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9화
시안은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란과 헤어져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프시케는 계속해서 시안을 재촉하고 있었다.
[뭐 해! 설아가 왔잖아! 당장 가보자!]
‘잠깐 기다려 봐.’
시안이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보았다.
빙하백령의 여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적막했던 도시가 꽤나 시끄러워졌다.
커튼을 쳐 창의 반 이상을 가린 채, 시안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일단 무사해서 다행이군.’
[정말로! 난 또 여왕인지 뭔지 하는 그년이 설아한테 해코지라도 했을까 걱정했잖아!]
‘해코지는커녕, 같이 마차에 타고 다닐 정도로 아끼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그간 걱정했던 일이 모두 해결되는 셈이다.
더해서 굳이 빙하백령에 갈 필요도 없어졌다. 그냥 이곳에서 프시케만 유설의 곁에 데려다주고, 자신은 떠나면 그만.
[빨리 가자!]
그러나 당장 가보자는 프시케를 시안이 달랬다.
‘지금은 안 돼.’
[왜?]
‘잊었어? 여왕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
가르시아 여왕과 시안의 관계는 결코 좋지 못했다. 정확히는 가르시아 여왕이 시안을 일방적으로 적대시하고 있다.
거인왕과 함께 다닌 것으로, 시안을 악마의 주구라 착각하고 있다.
‘잘 봉인해 두었던 내가 태평스럽게 나타나면 바로 소동이 일어날걸.’
[그것도 그렇겠네.]
‘일단 무사한 건 알았으니까 잠깐만 참아봐.’
[언제까지?]
프시케가 수그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창 바깥을 보는 시안은 가늘어진 눈으로 빙하백령에서 온 반요정들의 행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피며.
‘오늘밤에 움직이자.’
밤의 어둠을 틈타 유설만 몰래 접선을 하자.
그 자리에서 프시케를 무사히 건네주고 나면 자신이 할 일은 끝이다.
빙하백령으로 갈 필요도 없고 에버웨일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
그 길로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
프시케가 동의했고,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 틀어박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해가 떨어지고 짙은 밤이 찾아왔다.
밤 시간 특유의 고요함이 에버웨일에 내리 앉았고, 불빛 역시 모두 꺼져 있었다.
그때가 돼서야 시안이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코트를 몸에 두른 그가 창을 통해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
‘방향은 잘 봐뒀어. 그 길로 가다보면 놈들이 묵는 숙소가 나오겠지.’
빙하백령에서 온 이들도 족히 수십명은 되는 데다, 그중엔 여왕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한 일행이 묵을 숙소라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그 숙소 중 어느 방에 유설이 묵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만…….
[그건 나한테 맡겨!]
그건 프시케가 자신 있게 공언했다.
프시케의 힘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만, 그렇다고 유설과 그녀의 계약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 계약의 끈을 통해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가자.’
[응.]
그렇게 팔목에 하얀 뱀을 매달곤, 시안이 지붕 위를 뛰었다.
밤이 되어 더욱 짙어진 그의 오러가 전신을 둘러싸며 시안의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밤에 녹여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이동하다 보니 빙하백령의 숙소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곳곳에 수호성의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기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웠다.
‘저기다.’
[으음…….]
두 블록쯤 떨어진 건물 위에서 엎드린 채, 시안이 프시케의 말을 기다렸다.
[3층! 오른쪽 끝 방이야!]
‘좋아.’
얘기를 들은 시안이 품속에서 검지만한 아주 작은 단검을 꺼냈다.
칼날 부근에 쪽지가 단단히 매여 있는 단검이었다.
이윽고 단검을 밤의 오러가 감싸기 시작했다.
시안이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실하지? 3층 오른쪽 끝.’
[응. 확실해.]
시안이 오른팔을 당기곤, 손에 든 단검을 크게 투척했다.
밤의 오러에 감싸인 작은 단검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윽고 그것은 소리도 기척도 없이 3층 방의 창문을 뚫고 지나가, 그 안에 박혔다.
‘가자.’
[봤을까? 자고 있는 거 아냐?]
‘내일까지도 기다린다고 썼으니까 일어나서 보면 오겠지.’
쪽지를 전달한 시안이 그대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때까지 건물을 지키고 있던 수호성의 기사들은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한 채였다.
* * *
곧바로 시안이 찾아온 곳은 에버웨일의 중심에 있는 시계탑 쪽이었다.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광장으로, 연인이나 가족들이 산책을 하러 자주 오던 장소.
그러나 이 밤중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광장을 지나쳐 시계탑의 뒤쪽 그늘로 향한 시안이 그대로 벽에 기대곤 팔짱을 꼈다.
[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지금 이 도시는 시안에게 있어선 불안요소밖에 없었다.
당장 오늘 도착한 여왕은 물론이고, 어딘가에 있을 1황자나 대장군 역시 자신을 발견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가능성은 적었지만 아그리드 후작이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른다. 협정의 자리를 보고 싶다고 하며.
뭐가 됐든 지금 이곳은 온 대륙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곳이며, 조용히 자유롭게 살고 싶은 시안에게 있어선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저벅.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설의 발소리라고 생각한 시안이 벽에서 몸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도착한 이를 보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네요.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예요.”
헛웃음을 지으며 얘기하는 그녀.
유설이 아니라, 빙하백령의 여왕 가르시아였다.
“당신. 어떻게 봉인에서 빠져나온 거죠?”
“……유설은 어딨지?”
“제 질문에 답해드리면 알려드릴게요. 현실 세계와 격리된 봉인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죠?”
가르시아가 한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어조로 얘기했다.
시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우회했다.”
“우회? 아하…….”
가르시아가 금방 시안의 얘기를 알아듣곤 납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다시금 시안을 보며 도끼눈을 떴다.
“지옥계에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역시 그냥 흑마법사는 아니었네요. 혹시 누군가의 사도신가요?”
“글쎄. 그래서 유설은?”
“자고 있어요.”
이상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야 이 밤중에 자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유설의 방에 던진 단검을 여왕이 봤냐는 점이다.
혹시 단검이 창을 뚫는 순간을 감지했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던진 순간 건물이 너무 조용했었다.
불시의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좀 더 시끄러워졌을 텐데.
“과연…… 사도라……. 그렇게 된 거였군요. 이전에는 몰랐습니다만 지금은 확실히 보입니다. 당신에게선 놈의 힘이 느껴져요.”
“놈?”
“마룡왕. 그 두렵고도 강대한 존재의 힘이 느껴집니다.”
가르시아가 시안을 주시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그녀의 분위이가 차츰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안이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가 아닌, 마지막에 만났을 때의 그녀와 매우 닮아 있었다.
옛 고대시대 거인왕을 비롯한 온갖 거인을 봉인했다던, 엘리아의 봉인술을 쓰던 그녀와.
“마룡왕. 그자에겐 이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죠. 당신이 존재하는 한 이 땅에 평화는 없을 거라고.”
묘한 어조였다.
가르시아 여왕이 마룡왕과 접점이 있었다는 건가?
혼란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시안을 바라보는 여왕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증오나 혐오와는 다른.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올곧은 눈이었다.
그 곧은 눈이, 흔들리지 않는 살의를 담아 똑바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지 않은 거 아냐?]
‘그러게. 이럴까 봐 몰래 만나고 가려고 했던 건데.’
그 순간, 눈앞에 거대한 얼음구체가 쇄도했다.
시안이 즉시 검을 뽑아 구체를 베어냈다.
그러나 갈라진 구체는, 그대로 옆으로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터져 나갔다.
콰과과과과광!
구체의 파편이 회오리치며 시계탑을 강타했다.
건물의 기둥이 모조리 갈려나가며, 건물 전체가 굉음소리와 함께 주저앉기 시작했다.
“…….”
도심을 흔드는 굉음. 가르시아가 차가운 눈으로 무너져 내리는 시계탑을 보았다.
그곳엔 수많은 얼음 파편과 무너지는 건물 아래에서도, 상처 하나 없는 시안이 있었다.
-뎅뎅뎅뎅뎅뎅!
-일어나라! 적습이다!
도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오랜 세월.
아주 오랜 세월이었다.
거인과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요정여왕 엘리아는 수많은 거인들을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를 보았다.
마룡왕.
그 강대한 지옥의 군주가 호기심 짙은 눈으로 자신과 이 땅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후후, 결국 거인이 패했나. 해령궁주 그놈이 또 날뛰겠군.]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 떨지 않아도 된다, 요정의 아이야. 나는 딱히 그 녀석처럼 이 땅을 가지겠단 욕심은 없으니까.]
그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당대 최고의 마법사라 칭해지던 여왕조차 압도될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최고의 마법사였기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최고의 마법사인 그녀였기에 비로소, 지고한 존재인 마룡왕의 진면목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이 땅에 나타난 거죠?
[별거 아니야. 그냥, 호기심이 생겨서.]
마치 웃는 듯한, 혹은 비웃는 듯한 그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며.
엘리아는 오히려 더욱 몸을 떨었다.
차라리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말보다도, 호기심이 일 뿐이라는 마룡왕의 말이 더더욱 두려웠다.
‘해령궁주의 야욕은 요정과 수인과, 그리고 인간을 결집시켰다.’
강대한 적 앞에서 자신이 사는 땅을 지키기 위해 결집할 수 있었고, 간신히 이 땅에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룡왕이 상대라면?
본인이 적이 아니라는, 그저 호기심일 뿐이라는 저자가 상대라면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대륙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 어떤 적의나 야욕보다도, 순수한 호기심이 그녀는 더욱 두려웠다.
[기왕 나온 김에 조금 둘러보다 가볼까…….]
두려움에 떠는 그녀에게서 마룡왕은 바로 흥미를 잃었고, 이내 더 큰 흥미가 있는 이 세계를 보기 위해 날았다.
엘리아가, 국정을 뒤로한 채 연구실에 틀어박힌 것은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 * *
‘마룡왕. 역시 다시 나타났어.’
그로부터 수백 년.
엘리아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자신이 보았던 그 강대한 존재감을, 세상이 잊지 않게 만들 방법을.
‘사도…… 사도라곤 해도 느껴지는 힘이 매우 강하다. 그만큼 마룡왕의 총애를 받는 모양이지?’
도시 곳곳에 불빛이 켜지며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제국의 군인들과 자카르타의 수인들. 그리고 빙하백령의 요정들까지.
그러나 그들이 이 자리에 당도하기까진 아직 조금 남았다.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저는 힘을 쌓아왔습니다.”
가르시아가 시안을 보며 얘기했다.
참으로 기이한 말이었다.
반요정의 수명은 인간의 것과 비슷한데 어찌 수백 년의 세월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너…… 정말로 가르시아 여왕인가?”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검을 겨눴다.
그녀가 시안을 보며 작게 웃었다.
오랜 세월 동안 힘을 길렀다. 마룡왕을 기억하고, 또한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
그리고 눈앞에는 그 마룡왕이 총애하는 듯한 사도가 한 마리.
“엘리아라고 불러주시죠.”
그녀가 손을 들었고, 이내 하늘에서 거대한 얼음의 창이 수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을 뚫기 위해 정련한 얼음의 창.
시안의 눈이 가라앉으며,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그 손에 마룡왕이 아닌, 겨울의 힘이 담긴 검을 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