리는 유설이었다.
“프시케, 오랜만이네.”
“진짜로!”
유설의 말대로 정말 오랜만의 재회였다.
과거 빙하백령에서, 엘리아가 시안을 봉인했을 때 헤어진 이래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사이에 지옥계에서 마룡왕과 싸웠고, 돌아온 후에는 자카르타에 떨어져 이곳까지 올라와야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년도 훨씬 넘었단 뜻이었다.
그렇게 둘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두 사람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다.
다가오는 하얀 뿌리를 막아서며 둘을 지켜주는 이.
시안이었다.
“미안한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시안이 얘기했다.
두 사람의 재회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수의 뿌리는 주변 도로와 건물을 마구 파괴하며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다만 다행인 것은, 방금까지만 해도 유설을 향해 죽일 듯이 쇄도하던 것만은 멈추었단 점이었다.
왜 그런 것인진 모르지만.
‘이 보석 때문인가?’
유설의 앞에 떠 있는 보석이 수상했다.
“시안…….”
유설이 그런 시안을 바라보고, 또 세계수와 주변 상황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곳이 에버웨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이곳이 아카데미 부지는 아니었으나, 1년이나 살았던 도시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보석이 뭔지 알고 있어?”
시안이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유설에게 질문했다.
그녀가 정말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안다고 한다면 그녀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걸 알고 있었을 엘리아 여왕은 세계수 줄기에 파묻혀 이미 죽었으니까.
“아니, 모르…….”
무심코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던 와중.
머리에 찌르르 울리는 두통에 유설이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앞에 떠 있는, 반으로 갈라진 녹빛의 보석.
그것을 보니 머릿속에서 부상하는 기억이 있었다.
“세계수의 정수?”
세계수의 정수.
세계수의 모든 생명력과 오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물건.
그리고 한 가지 기억이 덧붙여졌다.
여왕에 의해 오래도록 강탈되었던, 이라는 기억이.
‘이건…….’
그제야 유설은 머릿속을 휘젓는 정체불명의 기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가르시아 여왕…… 아니, 엘리아 여왕의 기억.
그녀가 영혼 전이의 대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과 지식 일부가 흘러들어 왔고, 그중에 세계수의 정수도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반 정도 힘이 흘러갔을 때, 세계수가 폭주하여 엘리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기에 정수가 반으로 쪼개지게 된 것이었다.
“…….”
그녀가 홀린 듯이 보석을 가지곤 세계수에게 다가갔다.
당장에라도 모든 걸 파괴할 듯한 맹수 같은 뿌리들이, 그녀가 다가가니 점차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그러곤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어이! 거기 누구야!”
“위험해!”
주변에서 하얀 뿌리들을 상대하던 비운과 반요정들이 유설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유설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하얀 뿌리들은 유설을 공격하긴커녕 보호하듯 감싸며, 그녀를 스스로의 안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반요정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여기다.’
유설이 세계수의 줄기에 도착했다.
그러곤 그녀가, 미련 없이 정수를 줄기에 대었다.
반뿐이라곤 해도 막대한 힘을 가진 보석이다. 이에 욕심을 내며 가지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유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택했다.
원래 자신의 물건도 아니었고, 엘리아처럼 욕심을 낼 이유도 없었다.
―쿠구구…….
세계수의 정수가 빛으로 화하더니 줄기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마구 날뛰며 뻗어가던 뿌리들이 모두 진정되며, 줄기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세계수의 크기마저 점차 줄어들었다.
구름 끝까지 닿을 만한 거대한 나무가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묘목으로 변해간다.
하늘과 태양을 가리던 가지와 나뭇잎들이 치워지니,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후우…….”
비운과 빙하백령의 사절들이 크게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태가 진정됐다는 것은 잘 알았다.
유설이 묘목이 된 세계수를 들었고, 프시케는 어느새 작은 뱀의 모습이 되어 유설의 팔에 감기었다.
푸른 하늘이 보이며 공기가 단번에 이완되는 듯했다.
그걸 보며 시안 역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군.’
길었던 하룻밤의 끝이었다.
* * *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도시의 소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났었던 세계수. 사라진 빙하백령의 여왕.
의문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빙하백령의 사절단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여왕님이…… 세계수의 정수를 삼키고 있었다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비운이 임시로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그가 시안과 유설에게서 얘기를 들으며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여왕님이 세계수의 정수를 훔쳐서 삼키고 있었고, 그것이 폭주한 것이라니.
“믿을 수 없다!”
쾅!
그가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났다.
어떻게 납득을 시켜야 하나. 시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움직인 것은 유설이었다.
그녀가 곁에 둔 세계수의 묘목을 만지니, 그곳에서 가루가 퍼져 나와 사위를 메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환영과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 엘리아가 세계수의 정수를 훔치던 광경.
그리고 그것을 삼키는 장면까지.
비운이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시안이라는 인간이나 유설이라는 어린 요정의 말은 믿지 못했지만, 세계수가 보여주는 광경까지 부정하진 못했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할지…….”
여왕의 죄업을 어떻게 모두에게 알리고, 이 일을 또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새로운 여왕은 또 어떻게 뽑지?
책임자의 자리에 있는 그는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공적인 업무를 우선적으로 떠올렸고.
그것들은 모두 생각만 해도 머리가 깨져오는 사안들이었다.
“하아.”
이내 그가 피로가 가득한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유설을 보며 얘기했다.
“우선 한 가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무슨 일인지 유설도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세계수의 묘목을 들어 비운에게 건네었다.
비운이 묘목을 받으려 두 손을 공손히 뻗었다.
“내 책임지고 요정궁에 다시…… 응?”
본래 세계수가 있던 자리인 요정궁. 그곳에 정수가 들어 있는 이 묘목을 다시 심으려는 비운.
그런데, 그 묘목이 유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운이 조심히, 아주 조심스럽게 손에 힘을 넣어봤지만 세계수의 묘목은 유설에게 딱 붙어선 결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
그 신묘한 일을 보며 비운이 크게 한숨을 토했다.
“유 가의 아이야. 미안하지만 네가 한 번만 더 수고해 줘야겠구나.”
이렇게 된 이상, 세계수를 다시 심는 일은 유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비운이 그렇게 얘기했고, 유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협정이 아직 다 끝나진 않았지만, 그것에 집착할 수 없어져 버렸어.”
비운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빙하백령은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빠져야 한다. 외적인 일보단 내실이 더욱 급하니까.
비록 급히 마무리할수록 다소 손해를 보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그들에겐 세계수를 다시 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비운이, 시안을 쳐다보았다.
“자세히는 내 알지 못하지만, 네가 많은 일을 해준 듯하구나.”
“저는 그저 저에게 닥친 일을 뿌리쳤을 뿐입니다.”
“네가 마룡왕의 사도라는 말은…….”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오해입니다.”
오히려 마룡왕을 패퇴시킨 입장이다. 비록 혼자가 아니라 귀마와 프시케와 셋이서 연합해 싸우긴 했지만.
“그런가…….”
시안의 간단한 한마디에 비운은 더 캐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시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찌 됐든, 후일 빙하백령에 오게 된다면 들러주려무나. 나중이라도 좋으니 더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구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나긴 이야기라 그에게 하게 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보류하며 시안이 그와 악수를 나눴다.
* * *
“시안. 언제라도 좋으니까 꼭 들러줘.”
“말만 온다 온다 하지 말고 진짜 와야 돼!”
빙하백령의 사절들이 떠나는 날.
시안은 유설과 프시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이 에버웨일에서 1년간 함께 수학했던 동급생인 유설을 배웅하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1년 넘게 지옥계를 함께 떠돌았던 프시케 역시 떠나보내게 되다니.
시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중에 꼭 가지.”
일이 모두 처리되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때쯤 되면 그녀들도 빙하백령에서 새로이 터를 잡고 있겠지.
한 가지 걱정이라면 프시케의 힘 대부분을 시안이 흡수했던 것이다만.
“……괜찮아.”
유설이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
프시케는 힘을 잃었지만 유설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
반쪽짜리에 불과하지만 엘리아의 지식과 기억이 들어간 것이다.
수백 년을 살았던 대마도사의 기억.
절반뿐이라고 하여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지식을 직접 체득하기 위해선 당분간 수련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도 문제는 없겠지.
지금 유설은 세계수의 운반자로 극히 공손한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럼.”
“잘 있어. 나중에 보자.”
그렇게 유설과 프시케가, 빙하백령의 사절단과 함께 떠나갔다.
도시를 시끌벅적하게 하던 세 세력 중 하나가 떠나간 것이다.
덕분에 도시는 단번에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왔다.
‘아직 제국 측과 자카르타가 남아 있지만.’
아마 협정은 며칠 내로 금방 완료될 것이다.
빙하백령이 많은 것을 양보하고 떠나면서 두 세력도 대부분의 조약을 마무리 지은 이후였다.
‘그때가 되면.’
그렇다면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에 남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제레흐 총장은 협정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아카데미의 재건을 시작하겠지.
당분간 그것을 도우며 재건한 아카데미에 복학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혹은 자카르타로 가서 당분간 아슬라 가의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겐 아슬라는 물론 란이나 샨도, 다른 수인들에게도 자신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신세를 진다고 하면 흔쾌히 환영해 줄 테지.
그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안 아그리드.”
시안이 몸을 돌렸다.
그곳엔.
“잠시 얘기 좀 나누지 않겠나?”
1황자, 아이작 폰 비스마르크가 작게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