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0화
엘리아.
그건 거인왕에게 들었던, 과거의 요정여왕의 이름이었다.
가르시아가 어째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 시안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과거 만났던 가르시아 여왕과 지금 눈앞에 있는 엘리아란 이름을 자칭하는 녀석은 완전히 다른 녀석이라는 것.
-콰가가가가가!
얼음의 창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미 부서져 있던 시계탑은 이제 형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인근 일대가 천재지변이라도 인 것처럼 완전히 갈아엎어졌다.
그 속에서.
-사악.
시안이 허공에 빙정을 휘둘렀다.
깨끗한 초승달을 그리는 그의 검로를 따라 빙정의 힘이 넘실거린다.
떨어져 내리는 엘리아의 마법과 비슷한 얼음의 힘. 하지만 빙정에 깃든 힘은 엘리아의 것과는 그 결이 달랐다.
채채채채챙!
시안의 검로를 따라 잔류한 힘이 얼음의 창을 모조리 튕겨내고 박살 내었다.
“역시나.”
엘리아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방금 사용한 것은 어지간한 고위 마도사가 아니면 사용하지 못할 대마법이었으나, ‘고작’ 그 정도로 마룡왕의 사도를 어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양 손바닥을 마주한 채 가로로 누인다. 그리고 그것을 위아래로 벌리니.
시안이 밟고 있는 대지가 움푹 꺼지더니, 동시에 크게 융기했다.
융기한 대지가 시안을 산 채로 묻어버리기 위해 쏟아져 내렸다.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한껏 검을 당겨 그대로 그었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마치 지평선을 그리듯 빙정이 허공을 가로 그었고, 융기한 대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에 그치지 않고 빙정의 힘은 갈라진 대지를 모조리 얼려 깨뜨렸다.
작은 얼음 결정이 눈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가운데서 시안과 엘리아가 서로를 쏘아보았다.
시안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조금 곤란한데.’
엘리아에게의 설욕전은, 언젠가는 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에버웨일은 현재 3국의 평화 협정을 위한 자리.
이런 곳에서 뭐 하러 괜히 소란을 일으키겠는가.
하지만 엘리아는 그따위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안을 몰아붙였다.
그녀의 양손에서 마력이 회오리치며 시안이 만들어낸 얼음 파편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동시에 만들어진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대로 시안에게 쇄도했다.
‘그쪽이 그럴 생각이라면.’
시안의 눈이 번뜩였다.
어지간하면 에버웨일에서의 충돌은 피하고 싶은 그였으나, 이렇게까지 달려드는 데도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몸에서 밤의 오러가 뭉클 쏟아져 나오더니 빙정을 감싸 안았다.
오러에 휩싸인 검을 들곤 그가 주저 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 했다.
“무슨 소란이냐!”
쿠우우우웅!
시안과 소용돌이가 충돌하기 직전,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시안이 급히 그 자리에 멈췄고, 엘리아가 소환한 소용돌이는 맥없이 흐트러지더니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장소에 그가 있었다. 얼핏 유성으로 착각했지만, 떨어진 것은 사람이었다.
겐 아슬라.
호월족의 당주이자 10명의 하이마스터 중 한 사람.
한껏 달아올랐던 전투의 열기가 그의 등장과 동시에, 강압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양옆의 두 사람을 힐끔 보고는, 여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르시아 여왕. 이쪽은 우리 손님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가 서슴없이 시안을 손님이라 얘기하며 여왕에게 쏘아붙였다.
얼핏 시안이 여왕을 암살하려 했다고 해도 될 법한 상황이었지만, 이 순간 겐이 본 상황은 전혀 달랐다.
둘 중 보다 살기에 찌들어 있는 쪽은 시안이 아니라 여왕 쪽이었다.
“겐 당주. 그대의 눈도 옹이구멍이 다되었군요.”
“뭣이?”
엘리아가 짙은 살의가 깃든 마력을 일절 가라앉히지 않고선 얘기했다.
전혀 마력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이자 겐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그에게 엘리아가 얘기했다.
“저자는 사악한 악마의 주구입니다. 그것도 말도 못 하게 강대한 이의.”
“강대한 이?”
“마룡왕. 시안 아그리드는 그자의 사도입니다.”
겐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룡왕. 그 이름은 겐 역시도 익히 알고 있었다.
최근……이라고 하기엔 시일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근래 사건도 몇 가지 있지 않았던가.
마룡왕이 주구가 아카데미를 덮쳤던 일이나, 정화교단의 기사단장이 마룡왕의 사도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일 등등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든 겐이 찌푸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마룡왕의 사도는 파멜라 드레이크가 아니었나? 오히려 이쪽의 시안은 파멜라의 정체를 밝힌 쪽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시안이 마룡왕의 주구가 아니라, 오히려 적이라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당연히 엘리아는 꿈쩍도 않고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자기들끼리 내분이라도 있었나 보죠. 그런 것은 전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엘리아가 시안에게 보내는 적의는 일절 가라앉지 않았다.
그 확신에 가득 찬, 한결같은 모습에 겐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시안을 보았다.
시안은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처구니없는 누명이에요.”
자신이 마룡왕의 힘을 가진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을 베고 육체의 힘을 흡수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마룡왕의 사도라는 엘리아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거짓말!”
엘리아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그사이,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반요정들과 수인들, 그리고 제국의 군인들.
시안이 눈을 찡그렸다. 그로선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라비가 흡수한 힘은 악마의 것과는 다른 힘이다.’
그것은 다른 악마의 힘처럼 정화되거나 여타의 방법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과거 확인한 바였다.
실제로 처음 가르시아 여왕을 만났을 때, 그녀는 시안에게서 악마의 힘을 감지하진 못했다.
단지 거인왕과 함께 다닌다는 것으로 그를 적대시했을 뿐.
‘그런데 마룡왕에게서 흡수한 기운만 감지한다고?’
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룡왕에 대한 범상치 않은 감정을 비치는 것을 보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예전에 있었던 모종의 일 때문에 마룡왕을 향해서만 사냥개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후각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시안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것이다.
중간에 있는 겐 아슬라 역시 이를 어찌해야 하나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느끼기엔 시안에게선 아무런 느낌도 풍겨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정들의 여왕이 저렇게 확신에 가득 차 말하는데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여왕에게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그때, 관중들 속에서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익숙한 얼굴을 보곤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총장님?”
“오랜만이네. 시안 학생.”
아카데미의 총장인 제레흐였다.
그가, 옆에 처음 보는 여성을 대동하곤 그들에게 다가왔다.
“가르시아 여왕. 마룡왕의 사도라고 하기엔 그에게선 그 어떤 흑마법사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제레흐?”
“물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어보는 엘리아를 향해 제레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여성에게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여성이 시안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곤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시안이 조금 당황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잡힌 손을 통해서 따스한 기운이 그에게 들어오더니 그의 몸을 샅샅이 훑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이분은 정화교단의 성녀라네. 오랫동안 우리 천도맹에 도움을 주고 계신 분이기도 하지.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귀신이거든.”
잠시 후, 손을 떼곤 성녀가 시안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곤 말없이 살포시 웃어 보인 후 제레흐에게 돌아가 귓속말을 하였다.
제레흐가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아에게 얘기했다.
“역시, 다시 한번 제대로 찾아보았지만 악마의 힘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구만.”
“말도 안 돼!”
엘리아가 거칠게 소리쳤다.
평소의 얌전한 여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반요정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엘리아가 제레흐에게 반론했다.
“정화교단의 성녀? 그런 자의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곳의 신성기사단장이 마룡왕의 사도라고 밝혀진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요?”
“쩝, 그건 또 아픈 구석을 찌르는구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제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정화교단은 그에 반대했네. 실제로 성녀님과 우리 천도맹은 함께 제국 내의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처단하고 다녔지.”
제국의 전력이 빠르게 깎여나간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곤 하나 그것을 백성들에게 모두 공표할 순 없는 노릇.
그렇기에 흑마법사의 존재는 여전히 숨어있었고, 제레흐를 비롯한 천도맹은 그 숨어 있는 이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대놓고 황실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놈들이었기에 천도맹 역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황실에 찍히긴 했겠지만.
“그 모든 게 배신을 위해 숨을 죽이고 있던 거라고 말하진 않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엘리아가 툭 내뱉은 말에 제레흐가 눈을 찡그렸다.
여왕과 시안. 아무리 봐도 두 사람 중에는 여왕 쪽이 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왕의 말에는 그럴듯한 논리나 정황이 전혀 없었다.
순전히 본인의 주장만을 펼칠 뿐.
제레흐가 한숨을 삼켰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시안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당사자인 시안이 입을 연 것에 제레흐가 반색하며 물었다.
“여왕님이 어째서 제게 그렇게 적의를 보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3국의 협정의 일과는 관련 없는 얘기일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협정을 일정대로 진행하시고, 여왕님과 제 일은 그 뒤로 보류하도록 하죠.”
“…….”
엘리아가 ‘이놈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나’, 그런 눈으로 시안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시안은 아무런 꿍꿍이가 없었다.
말 그대로, 중요한 일은 먼저 처리하고 우리 일은 그 뒤에 보자는 뜻.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습니다.”
시안이 엘리아를 마주 보며 얘기했다.
둘 사이에 오직 둘밖에 알지 못하는 눈빛이 서로 오고 갔다.
그건, 전투를 위한 투지였다.
엘리아가 눈을 감고 작게 숨을 고르더니, 이내 평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충혈되었던 눈도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하죠. 이 밤중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군요.”
엘리아가 마지막으로 시안에게 도장을 찍듯 한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녀의 뒤를 수호성의 기사들이 수행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얘기가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제레흐와 겐이, 남아 있는 시안을 보며 얘기했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 물어볼 요량이리라.
어디까지 얘기하면 좋을지. 시안은 괜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같이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이었으나, 그를 수행하고 있는 뒤쪽의 덩치 큰 사내는 눈에 익었다.
대장군 로데릭.
로데릭을 보곤 눈을 찡그린 시안이, 대장군의 수행을 받는 서글서글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인가, 공자? 나는 황제 폐하의 첫째 아들인 아이작이라고 하네.”
제국의 황자이자 그 헬레네의 오라비인, 1황자 아이작 폰 비스마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