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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67화 (16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7화

‘남은 마나는 절반 정도.’

엘리아와의 전투에서 있었던 소모가 크다.

시안이 각종 악마들의 기운은 물론 마룡왕과 프시케의 기운까지 흡수해 녹여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반의 소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거기에 엘리아는 아직 건재하다.

이 뒤로 그녀와 다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 순 없지.’

시간이 촉박했다.

엘리아가 유설의 몸에 영혼 전이의 대법을 실행하러 갔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건 곳 유설이 죽는다는 것과 똑같았다.

그녀로서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도박을 거는 것이었기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시안이나 프시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죽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죽음의 위협을 내버려 두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영혼 전이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엘리아가 세르쥬를 방패 삼아 가르시아의 몸을 버리고 유설의 몸을 취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

그렇기에 마나를 아끼느니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단칼에.’

결연한 표정으로 앞을 막고 있는 세르쥬를 보며 시안이 오러를 펼쳐갔다.

밤의 오러가 검은 나뭇가지처럼 공간을 잠식하며 뻗어 나간다. 엘리아가 쏘았던 세계수의 화살을 막았을 때보다도 한층 더 세심하고 단단하게 정련된.

그 중심에서 시안이 단 한 번의 검을 위해 집중했다.

-굉장한 힘이구나!

세르쥬가, 스스로의 위기와는 별개로,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눈앞의 인간 아이에게서 뻗어 나오는 힘들은, 결코 옛 영웅이나 전사들에 뒤지지 않았으니.

이내 그의 눈이 가라앉아왔다.

‘죽겠군.’

그는 이 장소가 마지막 장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순순히 길을 비켜주고 목숨 구걸을 한다면, 어쩌면 살아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합!

세르쥬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대기가 흔들린다. 시안의 오러가 아직 잠식되지 않은 곳에서부터, 거친 파동이 퍼져 나가며 시안의 오러를 강타했다.

콰과과과광!

수십 곳에서 동시에 밤의 오러와 대기의 파동이 맞물리며, 곳곳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세르쥬가 온 힘을 끌어올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수십, 수백 번이나 손바닥을 휘둘렀다.

공간을 잠식한 시안의 오러를 걷어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파동이 공명하며 퍼져 나갔다.

‘큭.’

그 모든 파동을 오러로 받아내며, 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 갈림길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세르쥬를 일격에 처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지금 이곳에서 놈에게 우위를 내어준다면, 그것을 뒤집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 얼마간의 시간이면, 엘리아가 유설의 몸을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시안…….”

시안의 뒤쪽에 있는 프시케가 불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상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가는 시안과 세르쥬의 기운들은 너무나도 팽팽히 균형을 이루고 있어, 간단하게 가세할 수가 없었다.

‘후우.’

시안이 단단히 검을 움켜쥐곤 뒤로 당겼다.

그곳을 중심으로 밤의 오러가 천천히, 그러나 거대한 나선을 그리며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세르쥬가 계속해서 파공을 날리고 있었지만, 시안의 오러는 속도는 늦어질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시안의 눈이 번뜩이며.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세상이 둘로 가르기 위한 검이 쏘아졌다.

세르쥬가 이를 악문다. 이것만, 이것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끌어 올렸다.

엘리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갔던 생명력까지 정말로 모든 것을.

이윽고 그의 기운과 시안의 검이 추돌하고.

-서걱.

생각보다도 훨씬 더 손쉽게, 시안의 검이 세르쥬의 기운을 갈랐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세르쥬의 몸통 역시도.

잔뜩 긴장되어 있던 공기가 탁, 하고 풀려갔다.

마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만 같이.

쿠웅!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갈라진 세르쥬의 몸이 땅에 엎어졌다.

‘쉽지 않군.’

세르쥬가 흐려지는 눈으로 사원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쉽지 않다. 이기는 것도, 그리고 살아가는 것도.

‘왕도 죽었다고 하고, 다른 동포들도 이제 떠나갔다고 하니.’

과거 동포들이 야망을 불태우며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는 반대했다.

이길 리가 없다.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그저 우리들만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실제로 맞아들어갔다.

그래서 배신했다.

왕을 배신하고 그 등에 칼을 꽂았다.

약해진 왕을 당시 여왕이던 엘리아에게 데려갔다.

그때의 배신의 대가로, 엘리아는 동포를 죽이지 않고 봉인하는 것으로 멈추었다.

그때 거인들이 받던 증오를 생각하면 충분하고도 넘치는 대가였다.

‘비록 결국엔 다들 죽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거인족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 간신히 풀려나기 시작한 그의 동포는, 제국과 인간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다들 죽어버렸다.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잘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 역시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선 안 되었다고 후회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었고, 자신은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생각했다.

-푹!

“커헉!”

심장에 검이 꽂혔다.

차가운 눈빛의 인간 아이가 세르쥬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강인하기만 했던 그의 생명력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죽는 것은 괜찮았으나, 마지막 순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가자, 프시케.”

“응!”

천천히 눈을 감는 세르쥬를 뒤로 하고.

시안과 프시케가 사원 안쪽으로 급히 달려 나갔다.

죽어가는 세르쥬를 지켜봐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아는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시안과 프시케는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설의 안위와 여왕의 동향뿐.

사원의 길은 결코 어렵지 않았고 두 사람은 여왕의 기운을 쫓아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여왕의 기운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

-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안과 유설이 서로를 마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비명 소리. 유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왕 목소리 아냐?”

“무슨 일이지?”

엘리아의 목소리였다.

* * *

영혼 전이의 대법을 위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공동.

시안과 프시케가 그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로 기이한 것이었다.

제단에 눕혀진 유설과 그 제단을 중심으로 방 전체에 빼곡히 그려져 있는 마법진.

그 마법진들 중 절반 이상이 빛을 뿜고 있었고 엘리아는 제단의 앞에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그 엘리아의 몸에서 하얀 나무뿌리가 자라나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아아아아악!”

극도의 고통이 섞여든 비명 소리가 찢어져라 울려 퍼진다.

시안과 프시케가 왔음에도 엘리아는 그들에게 전혀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녀의 몸속에서 뿌리가 자라나며,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기에.

“뭔진 모르겠지만…….”

“설아야!”

두 사람은 일단 제단에 눕혀있던 유설부터 구출해 냈다.

다행히 구속되어 있거나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거나 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수면 마법이 걸린 것인지 아니면 약으로 재운 것인지, 일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숨은 쉬고 있어.”

“휴우…….”

작은 손으로 유설의 머리를 안으며 프시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들이 조금은 안전한 후방으로 빠지고, 그제야 비로소 시안은 엘리아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저 하얀 뿌리는…….’

본 기억이 있다.

엘리아가 활을 쏘았을 때, 그 활과 화살 모두 저런 느낌의 하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젠장!”

엘리아가 평소와 다르게 거칠게 욕설을 내뱉더니 뿌리들을 붙잡아 뽑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미 세계수의 뿌리는 엘리아의 몸속에, 내재된 마나의 근원에 단단히 뿌리내린 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몸속을 갉아 먹히는 고통 속에서 엘리아의 머리가 멍해져 왔다.

어째서 세계수의 정수가 갑자기 폭주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지금 같이 중요한 순간에!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본디 세계수의 정수는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응축된 집약체.

사람 하나의 몸으로 모두 억누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그동안 강대한 마법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시안과의 전투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비명을 질러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여러 적을 만나고 처치해왔지만, 시안과 같은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마룡왕을 만나고 세계수의 정수를 삼킨 시점에 이미 거인과의 전쟁은 거의 끝난 후였다.

그 후로 수백 년간 엘리아의 지위를 위협하는 적은 없었다.

그녀와 맞먹을 정도로 강한 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들과 싸울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그녀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기어이 목 끝까지 칼을 들이민 것은 오로지 시안뿐이었다.

“그만! 그만!”

그녀가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보지만 소용없었다.

강대했던 그녀의 마력은, 지금에 와선 세계수를 키우는 비료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시작으로 자라난 세계수가 무럭무럭 자라나 숲의 사원을 모조리 부숴나갔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순간까지 엘리아는 마지막 의식을 붙잡고 있었으나.

‘안…… 돼…….’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녀에게 먹혀 수백 년의 시간을 억압받아온 세계수의 분노.

자라나는 나무줄기는 엘리아의 몸과 영혼을 찢어발기며 거침없이 포효했다.

남은 것은 부서져 잔해밖에 남지 않은 사원과 하늘에 닿을 만큼 커다란 하얀 나무뿐.

“죽은 건가?”

프시케와 기절한 유설을 데리고 한쪽에 피해 있던 시안이, 나무를 보며 중얼거렸다.

프시케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세계수에게 먹혔어.”

“세계수?”

“저 나무.”

세계수. 그제야 시안은 엘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풋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엘리아는 세계수의 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그 힘을 억지로 끌어오고 있던 것이겠지.

그런데 그것이 지금 폭주한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아는 정말 죽은 거겠군.”

“아마도.”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저 정도의 힘이 폭주했다면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프시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모두 끝났다. 유설에게 닥치던 위협은 모두 사라졌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콰드드드득!

“어?”

“프시케! 피해!”

바닥을 뚫고 올라온 하얀 나무뿌리가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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