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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66화 (16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6화

시안의 밤의 오러가 날개를 펼치듯, 이 공간을 가득 덮어 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챙챙했던 태양이 가리어지며 서서히 밤이 드리워졌다.

그에 따라 세계수의 화살을 막으며 생긴 상처들이 모두 나아가며, 동시에 전신에 다시금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더욱 강해지는 특성을 가진 밤의 오러.

그러나 사실, 시안이 강제로 오러를 펼쳐 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본래 지금 시간은 모두가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이다.

그런데 엘리아의 공간인 ‘숲의 사원’으로 들어오며 잠시 끊어졌던 그것이, 시안이 펼친 오러를 계기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현실과 ‘숲의 사원’과의 경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

그 사실에 엘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만든, 자신을 위한, 자신만을 위한 공간. 금기를 어기고 세계수에게서 정수를 훔쳐 집어삼키면서까지 만들었던 이 공간이.

저런 꼬맹이 한 놈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니.

‘……무너지진 않겠지만.’

흔들린다곤 해도 위태롭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무로 지은 집이 바람을 맞아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 ‘고작’이 그녀에겐 극도의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그만 죽어.”

더 이상 녀석이 이 공간을 흐려놓기 전에. 이 이상 희한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그녀가 활시위를 놓았다.

강한 장력이 담긴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쏘아졌다.

표적은 시안으로 아까와 같았으나, 상황은 다소 달라졌다.

첫 번째 화살을 쏘았을 때 시안의 주위는 숲이 펼친 각종 재해가 가득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청명한 밤의 기운이 웅크리고 있는 진원지였다.

-투웅!

이윽고 화살이 쏘아졌다.

웅크린 밤의 기운을 향해 세계수의 화살이 치달았다.

검은 밤의 기운 속에서 시안이 쇄도하는 화살을 보았다.

이제는 복사한 검륜의 검도 없다. 다시 복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급박한 와중에 그 잠깐의 시간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으로 온전히 막아야 한다는 뜻.

‘한다.’

시안이 차분히 호흡의 흐름을 유지하며 기운을 돌렸다.

들고 있는 검은, 빙정이 아닌 흑검.

온전히 시안의 손에 맞추어 만들어진 그만의 검.

‘참마검.’

그 검의 손잡이 부근을 중심으로 인근에 넓게 펼쳐진 밤의 오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점점 빠르게 회전하며 검에 모여든다.

방대한 기운에 절로 흔들리는 검을 강하게 틀어쥐곤, 시안이 검을 들어 올렸다.

콰과과과과광!

쏘아진 세계수의 화살은 주변에 거대한 충격파를 흩뿌리며 쇄도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이 돌고 있는 밤의 기운에 부딪치고.

그리고 기운을 모조리 찢어발기며 시안에게 다가왔다.

‘당황하지 마.’

흐름을 강제로 비틀어버릴 정도로 강대한 힘이 담긴 화살이었음에도.

시안은 침착했다. 강제로나마 의식적으로 침착을 유지했다.

흩어지는 흐름을 다시 붙잡고, 혼란스럽게 변하려는 기운을 다시 되돌리고.

귀마가 가르쳐 준 참마검은 홀로 오롯한 검.

고작 이 정도 여파에 흔들릴 것이 아니었으니.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이윽고, 검의 벼락이 떨어져 화살과 충돌했다.

콰과과과과광!

시안의 검을, 그 강철과도 같은 검을 부수기 위해 세계수의 화살이 파고 들었고.

시안의 검이 그것을 막았다.

검과 화살이 직접 충돌한 것이 아닌, 기운과 기운이 충돌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가열찼다.

뚫고자 하는 세계수의 화살과 막고자 하는 시안의 검.

‘흥.’

엘리아가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보았다.

고작해야 한 번의 칼질로 세계수의 화살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마룡왕의 목을 꿰뚫기 위해 단련하고 또 단련한 화살이다.

아까 한 번 막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기적적인 일이었으니.

그러나.

-서걱!

스산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궁!

세계수의 화살이 갈라졌다.

동시에 갈 곳 잃은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까완 비할 바 없이 거대한 폭발이 되어 엘리아를 덮쳤다.

“아아아악!”

황급히 방어막을 펼쳐보지만 세계수의 화살이 터진 여파는 고작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폭발의 여파에 휩쓸렸고, 동시에 시안이 있던 장소 역시 모조리 쓸려나갔다.

잠시 후.

더 이상 숲도 나무도, 그 무엇도 없는 황폐화된 대지에서.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애써 회복한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시안과, 완전히 헝클어진 머리로 피와 먼지에 잔뜩 더러워진 엘리아였다.

“드디어 땅에 내려왔군.”

땅을 밟은 엘리아를 보곤 시안이 툭 얘기했다.

그 역시 전신이 삐걱거리는, 온전치 못한 상태였지만 아직도 전의는 충분했다.

호흡을 고르며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고, 그걸 보곤 엘리아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때.

“!”

엘리아가 크게 몸을 떨었다.

사원과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감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사원을 지키는 가디언, 세르쥬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안 돼!”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당장 사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금 현재, 그녀에게 있어선 그 사원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된다.

설마 세르쥬가 그런 별것 없는 악마에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어딜 가.”

그러나 그 빈틈을 놓칠 시안이 아니었다.

다급히 사원 쪽으로 가려는 엘리아에게 시안이 한 걸음에 접근하여 검을 내려쳤다.

서걱!

스산한 소리와 함께 엘리아의 팔 하나가 떨어졌다.

피가 튀어오르며 엘리아의 표정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팔 하나 정도야 문제없다.

이 가르시아의 몸뚱이는 이제 곧 버릴 참이 아니던가?

팔 하나를 내어준 대가로 엘리아는 도주할 틈을 벌 수 있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그녀가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닥에 떨어진 팔 한 짝뿐.

힐긋 그것을 본 시안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여왕이 갈 곳은 한 군데뿐.’

쾅!

그의 몸이 사원 쪽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 * *

“크허억!”

세르쥬가 뒷목을 잡으며 크게 몸부림쳤다.

그 거대한 거인의 뒷목에선 살점과 함께 피가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태연하고 침착하기만 했던 세르쥬의 표정이 처음으로 고통으로 물들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프시케가 비웃음을 담아 얘기했다. 그러자 세르쥬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이 어린놈이……!

그의 분노에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프시케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윽고 그녀가 있는 공간이 빠르게 압축되었지만, 그 순간 그녀는 땅을 박차 세르쥬에게 뛰었다.

동시에 날개처럼 펼쳐진 냉기가 세르쥬의 왼쪽 손목을 갈라내었다.

“크아아악!”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었다.

놈의 손이 두꺼운 건지 아니면 프시케의 일격이 조금 얕았는지, 손목은 반 정도밖에 갈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통에 잠식되어 마구잡이로 충격파를 흩뿌려대는 세르쥬의 손을 피해, 프시케가 차근차근 놈의 몸에 상처를 내어갔다.

마치 장인이 정교하게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 듯.

그녀는 세르쥬의 몸을 말 그대로 깎아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콰쾅!

바깥쪽 벽이 터져 나가며 화살이 쇄도했다.

시안에게 쏜 세계수의 화살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마력이 담긴 화살.

설마 바깥쪽에서 기습이 들어올 줄은 몰랐던 터라 프시케가 크게 당황했다.

다급히 몸을 틀어 피할 수는 있었으나 그 여파로 옆구리가 길게 찢어졌다.

“큭!”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키며 그쪽을 보았다.

그곳엔 굳은 표정의 엘리아 여왕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네가 어떻게?”

순간 프시케가 당황했다.

엘리아가 여기 있다는 건 설마 시안이 당했다는 건가?

죽어?

그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던 사내가?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내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흡!”

곧바로 쫓아온 시안이 뒤에서 엘리아를 덮친 것이다.

엘리아가 가까스로 시안의 검을 피하고는 사원 안으로 들어왔고, 시안 역시 따라 들어왔다.

‘거인……?’

프시케 쪽으로 합류하며, 시안이 상황을 살폈다.

곳곳에 피를 흘리고 있는 거인과 호흡이 거칠긴 하지만 상처는 적은 프시케.

“무사했구나.”

“너도.”

프시케가 시안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2:2의 구도가 되었다. 단 부상은 저쪽이 훨씬 심했다.

세르쥬는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고 엘리아는 팔을 하나 잃은 참이었으니.

불리한 상황에 엘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군요.”

고민은 짧았고 결단은 빨랐다.

엘리아가 가르시아의 몸에 남아있던 얼마 없는 생명력까지 모조리 터뜨렸다.

-여왕?

그것에 오히려 세르쥬가 더욱 당황했다.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내리면서 마력을 높이고 있다.

일순간 강한 힘을 낼 순 있겠지만,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는 방법.

“세르쥬. 이곳은 부탁합니다. 잠시면 되니까.”

이윽고 땅바닥에서 굵은 나무뿌리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세르쥬의 몸에 휘감겼다.

그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상처를 봉하고 치유하기 위해.

엘리아가 남은 힘을 바닥까지 끌어올려 세르쥬의 상처를 모조리 치료하곤, 더욱이 그녀의 마력까지 모두 넘겨주었다.

-과연. 알겠다.

넘쳐흐르는 힘을 느끼며 세르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말이 없어도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바로 전이의 대법을 실행하겠단 생각일 테지.

‘사실은 좀 더 안정화가 필요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밍기적거릴 수는 없다.

‘난 죽을 수 없어.’

엘리아가 눈을 번뜩였다.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과거에 비해 매우 혼탁했다.

처음에는 분명 마룡왕을 죽이기 위해, 훗날 반드시 해악이 될 그 용을 없애야 한다는 사명감에 행동하던 그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삶에 대한 집착을 가리기 위한 변명거리로 전락했으니.

-여긴 내게 맡기고 가거라. 그리고 가급적이면 빨리 돌아와서 도와줬으면 좋겠군.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라고 얘기하며 세르쥬가 사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았다.

엘리아가 세르쥬를 남겨두곤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

프시케가 고함을 지르며 여왕의 뒤를 쫓으려 했다.

콰앙!

그러나 입구에 접근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세르쥬가 그런 프시케를 다시 차분해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아까처럼 쉽진 않을 게다, 꼬마야.

프시케가 이를 악물었다.

여왕이 유설에게 뭔가를 하려고 한다.

당장 쫓아가서 막아야 하는데, 앞을 가로막은 저 거인이 이토록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프시케.”

그때 시안이 한 발자국 세르쥬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엔 이미 밤의 오러가 가득 둘린 검이 들려 있었다.

“달릴 준비해. 단번에 끝낼 테니까.”

그의 말에 프시케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

세르쥬가 살짝 긴장이 흐르는 표정으로 경계심을 높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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