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57화 (15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7화

겐 아슬라와 만나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수인족은,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호전적인 종족이다.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주먹부터 맞대고 보며 딱히 그런 일이 없더라도 오랜만에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치고받고 보는 경우도 흔했다.

실제로 아슬라 가의 인물과의 대련만 해도 이걸로 세 번째가 아니던가.

란과 처음 만났을 때도 싸움부터 했었고, 샨과 처음 만났을 때도 싸움부터 했다.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이유가 다르기는 했으나 어쨌건 대련부터 있던 것은 사실이다.

겐 아슬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이마스터.’

아직 어리고 미숙한 란이나 샨과는 달리, 겐은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라는 점.

직접 그 실력을 본 것은 아니지만 소문만을 따져 보자면 제레흐 총장보다 반 수 앞서며, 그 아그리드 후작과 동급이다.

그 드높은 실력. 시안 입장에서도 호기심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마침 수련장으로 찾아왔군.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가지.”

시안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자세를 채 잡기도 전에, 땅을 박차는 소리와 동시에 눈앞에 겐 아슬라가 나타났다.

그의 주먹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시안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그 일격을 막았다.

-쩌엉!

주먹도 검도 그냥 내지른 것이 아니었다.

둘 모두 오러가 가득 담겨 있었기에 그 파장만으로 수련장이 흔들릴 정도였다.

‘설마 봐주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겐이 막힌 주먹에 운운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발을 뻗었다.

시안이 검을 회수하며 몸을 살짝 뒤로 빼 겐의 발차기를 피했다.

그러나 미처 다 피하지 못했다.

겐의 초승달과 같은 발차기가 시안의 앞섶을 길게 그으며 얕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봐줄 생각 따윈 없나 보군.’

처음에 먼저 달려든 것도 그렇고, 이 일격도 그렇고 단숨에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다.

손을 늦출 생각 따윈 전혀 없다는 겐의 마음가짐이 풀풀 풍겼다.

어지간한 하이나이트조차 단숨에 절명할 만한 치명적인 일격들이 시안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걸 막고 피하며, 시안이 가끔씩 그의 주먹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오러에 감싸여 있다곤 해도 장갑 하나 끼지 않은 맨주먹이다.

날카로운 검에 금방이라도 찢겨 나갈 것 같았으나.

-까앙!

무슨 돌덩이에 날붙이를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오히려 시안의 검이 더욱 떨려왔다.

결과적으로 시안의 검은 닿지 않고, 전반적으로 막아내기만 하는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겐의 맹공에 시안이 살짝 밀리고 있는 양상.

그러나.

“말도 안 돼…….”

그 ‘살짝’ 밀린다는 것에 뒤쪽에 물러나 있던 샨의 동공이 잔뜩 팽창됐다.

스승님, 시안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들 중에 강하다는 뜻이지, 결코 이 정도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세상에 아버님과의 대련에서 겨우 살짝 밀리는 정도라니!

한편 시안은 어지럽게 쏟아지는 겐의 주먹과 발에 대처해 가며 냉철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일단 자신이 밀리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더 여유가 있었다.

‘귀마와 싸울 때랑 비슷하군.’

왜냐하면 근 1년간 이 정도의 상대와 셀 수 없이 대련을 해왔으니까.

비록 귀마와 겐은 전투 스타일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도, 그 수준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마 귀마가 지옥계의 인간이 아니라 이곳 현계에 있었다면 대륙의 하이마스터는 10명이 아니라 11명이었을 것이다.

그 귀마와 1년 동안 매일매일, 먹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모든 시간을 대련과 수련에 매진했던 시안이다.

덕분에 겐 아슬라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차분히 겐의 주먹을 걷어내며 시안이 생각했다.

오히려 귀마 때보다 더욱 수월하다.

그렇다고 겐이 귀마보다 약한가? 그건 아니다. 상대해 본 입장에서 둘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달라진 건 자신이었다.

‘프시케랑 마룡왕의 기운까지 완전히 흡수했으니.’

달라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시안을 가장 강하게 해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마룡왕과의 전투. 놈의 목을 베었던 기억.

그 하나가, 그 무엇보다도 시안의 움직임을 완숙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허!”

겐이 탄성을 내질렀다.

죽고 죽이는 실전처럼까진 아니더라도, 그가 봐주지 않고 있는 것은 맞았다.

그런데도 시안의 방어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안이 방어적인 검술에 특화되어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순간순간 풍겨오는 날카로운 살기는 겐조차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고, 그건 결코 방어만을 고수하는 검사가 내뿜을 투기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피가 끓어오르더니만.’

그랬기에 지체 없이 대련을 청했다.

상대가 딸과 동급생이라는 사실은 일절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3살 아기에게도 배울 점을 찾는 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비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모양이구나! 아니, 아니지. 베르페드 그 자식조차 네 나이 때 이 정도는 아니었다!”

“…….”

애초에 베르페드 아그리드는 자신의 아비도 아니다,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금 시안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은 이름도 핏줄도 아니다.

겐과 맞서고 있는 실력 그 하나뿐이었다.

‘빈틈.’

그리고 시안이 겐의 빈틈을 찾았다.

그의 몸과 자세에서 찾은 것이 아닌, 정신에서 찾은 것이다.

지금 겐은 시안의 실력에 감탄하느라 아주 잠시 대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

일순간, 겐은 그의 검 끝에 의식이 빨려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미세한 찰나의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검 끝이 어느새 그의 눈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겐의 눈에 피가 쏠리더니 그 눈이 붉게 물들었다.

“크헝!”

카앙-!

그가 발을 올려 차 시안의 검을 쳐냈다.

이 한 수에는 시안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심한 순간 지금껏 쓰지 않고 있던 참마검을 사용해 기습을 걸었다.

실제로 그 노림수는 잘 먹혀들어가, 그의 지근거리까지 검을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자신이 그 지근거리를 메우는 것보다도, 저 아래쪽에서 올라온 겐의 발차기가 더욱 빨리 시안의 검을 쳐낸 것이다.

늦게 움직였음에도 더욱 빠르다니.

흑검이 속절없이 날아가 근처에 있던 나무 위쪽에 틀어박혔다.

“이게 끝이냐!”

겐이 야수와 같은 포효와 함께 빈손의 시안을 덮쳐왔다.

대련 상대가 무기를 잃었음에도 그 행동에는 일절 거리낌이 없었다.

고작 무기를 잃은 것으로 끝이냐, 그리 묻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아니었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나무에 박혀 있던 흑검이 비검으로 변하며 겐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시안 본인은.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달려드는 겐을 향해, 오히려 땅을 박차며 정면으로 쇄도했다. 그 손엔 지옥계의 냉기를 풍기는 만년빙정이 들려 있었다.

파멜라 드레이크와의 전투에서 비검과 검륜이 결합된 ‘암우’를 발현한 뒤로 라비와는 별개로 검을 운용할 수 있게 된 그였다.

“크흐흐!”

겐이 크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펼쳤던 그의 양손이 합쳐지며 거대한 기파를 두른 손이 시안에게 향했다.

그 손을 중심으로 거대한 오러의 흐름이 나선 형태를 그리며 쏘아져 나갔다.

[ 수왕기(獸王氣) - 진격(進擊) ]

겐의 오러와 시안의 오러.

도저히 그냥 대련으론 보이지 않는 두 공격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 * *

가문에 찾아온 손님이 가주의 수련장에 들어간 것을 알고는, 아슬라 가의 시종 하나가 약과 붕대를 챙겨서 수련장 앞에서 대기했다.

아슬라 가문에는 평소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드나들며, 개중엔 가주에게 대련을 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런 목적으로 아슬라 가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너덜너덜해진 손님이 대련장 바깥으로 쓰러지듯 튀어나오거나, 기절한 채 실려 간다.

그래서 약과 붕대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고 인영이 나왔다.

반사적으로 약을 챙겨 다가가려던 시종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멎고 말았다.

나온 것은 겐과 시안. 아니나 다를까 겐 아슬라가 너덜너덜해진 시안을 부축하며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부축을 하는 겐의 목덜미에도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검이 조금 더 깊었다면 경동맥을 잘랐을 겁니다.”

“그 조금의 차이가 너와 나의 메워지지 않는 실력 차이다 꼬마야.”

“끄응.”

겐과 시안이 투덕거리며 나오고 있다.

시종은 너무 놀라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가주의 몸에 상처라니.

일전의 전쟁에서, 제국의 대장군과 일기토를 벌였을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론.”

“아, 예!”

그때 겐의 부름에 시종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손님이니 잘 대접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론이 평소보다도 더욱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며 시안을 안내했다.

극도로 공손한 그의 안내를 받으며 시안이 출발일까지 며칠 머물 방을 안내받았다.

더불어 샨은, 너무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엉망이 된 수련장 내부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 * *

며칠이 흘러, 란이 돌아왔다.

사냥감을 잔뜩 가져온 그녀는 도시에 그것을 뿌리곤 가문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러곤 가문 내에 도는 시안의 소문을 듣곤 여러 의미로 깜짝 놀랐다.

“왜 여기 있는 건데?”

우선 집에 시안이 있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웠다.

거의 2년 전에 헤어져선 연락도 소식도 들려오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집에서 손님으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됐다. 빙하백령으로 가서 유설을 만나야 하는데, 마침 3자 협정 때문에 위쪽으로 올라간다고 하길래 중간까지 따라갈 예정이야.”

자카르타에서 가장 빠르게 빙하백령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에버웨일을 통과하는 것이다.

본래는 그곳이 아직 대장군에게 점령당해 있을 거라 생각해 빙 돌아갈 생각이었다만, 샨에게 대륙의 근황을 전해 듣곤 생각을 바꿨다.

아슬라 가를 따라 에버웨일까지 간 후에 거기서 헤어져 빙하백령으로 가는 쪽이 지금으로선 가장 빠른 루트다.

“유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이 있긴 하지.”

누가 봐도 얘기해 주지 않을 말투에 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캐묻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다음으로 그녀가 놀란 것은 가문 내에 퍼져 있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시안이 대련에서 아버지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것이었다.

“……진짜냐?”

“치명타는 아니었어.”

“그래도 목 부근이었다며?”

“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누군가?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하이마스터가 아니던가?

그런 아버지에게 대련에서, 손이나 옆구리에 생채기를 낸 것도 아니고 목에 상처를 냈다고?

샨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한 것처럼, 란 역시 단번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나랑도 한판 해!”

그녀가 그리 말한 날부터 이틀이 더 지났다.

3자 협정을 위해 에버웨일로 출발하는 날.

그리고 그날까지 란은 모든 대련에서 패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