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1화
늦은 밤이었음에도 자리는 금방 만들어졌다.
가장 근처에 있던 고급 여관에 불이 켜지고, 1층 식당 구역의 정가운데 원형 테이블에 그들이 둘러앉았다.
겐 아슬라와 시안, 제레흐와 성녀, 그리고 아이작 황자와 대장군.
겐과 제레흐는 황자를 쳐다보며 불편한 듯 째릿거렸고, 황자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국은 전쟁을 일으킨 범인이니.’
호의 섞인 눈빛이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제레흐는 잘 운영하고 있던 아카데미를 강제로 빼앗기고 쫓겨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참으로 대단한 자리였다.
단 10명밖에 없는 하이마스터 중 셋이 이 자리에 앉아 있고, 정화교단의 실질적 톱이라 할 수 있는 성녀까지 자리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유력한 차기 황제라는 1황자까지.
‘이런 자리에 앉게 되다니.’
새삼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고아에서, 아그리드 후작에게 주워져 후작가의 그림자로 살게 되고.
진짜 시안의 죽음을 계기로 그 대신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다가, 전쟁을 계기로 도망자가 되고.
그런 자신이 지금은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이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다.
‘이걸 출세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출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아직 자신은 자유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토록 바라던, 나 자신의 이름을 아직 되찾지 못했다.
제국과 아그리드 후작은 여전히 그의 위협으로 남아 있었기에.
“그럼, 밤도 깊은데 얼른 본론을 들어보는 게 어떤가?”
느긋하게 차만 홀짝이고 있던 황자가 가장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겐과 제레흐도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빙하백령의 요정여왕이 시안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그들의 시선이 입을 다물고 있는 시안에게 쏠렸다.
“음…….”
시안이 잠시 뜸을 들이곤 입을 열었다.
“조금 오래된 얘기입니다만, 대장군이 아카데미를 장악했을 때, 거기서 도망간 저는 동쪽 땅으로 향했습니다.”
“동쪽?”
“거인들의 무덤 말인가?”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곳에서 거인왕을 만났죠.”
툭.
거인왕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작게 울린 그 소리는 생각 외로 울려 퍼졌고, 사람들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황자가 있는 쪽이었다.
“그걸 채간 게 그대였군?”
황자가 웃으며 얘기했다.
채갔다는 표현에 시안이 눈을 찌푸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자 우리 쪽에서도 방책을 냈었지. 그중 하나가 동쪽 땅 어딘가에 있는 거인왕을 찾는 거였는데…… 어떻게 흔적은 찾을 수 있었는데 이미 비어있는 유적이더군.”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시안을 보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위축될 수도 있는 그 시선을 보며 시안이 코웃음 쳤다.
“거인왕이 임자 있는 물건인 것도 아니고, 늦은 사람이 잘못한 거 아닙니까?”
“……인정하지. 그래, 계속해 보게.”
시안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저는 거인왕과 동행을 했고, 첫 행선지는 빙하백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쳐들어왔던 제국의 거인들을 찾아 다시 땅에 묻고 다녔죠.”
“잠깐만. 거인왕이 거인들을 죽였다는 말인가? 어째서?”
제레흐가 도중에 의문을 표했다. 충분히 가능한 의문이었다.
“거인왕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봉인으로 지금껏 살아 있던 것이니까요.”
“허어…….”
“뭐 본심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바론 이렇습니다. 믿기 힘드실 수 있어도 제가 빙하백령의 거인들을 처치하고 다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목격한 이들도 많으니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겐과 제레흐는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지만 황자와 대장군은 아무런 의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부터 빙하백령 쪽에서 시안에 대해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행 사이에 거인왕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지금 처음 듣는 것이지만.
“그다음은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거인왕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여왕에게 포착되었고, 그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죠. 거기에.”
시안이 품을 뒤적거렸다. 여기까지는 모두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자신과 마룡왕의 관련성은 증명되지 않는다.
약간의 거짓은 필요했다.
“이 물건 때문인지, 여왕은 저를 조종하는 존재가 마룡왕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이윽고 시안이 꺼내 든 것은 원시마법, 아카데미를 떠날 때 제레흐에게 받았던 그 청동거울이었다.
“그건!”
“……쯧, 그걸 가지고 있던 것도 자네였나?”
오랜만에 보는 물건에 제레흐가 눈을 크게 떴고, 옆에서 황자가 크게 혀를 찼다.
“어쩐지 아무리 아카데미를 뒤져도 발견되지 않더라니.”
아카데미를 장악한 후 대장군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원시마법을 찾았다.
그게 있어야 마룡왕의 협력을 보다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마룡왕이나 마룡왕의 은총을 받는 흑마법사들은 제국의 손을 떠났다.
‘시안 아그리드.’
황자가 이제는 거의 죽일 듯한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여유로움을 가장하지도 않았다.
얘기를 듣다 보니 시안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전쟁을 성공리에 마칠 수도 있던 것 아닌가?
시안이 아니었다면 거인왕도 찾았을 거고, 원시거울도 발견해 마룡왕도 본격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건 반대로 겐과 제레흐에겐 더없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시안을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이전보다도 더 호의가 섞여들었다.
“받으시죠.”
시안이 원시마법을 제레흐에게 건넸다. 이걸로 해야 할 일을 하나 마쳤다.
“끄응, 역시 마룡왕의 물건이 맞았었나?”
제레흐가 신음을 삼키며 묻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적어도 여왕은 그렇다고 확신하더군요.”
제레흐가 원시마법을 옆자리의 성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눈을 감고 거울을 쓰다듬나 싶더니, 이내 속삭이듯 작게 얘기했다.
“확실히 악마의 것과 같은 힘이 느껴집니다. 다만 깃든 마력이 너무나 강대해 좀처럼 느껴지진 않는군요.”
“허!”
성녀가 원시마법을 다시 제레흐에게 건넸다.
“이제 보니 요정여왕이 감지력이 무척 뛰어난 모양이구만. 성녀님조차 이렇게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간신히 눈치채는 것을 곧바로 알아채다니.”
“아까 보니 무척이나 뛰어난 마법사 같던데, 마법사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점이 보이는 것이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군.”
사실 여왕이 원시마법을 눈치챘다는 부분은 완전히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앞뒤는 맞아 들었다.
거기에 거인왕의 얘기와 원시마법이 마룡왕의 것이란 건 흔들리지 않는 사실.
대부분의 사실 속에 들어있는 약간의 거짓은, 그들로서는 눈치챌 수 없었다.
애초에 시안이 지옥계에 갔었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었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다.”
탁.
대강 얘기가 정리되곤,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황자였다.
“감사하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어. 다만 이번 협정의 건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니 우리가 뭐 어찌해 줄 수는 없겠군. 아니면 어떤가, 이제라도 다시 제국의 품에 돌아오겠는가? 그러면 여왕의 오해 정도는 충분히 풀어줄 수 있는데.”
“됐습니다.”
황자가 시안을 보며 그리 얘기했지만 시안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거절했다.
제안 자체는 그럴듯하긴 했지만, 지금의 황자의 눈을 보면 결코 수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황자는 제국의 패배 요인 중 하나로 자신의 배신을 꼽고 있을 터였으니.
“흥.”
황자가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대장군이 수행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게. 자네는 란과 샨의 은인이니까.”
“협정이 잘 끝나면 여왕과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중재해 주지.”
겐과 제레흐는 그렇게 얘기해 주었다.
중재 정도로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시안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일단은 협정이 제대로 끝나는 것이 먼저였다.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순 없으니까.
* * *
다음 날이 되었다.
시안은 프시케를 데리고 유설을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훤히 해가 뜬 아침에, 당당하게 정문으로.
“여왕님의 명령이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도록.”
그러나 역시 입구에서부터 막혔다.
“잠시 불러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빙하백령의 그 누구도 시안 아그리드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시다.”
결국 시안은 빈손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뭐야 진짜!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시안은 크게 상관없었지만, 프시케는 잔뜩 뿔이 났다.
‘일단 무사한 건 확인했으니 좀만 기다려 보자. 이 이상 여기서 사고를 쳤다간 정말로 문제가 될 거다. 나뿐만 아니라 유설한테도 불똥이 튈 수 있어.’
[끙…….]
프시케도 시안의 옆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었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떼를 쓰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종전 협정은 바로 시작하여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수많은 책임소재와 배상 방안 등 협의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단기간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각국의 책임자와 외교관들이 머리를 싸매고 밀고 당기며 지지부진한 회의만 이어가는 동안.
시안은 오랜만에 돌아온 에버웨일에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설이랑 아직도 못 만났다고?”
“응.”
콰앙!
란의 주먹을 받아넘기며 시안이 대답했다.
한가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으로 보내고 있었고, 개중엔 란이나 샨, 다른 수인들과 대련을 하는 일이 잦았다.
주먹이 빗나가자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발차기를 날리는 란.
그 발을 피해 검을 내지르며 시안이 물었다.
“너도 본 적이 없다고?”
“어. 아예 건물에서 나오질 않는 모양인데.”
이상한 점은 란 역시 유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시안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란이나 샨이라면 거리를 오고 가며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설은 에버웨일에 도착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만 보내고 있는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쯤 되니 위화감이 들어왔다.
유설이 에버웨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부자연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왕이 유설을 처벌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에버웨일에 오는데 유설을 데려온다는 선택은 충분히 있을 법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를 위해 도시를 잘 아는 이가 필요했을 테니까.
그런데 굳이 건물에 가둬놓다시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랑 만날 것 같아서인가?’
그럴 법했다. 유설과 자신이 친분이 있다는 것은 유연이나 다른 반요정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일 테니까.
그게 걱정되어 유설을 근신시켜 놓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설마 유설도 의심을 받고 있나?’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유설은 프시케의 계약자이고, 지금도 계약의 끈은 이어져 있는 상태이다.
만약 여왕이 계약의 존재 여부를 알아챘다면, 그리고 유설이 자신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유설 역시 충분히 의심을 할 만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이런 곳까지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미끼란 뜻이겠지.
[안 되겠어.]
그날 밤.
평소와 같이 단련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직접 만나봐야겠어. 나 혼자라도 갔다 올게.]
달이 높게 뜬 밤하늘을 비추는 창가에 자리하고는, 그녀가 그렇게 얘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