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6화
공터에 피워진 모닥불에 멧돼지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샨이 잡은 멧돼지를 잘 해체하여 그중 일부를 굽고 있었다.
이윽고 고기가 딱 좋게 익자, 샨이 고기가 꽂힌 나뭇가지를 시안에게 건넸다.
“여기요.”
“잘 먹을게.”
오랜만에 보는 돼지고기였다. 멧돼지긴 했지만, 지옥계에서 먹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들보단 훨씬 익숙한 맛이었다.
지옥계에서 딱히 굶고 지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걸 먹으니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설마 여기서 스승님을 뵐 줄은 몰랐어요!”
샨이 흥분한 듯 높아진 톤으로 얘기했다.
시안도 몰랐다. 설마 마룡왕이 연 통로가 수인왕국 자카르타로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얼마 만이지?”
“아카데미에서 헤어지고 처음이니까…… 거의 2년도 넘은 것 같은데요?”
뭐 지옥계에서 지낸 시간만 해도 1년이 넘으니.
시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샨을 바라보았다.
“많이 컸군.”
2년 사이에 샨은 꽤 많이 자라 있었다.
아직 자신보단 작긴 했지만 키도 훌쩍 컸고 덩치도 자라다 보니 과거 병약했던 이미지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더불어 아카데미에서 많이 보았던 평범한 복장이 아니라, 수인족의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에이, 많이 크긴요. 아직 한참 멀었죠. 스승님 쪽이 오히려 더 어른이 되신 거 같은데요?”
“내가?”
“네. 키도 크고 뭐랄까…… 분위기도 좀 달라지신 것 같고.”
샨이 시안을 이모저모 뜯어보며 얘기했다.
시안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세수할 때마다 물에 비친 모습을 보거나, 원시 마법에 비친 모습을 거의 매일 봐왔으나, 자신이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매일 보는 자신이라 그런 거지, 남이 봤을 땐 달라져 보이는 모양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에버웨일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신 건 알겠는데 그 뒤는 감감무소식이었잖아요.”
“동쪽으로 가서 거인들이 더 남아있나 찾아봤어.”
“동쪽이요? 거인들의 무덤?”
“동쪽 끝을 한 번 밟았다가, 그 후엔 일이 생겨서 빙하백령 쪽에 갔었지. 근데 거기서.”
시안이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누구한테 한 방 먹어서 말이야. 어디 틀어박혀서 수련에 매진하다가 나온 참이야.”
빙하백령의 여왕 가르시아. 그 여자에게 봉인을 당하고 지옥계로 빠져나갔다.
해령궁주를 찾아 현계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예기치 않게 마룡왕과 조우했고, 어찌어찌 돌아올 수 있었다.
‘길긴 했군.’
말로 하면 짧지만 생각보다 긴 여정이었다.
이대로 해령궁주와 맞설 수는 없다는 생각에 프시케가 힘을 회복하고, 자신도 귀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스승님한테 한 방을 먹였다구요? 허…… 어떤 녀석이에요? 수호성의 기사장이라도 돼요?”
“여왕.”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시안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듣는 샨까지 자연스러울 순 없었다.
“……네? 여왕?”
“어. 가르시아 여왕. 어쩌다가 싸우게 됐거든.”
“대체 뭔 일이 있어야 일국의 여왕이랑 싸우는 꼴이…….”
“그건 비밀이야.”
샨이 혀를 내두르며 의문을 표했지만 거기까지 얘기해줄 순 없었다.
그걸 얘기하려면 거인왕의 일까지 말해줘야 했으니까.
‘거인왕은…… 죽었겠지. 아니면 또 봉인 당했거나.’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 것이다.
헥토르는 잘 도망갔을까? 그것도 신경 쓰였다.
딱히 녀석에게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무사하길 바랐다.
‘어차피 죽을 거 같으면 지옥계로 도망갔겠지.’
뭐 녀석은 잠시 헥토르의 몸을 빌릴 뿐이지 정체는 악마였으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긴 했다.
[시안! 설아는 어떡할 거야 설아는! 빨리 돌아가야지!]
‘그래그래.’
그때의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프시케가 다시금 재촉했다.
샨과 만난 것을 배려해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지만, 여왕의 얘기가 나오니 걱정을 참을 수 없던 모양이다.
일단 당면의 목표는 빙하백령으로 귀환하는 것.
시안이 샨을 보며 물었다.
“전쟁은 어떻게 됐지? 일전에 얼핏 듣기론 소강상태라고 하던데.”
“아, 네 맞아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제국이 빙하백령 쪽에서 거인을 많이 잃었대요. 그래서 전력에 불균형이 생겨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아마 자신 때문이었다. 빙하백령에서 여왕에게 고용되어 거인들을 잔뜩 처치하고 다녔으니까.
굳이 내색하진 않고 시안이 물었다.
“그래? 그럼 완전히 끝났어?”
“아직 종전 선언이 나온 건 아닌데…… 일단 제국이랑 빙하백령, 그리고 저희들까지 다 모여서 3자 협정을 하기로 했어요.”
이 정도면 소강상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끝났다고 봐도 되리라.
일단은 다행이었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 아그리드 후작이 여유가 생겨, 자신을 쫓는 데 힘을 쏟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후작가의 추격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후작 본인이 오지 않는 이상은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3자 협정이라…….’
그나저나 일단은 당면 목표에 대한 게 중요했다. 빙하백령으로 돌아가는 길.
“너희 가문에서도 협정 자리에 가?”
“그럼요. 저희도 대표 중 하나죠.”
샨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침 잘됐군. 내가 빙하백령 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도중까지라도 괜찮으니까 따라가도 될까?”
“당연하죠. 오세요, 오세요. 아버님한텐 내가 잘 말씀드릴게요.”
“고맙다. 아 그러고 보니 협정 장소는 어디지?”
제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인 만큼 제국에서 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리 물으니 샨이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에버웨일이요.”
한때 그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구가하고 있던, 아카데미가 있는 그 도시였다.
* * *
샨은 남은 한 무더기의 고기를 자루에 잘 싸 들곤 시안을 집으로 안내했다.
울창한 밀림을 두어 시간 정도 뛰어다니니, 이윽고 하나의 도시가 비치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아마 집에 계실 거예요. 누나는 지금 잠깐 사냥을 나가서 며칠 후에나 돌아올 거구요.”
“그래?”
“전후 복구 때문에 요즘은 어딜 가나 다 바쁘거든요. 나나 누나는 다른 일엔 손재주가 없어서 열심히 사냥이라도 다니고 있어요.”
그 커다란 멧돼지를 잡으러 왔던 게 영지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도시에 가까워지니 복구로 한창인 시끌벅적한 모습이 보였다.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있는 도시.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 덕분인지 수인들의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너희 아버지가 있는데도 도시가 이렇게나 피해를 입었어?”
겐 아슬라. 이 도시를 지배하는 아슬라 가의 가주이자, 대륙에 열 있는 하이마스터, 그중에서도 위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이다.
이런 이가 지키고 있는 도시가 이렇게 부서지다니.
“아 그게…….”
시안의 물음에 샨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진 그의 설명은 길지는 않았다.
제국 측에서, 대장군이 찾아왔었단 얘기였다.
“대장군이 직접?”
“네. 아무래도 저희 가문을 뚫지 않고는 자카르타를 계속 침공할 순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해보려고 온 모양이에요.”
아슬라 가의 입지는 자카르타 내에서도 제국 쪽에 치우쳐져 있다.
만약 그들이 침공을 오더라도 앞에서 든든하게 막아줄 왕국의 요새.
“그때는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아버님이 이겼어요! 두 사람의 승부는 나진 않았지만, 둘이 싸우고 있는 새에 제국군이 패퇴했거든요.”
샨이 이번에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무훈을 자랑하는 어린 아들과 같은 모습이다.
뭐 실제로도 어린애기도 하고.
‘어찌 됐든 결과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야.’
그 일이 있은 후 제국은 몇 번 더 아슬라를 찔러보았으나, 결국 뚫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사이에 빙하백령 쪽에서 거인을 다수 잃고, 제국은 전쟁을 지속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제국 입장에선 매우 나쁜 결과겠으나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먼저 침략전쟁을 시작한 것이 그들이니, 패배의 책임도 그들이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 책임을 얘기하기 위한 것이, 얼마 후에 에버웨일에서 열린다는 3자 협정이다.
‘이런 식으로 그곳에 돌아가게 되다니.’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아그리드의 별저에 갇혀 있던 자신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터를 잡았던 곳.
그러나 제국과 제국의 대장군 로데릭의 위협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곳.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 보려고 생각은 했었다. 제레흐 총장이 맡긴 원시 마법에 대한 것도 있으니까.
그런데 설마 그곳에서 종전 협정을 하게 될 줄이야.
“다 왔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아슬라 가에 도착했다.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단 작았다.
지키는 경비도 따로 없었고, 그냥 조금 커다란 저택 같은 느낌이었다.
샨의 뒤를 따라 울타리를 지나가니 바로 보이는 것은 넓게 펼쳐진 수련장.
그곳에서 다른 수인들이 자유롭게 단련을 하거나 대련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사냥은 성공했어요? 킁킁, 고기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샨이 온 것을 보곤 몇몇 수인들이 모여들었다.
굉장히 친근한 모습.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샨이 유릭에게 작게 얘기해 주었다.
“문하생들이에요. 아버님한테 무술을 배우고 있는.”
과연. 가문을 지키는 기사 같은 이들이 아니라 가주의 제자인 모양이다.
“어라? 뒤에 있는 분은?”
“수인이 아니네요?”
그들도 시안을 발견하곤 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샨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얘기했다.
“내 스승님이야.”
“스승님이라면 그…….”
“아가씨의 친우분이시라던?”
그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안을 보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시안이 주목을 받는 것에, 왜인지 샨이 어깨를 으쓱거리곤 얘기했다.
“아버님을 뵈러 가야돼서. 갈게.”
“아, 예. 가주님이라면 뒤쪽 수련장에 계실 거예요.”
“고마워.”
그들에게 손을 흔들곤 샨이 그들이 알려준 수련장으로 향했다.
시안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넓은 것은 맞았으나 후작가의 성이나 유 가의 요새보다는 작았기에, 두 사람은 금세 수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안이 본 것은, 무척이나 어지럽혀 있는 수련장이었다.
잘 정돈된 것과는 거리가 먼. 곳곳에 나무와 바위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어 있고, 땅 역시 패이지 않은 곳이 없어 무척 울퉁불퉁했다.
보통 수련장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바닥만은 고르게 다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수련장이라기 보다는 금방이라도 실전을 치른 것 같은 모습.
그곳에 그가 있었다.
삼강의 하이마스터 중 하나, 호월족의 산군(山君) 겐 아슬라.
“왔구나 샨. 뒤쪽은 손님이니?”
샨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얘기했다.
“제 스승님이에요. 일전에 얘기했던.”
“호오?”
겐의 눈이 조금 위험하게 번뜩였다.
비록 샨은 훌훌 털어버렸다고 해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던 샨이 바깥에 나갔다가 구타를 당하고 들어온 날을 말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샨이 스승이라 부르는 작자가 아니었던가.
“자네가 시안이로군. 그 아그리드의.”
“예,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겐 아슬라.”
“반갑네. 나도 아주 반가워.”
그가 시안을 스윽 훑어보았다.
“과연.”
그러고는 무엇을 봤는지 혼자 끄덕이며 납득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일이 있었다곤 하지만, 지금은 샨과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더군.”
“잘 따라주는 샨이 고마울 따름이죠.”
“샨도 다 털어버린 듯하고 길가다가 투닥거리는 것쯤이야 흔한 일이니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곤 시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걸 평범한 악수 신청이라곤 보지 않을 것이다.
숨 쉬기가 어려워질 정도로 압박감이 느껴지는 투기를, 숨길 생각도 없이 뿜어내고 있는 겐 아슬라를 본다면 말이다.
“자네를 보니 무척이나 흥미가 샘솟는구만. 어떤가. 자네는 날 보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나?”
시안이 그의 손을 보았다.
그러곤.
“아마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군요.”
고민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