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5화
유적의 내부는 무척이나 넓고 높았다. 자칫하면 집 한 채는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넓이.
그 넓은 공간의 대부분을 한 명의 거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머리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거인.
세르쥬.
짙은 암영이 드리워진 눈은, 그러나 아직 형형히 번뜩이며 프시케를 내려다보았다.
-무료한 와중에 찾아와 준 건 고맙다만, 돌아가 줘야겠구나, 꼬마야. 이 뒤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들어서.
프시케가 지금 작은 아이와 같은 몸인 것도 있어서, 둘의 대비는 더욱 더 커 보였다.
엘리아가 사원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가디언이었다.
보는 대로 거인족의 일원.
과거 거인왕이 전쟁을 선포하고 동포들이 편승하여 날뛰던 시절, 괴물 같은 거인왕의 목에 직접 칼을 꽂은.
그리하여 엘리아의 봉인 속으로 그를 직접 처넣었던 반역자.
그때부터 그는 엘리아와 함께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동포들을 모조리 봉인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년의 수하인가?”
프시케가 세르쥬를 올려다보며 거칠게 얘기했다.
-꽤나 입이 거친 아이구나.
“안 거칠게 생겼어!? 설아는 어딨어? 그 뒤에 있지?”
한 걸음.
유설이 있는 곳까지 단 한 걸음만이 남은 상황에서 맞닥뜨린 방해자.
프시케의 눈에 핏기가 올라오며 세르쥬를 노려보았다.
감정이 넘치는 그녀와 반대로 세르쥬는 가만히 앉아 있는 채 침착하기만 했다.
-엘리아가 데려온 그 아이의 이름이 설아인가 보구나. 너는 그 아이를 구하러 온 거고.
“그래. 그러니까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거절한다.
붙잡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감정적이 되어 달려드는 아이.
그건 무척이나 감상적인 일이었고, 실제로 세르쥬의 마음속에 그런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켜줄 마음은 없었다.
그는 이미 속세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였고, 엘리아를 돕는 것 외에 남아 있는 삶의 이유가 없었기에.
“그럼 죽어.”
이 상황에 태연자약하기만 한 세르쥬를 보며, 프시케의 눈이 뱀처럼 붉게 갈라졌다.
그녀가 손에 냉기를 모아 던졌다.
세르쥬의 크기에 비하면 밀알과도 같이 작았지만, 그것이 품은 기운까지 작진 않았다.
파앙!
그러나 프시케가 던진 구체는 세르쥬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터져 사라졌다.
공격을 당한 이상 세르쥬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지그시 땅으로 눌렀다.
쿠웅!
그러자 프시케가 무거운 압력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큭!”
그녀가 이를 악물곤 힘을 주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쿠구구궁! 그 직후 사원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과 함께 프시케가 다시 냉기를 모아 둘렀다.
‘여왕이 하던 공격과 비슷하다.’
공간 자체를 쥐어짜는 느낌의, 소름이 돋는 공격.
엘리아가 그에게 이런 마법을 가르쳐 준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세르쥬의 능력인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한 가지는 알았다.
‘해볼 만해.’
엘리아에게 수없이 당하며 이미 어느 정도는 파악해 놓은 공격이다.
이게 놈의 능력 전부라면 지금의 자신이라도 충분히 할만했다.
쿠웅!
그사이 세르쥬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앞쪽에서부터 압력이 짓쳐들어와 프시케에게 쇄도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공격이었지만, 프시케의 피부는 공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본래가 뱀인 그녀는 눈과 귀보단 피부 쪽이 훨씬 발달되어 있었다.
‘여기!’
콰앙!
그녀가 피했고 이번에도 벽이 부서졌다.
두 번이나 피한 것을 보곤 태연하기만 하던 세르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 번이면 우연일 수 있어도 두 번은 필연이다.
상대가 분명히 압력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이젠 알았다.
-과연, 한 수는 있구나.
세르쥬가 작게 감탄하며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온전히 살의만을 띄며 휘둘러졌다.
쿵! 쿵쿵쿵쿵!
그가 더욱더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가면 갈수록 빨라진다. 그와 동시에 사원 내부에 폭풍을 방불케 하는 압력이 휘몰아쳤다.
복잡하게 휘감기는 압력의 폭풍 속에서 프시케가 몸을 낮추곤 날래게 움직였다.
그녀의 피부가 대기의 흐름을 모두 감지하며 이 장소의 정보를 모조리 전해주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바람의 흐름을 감지하고, 세르쥬가 움직이는 손바닥의 방향을 대조하고.
바람의 결을 읽으며 가장 약한 사이사이만 골라 회피했다.
그러나.
-잽싸기도 하구나!
세르쥬가 크게 감탄하며, 손바닥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러자 방 전체의 공기가 떨어져 내렸다.
도망칠 곳이 아예 없는 공격. 유일한 탈출구라곤 사원 바깥으로 나가는 것뿐.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도망치려던 프시케의 발이, 아주 잠시 움찔거리며 멈췄다.
모종의 예감. 지금 여기서 바깥으로 나가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예감이 그녀의 발을 일순간 둔하게 만들었고, 그 틈을 세르쥬는 놓치지 않았다.
-파(波)!
쿠웅!
바닥 전체를 뒤덮은 압력이 떨어져 내리며 프시케가 그곳에 깔렸다.
거기서 봐주지 않고, 세르쥬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외줄 타기 하듯 피해갔던 불규칙한 바람들이 모조리 프시케에게 휘몰아쳤다.
콰과과과광!
“커헉!”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공격에 프시케가 바닥을 기었다.
영원과도 같은 바람이 잠시 멈췄다. 세르쥬가 완벽히 무력화에 성공했다 판단한 것이다.
-돌아가거라.
그가 마지막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준다는 듯 얘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한 세르쥬의 침착한 목소리가 바닥에 엎어진 프시케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 떨었다.
-이 이상 하면 정말로 죽일 수밖에 없단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자신은 놈보다 약하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힘의 상당 부분을 시안의 만년빙정을 만들어 주는 데 사용했다.
그걸 후회할 생각은 없다.
마룡왕을 이기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곤 해도, 그걸 결단한 것은 자신.
다만 받아들이긴 해야 했다.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강대했던 악마가 아니라는 점을.
그렇기에.
“후…….”
프시케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일어났다.
그 눈에 담긴 투지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높았다.
-…….
세르쥬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결국 이 죄 없는 아이의 명을 거둬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시케가 기운을 모았다.
그 피부가 뱀의 그것과 같이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대한 악마였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본디는 아주 작디작은 뱀 한 마리.
시안의 팔목에 감겨 있을 때의 그 모습이 태어날 때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며 강해졌다.
짐승도 마물도, 그리고 악마도.
그녀를 죽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거꾸로 집어삼키며, 그렇게 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른 그녀였다.
“안쪽에 있는 설아를 풀어주면 돌아가 주지.”
이런 상황이야 옛날 옛적부터 수두룩하게 겪었던, 별것 아닌 일상 중 하나였다.
* * *
세계수의 정수가 엘리아의 몸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나무뿌리가 몸속에 자라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담긴 기운이 엘리아의 기운에 뿌리내리며 완전히 뒤섞였다는 뜻이었다.
동시의 숲 전체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흙도 돌도, 수풀도 나무도, 그리고 대기와 태양조차.
그냥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던 자연에, 하나의 의지가 깃들었다.
세계수 그 자체가 된 엘리아와 공명하는 의지.
시안을 향한 살의를.
-콰아아아앙!
시안이 밟고 있던 대지가 터져 나갔다.
동시에 어지간한 건물 기둥만큼 굵은 뿌리들이 수없이 솟아나 시안에게 덮쳐들었다.
서걱!
시안이 빙정을 휘둘러 달려드는 몇 개나 되는 뿌리를 한 번에 잘라냈다.
얼어붙으며 동강 나는 뿌리들. 그러나 뿌리는 계속해서 솟아나고 있었고, 시안을 노리는 것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땅이 솟아오르고 대기가 응축된다.
땅속 깊은 곳에 있던 광석들이 하늘 높이 올라가 달궈지더니, 뜨거운 쇳물의 비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익!
가장 위협적인 건 마지막의 발간 쇳물의 비였다.
땅이 뒤흔드는 건 오러 발판으로 해결할 수 있고, 나무뿌리는 빙정으로 얼리고 베면 그만이다.
하지만 쇳물의 비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빙정을 휘둘러 당장의 빗물은 상쇄할 수 있어도 그 뒤로 곧바로 떨어지는 빗물이 파고든다.
검로를 따라 얼음벽을 만들어 막으려고 해도 달궈진 쇳물은 얼음 따윈 금세 뚫고 들어왔다.
마치 온 세상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듯한 재해 속에서.
“…….”
엘리아가 팔뚝에서 하얀 나뭇가지 하나를 뽑아 들었다.
이내 그것은 키의 세 배는 되는 듯한 장궁으로 변하더니, 마나의 화살을 그 시위에 담았다.
세계수의 정수의 힘을 담은 화살.
표적은 재해의 중심이 되는 곳. 시안 아그리드의 머리였다.
-투웅!
엘리아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재해 속에서 방어에 힘쓰고 있던 시안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지금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이까짓 것들은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라비!’
‘웅!’
시안의 신호와 함께 라비의 검이 펼쳐졌다.
[ 상천검(霜天劍) - 암우(暗雨) ]
본래 비의 형태로 떨어지던 검은 오러의 검들이 지금은 반대로 솟아올랐다.
시안을 방해하는 모든 재해들을 뚫고 쏘아진 세계수의 화살을 요격했다.
검륜으로 복사된 수백의 검이 단 한 대의 화살과 맞닥뜨렸고, 동시에 무참히 부서져 나갔다.
수백의 검을 모조리 부러뜨리며 세계수의 화살이 쇄도했다.
검을 무한으로 쏘아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검륜의 복사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이윽고 한계에 달하여 검이 바닥났고, 세계수의 화살은 방해 없이 시안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위력은 다소 줄어들었다.
시안이 빙정을 들어 화살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두 기운이 부딪치는 여파로 주변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안을 방해하던 뿌리도, 솟아오르던 대지도, 하늘에서 떨어지던 쇳물도 모조리 튕겨 날아갔다.
-파아아아앙!
이윽고 세계수의 화살이 그대로 기운을 흩뿌리며 터져나갔다.
시안은 완전히 그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윽고 폭발의 여파가 서서히 줄어들고.
“쯧.”
엘리아가 혀를 찼다.
폭발의 진원지에서, 무사히 서 있는 시안이 보인 것이다.
아니 무사히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신에 상처를 입고 이마에서도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의 오러의 회복 능력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이 정도라는 것이, 상처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용케 잘 막은 모양입니다만.”
엘리아가 다시 활을 들었다.
그 화살에 방금과 전혀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날카롭고 지글거리는 세계수의 화살이 담겼다.
“다음 건 어떻게 막으실 거죠?”
그녀가 시위를 당겼다. 그 화살의 끝이 망설임 없이 시안을 노리고 있었다.
시안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동시에.
‘라비.’
밤의 오러가 사위를 잠식하며 퍼져 나갔다.
이 공간을 모두 밤으로 물들이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