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5화
라비가 힘을 모두 빨아들이자 마룡왕의 육체는 모두 녹아 사라졌다.
순간 파멜라의 시체가 생각나 시안이 그곳을 살폈지만, 그곳에는 없었다.
아무래도 마룡왕이 떠나면서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계약이라고 했으니 알아서 지키겠지.’
일단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파멜라의 시체를 찾겠다며 놈을 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렇게 받아도 문제였다.
경과가 어찌 되었든 파멜라를 죽인 건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샤밀라에게 파멜라의 시체를 넘겨주러 가겠는가.
‘나중에…… 확인은 하러 가볼까.’
일단은 후일을 기약하며, 시안이 그대로 풀숲에 털썩 엎어졌다.
전투가 끝나고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뚫린 배에서 엄청난 격통이 올라왔다.
가려운 듯한, 뜨거운 듯한, 자그마한 벌레들이 파먹고 있는 듯한 끔찍한 고통.
얼음으로 막아놓았다지만 고통이 어딜 가는 것은 아니다.
“괜찮으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귀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안이 힘없이 그쪽을 돌아보니, 귀마 역시 똑같이 수풀에 엎어져 있었다.
이전보다 주름이 더욱 늘고 흰머리도 짙어진 느낌이다.
그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귀마는요.”
“난 괜찮다. 좀 쉬면 나아.”
“저는 좀 쉬는 정도론 안 되겠는데, 혹시 외상에 잘 듣는 약 같은 거 없습니까?”
시안이 딱히 허세 부리는 것 없이 약이 있나 물어보았다.
괜히 허세를 부리다간 진짜 골로 갈 것 같아서였다.
“집 근처에 텃밭이 있긴 한데. 한숨만 돌리고 가자꾸나.”
“그러죠.”
시안이 자글자글 올라오는 고통에서 신경을 돌리곤, 그대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룡왕의 등장과 함께 잿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놈의 퇴장으로 다시 푸르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래쪽 지상에 보이는 일렁이는 게이트.
마룡왕이 열어놓고 간 현계로 가는 통로.
당분간은 남아 있을 테니 상처만 좀 치료하고 들어가면 되리라.
그렇게 정리하곤 눈을 감으려던 시안이.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저거 어느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지?’
시안은 빙하백령 쪽에서 지옥계로 들어왔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시케도 데려다주고 여왕이랑도 깊은 면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마룡왕이 연 통로가 빙하백령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바다 깊은 곳이나 용암 속은 아닐 텐데.’
그 마룡왕이 그렇게 치졸하게 굴 것 같진 않다.
뭐 프시케와 마룡왕의 힘까지 흡수한 지금은 그런 곳에 떨어지더라도 무사할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 나오면 다시 가면 되니까.’
이내 그렇게 정리하곤, 시안이 눈을 감았다.
근래 들어, 아니, 평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하루가 지나갔다.
* * *
시안과 귀마는 나란히 귀마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싸움의 전말을 들은 프시케는 시안의 보고에 크게 놀랐었다.
-뭐? 기껏해야 잘 도망이나 치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겼다고?
그녀 입장에선 경악할 만한 소식이었다.
귀마라는 정체불명의 강한 인간이 옆에 있었다곤 하나 그 마룡왕을 패퇴시키다니.
-완전히 이긴 건 아냐. 결국 도망갔으니까 비긴 정도지.
-그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리고 육체를 완전히 뺏어왔다며? 그거면 이긴 거나 마찬가지지 뭐.
시안의 승리에 놀라고, 이윽고 본인의 생환에 기뻐한다.
그러던 프시케는 이내 빨리 현계로 돌아가자고 독촉을 해대었다. 설아가 어떤지 보러 가야 한다며.
계약의 끈은 무사히 이어져 있기에 목숨이 위험하거나 하진 않다고 한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시안도 빨리 돌아가고 싶긴 했지만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 요양을 하게 되었고, 프시케는 매일같이 마룡왕이 만든 게이트 앞에서 닫히지 않도록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은.
-퉁퉁.
“어, 어어. 고맙다.”
한땐 서로 죽일 듯이 싸웠던 목 없는 기사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집 옆에 있는 텃밭에서 외상에 효험이 좋은 약초를 따와 사발에 넣고 빻는다.
그리고 깨끗한 약수를 섞어 찐득하게 만들고는 시안의 상처에 치덕치덕 발라주었다.
귀마 쪽은 다른 약초를 따와 푹 고아서 먹이고 있다.
목 없는 기사의 간호라니 뭔가 흠칫거리는 장면이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많이 익숙해졌고.
몸의 회복과 동시에 시안은 마룡왕의 힘을 녹여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많기도 하군.’
마룡왕의 기운은 지금까지 흡수해왔던 그 어떤 기운보다 방대했다.
다른 기운들이 강줄기 정도라면 마룡왕의 것은 대해와도 같았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 프시케의 기운 정도.
여러 기운들이 뒤섞여 있는 시안의 몸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예전이었으면 이대로 마룡왕이나 프시케의 기운에 휩쓸렸을지도.’
이전의 시안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프시케의 기운을 한 번 받아들인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참마검을 익혔다.
온갖 마의 바다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창안된 참마검의 묘리는, 수많은 기운 속에서 시안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다른 악마들이나 흑마법사에게서 뽑은 기운, 거인의 기운, 영약의 기운.’
그런 수많은 기운들이 시안의 안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이전 같았으면 다들 고만고만한지라 큰 영향이 없었으나, 프시케와 마룡왕의 기운이 짓쳐들어옴에 따라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 기운들을, 시안이 중심을 잡고 하나하나 정리해 갔다.
‘오히려 마룡왕의 힘이 있으니까 편한 점도 있군.’
마룡왕의 기운이 질도 양도 압도적이기에 다른 기운이 쉬이 딸려온다.
마룡왕의 기운만 잘 유도할 수 있다면 다른 기운을 정리하는 것엔 큰 문제가 없었다.
시안이 눈을 감은 채로, 뒤섞인 모든 기운을 분류하고 분해했다. 마룡왕과 프시케의 기운을 중점으로 잡스러운 기운들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렇게 모든 기운들을 단둘로 만들었다.
타오르는 용의 기운과 차디찬 얼음의 뱀의 기운.
그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 순환한다. 뒤섞이진 않았지만 마치 한 몸처럼 엮여 회전하고 있었다.
그 모든 작업을 마치고 시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쌍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과 작은 뱀, 그리고 목 없는 기사.
“……뭐 하는 겁니까?”
“일어났나?”
“예 뭐. 제가 잠시 정신을 잃고 있던 모양이군요.”
시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러던 그가 문득 떠올라 배를 만져보았다.
고통이 전혀 없다. 살펴보니 커다랗게 뚫려있던 구멍이 완전히 메워져 있었다.
흉터만 남았을 뿐.
[한 달 지났어.]
“뭐?”
[너 한 달이나 자고 있었다고.]
프시케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그리 얘기했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거냐는 듯.
시안은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잠에 빠져 있던 것 같은데, 한 달씩이나 지났다고?
“그동안 이놈이 꾸준히 약을 발라줬다.”
귀마가 목 없는 기사의 어깨를 토닥이며 얘기했다.
“고맙다.”
시안이 감사 인사를 전하니, 기사가 살짝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머리가 없으니 어깨로 의사 표현을 하는 모양이다.
“몸은 괜찮니?”
시안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일단 상처는 모두 나았다. 하지만 한 달이나 먹고 마시지 않았으니 문제가 있을 터였다.
“괜……찮네요.”
그러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공복과 갈증이 다소 느껴질 뿐, 몸이 야위었다거나 허한 기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기 전보다 훨씬 가볍고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그걸 보며 귀마가 피식 웃었다.
“축하한다. 한 달 동안 잠만 퍼질러 잔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한 달이나 누워있었다고 하는데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몸도 다 나았고.’
그렇다면 이제 지옥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가는 게냐?”
귀마가 물었다.
“귀마는 어쩔 생각입니까?”
“난 아직 놈의 목을 취하지 못했다.”
시안의 물음에 귀마가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이 담겨 있었다.
“놈이 친절하게도 자기 위치를 알리고 사라졌으니, 놓칠 염려도 없어.”
“괜찮으십니까? 놈은 육신을 버린 탓에 평범한 검은 통하지 않는데.”
“지금의 내 검으론 힘들지.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지.”
귀마가 얘기했다.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마법을 익히러 가겠다고.
마법을 배워 마법으로 놈을 죽이겠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마법을 익혀 또다시 새로운 검을 만들어 보겠다 한다.
영혼밖에 남지 않은 놈을 베기 위한, 단 한 번의 칼질을 위해.
“너도 현계로 돌아갈 테니 이대로 작별이군.”
귀마가 손을 내밀었다. 시안이 그 손을 맞잡았다.
1년이 넘는 시간. 지옥계에서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냥 보낸 것도 아니고 검을 사사하기까지 했다.
마룡왕과의 일전에선 함께 고투했던 전우이기도 했고.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이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찾아뵙겠습니다.”
“그러거라. 기왕이면 맛 좋은 고기랑 술도 가져오고.”
귀마와 작별을 나누고, 간병해 준 목 없는 기사와도 악수를 나누고.
시안이 프시케를 팔목에 감은 채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곳에는 마룡왕이 열어놓은 게이트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안이 주저 없이 뛰어들었고, 그와 프시케를 삼킨 게이트가 이윽고 지옥계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 * *
게이트에서 나온 시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초 했었던 걱정. 게이트가 빙하백령이 아닌 다른 곳에 열려 있을까 하지 않았던 것.
‘진짜 아니네.’
아니나 다를까 전혀 다른 곳이었다.
살을 엘 듯한 추위와 어딜 둘러봐도 하얀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는 빙하백령과 다르게, 시안이 나타난 곳은 열대의 숲이었다.
춥기는커녕 오히려 덥고 습한 곳.
빽빽이 자란 나무와 덩굴들이 가득하고 새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사위를 가득 울리고 있었다.
적막했던 빙하백령과는 정반대였다.
[앗! 여기 어디야!]
“일단 빙하백령은 아니네.”
[그 자식, 대체 어디다 통로를 열어둔 거야! 내가 있는 걸 알면 센스 있게 빙하백령으로 열어놨어야 하는 거 아냐!?]
“마룡왕은 내가 너랑 같이 현계에서 올라왔다는 건 모를걸.”
[응? 그랬던가?]
“얘기한 적도 없고, 너랑 내가 원래 알던 사이였다는 것도 모르고.”
아마 마룡왕은 자신이 모종의 방법으로 지옥계에 왔다가, 그 후에 프시케와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빙하백령으로 통로를 열어준다는 발상은 없었겠지.
잠시 주변을 둘러본 시안은 이내 이곳이 어딘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마룡왕이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도 있으니 아마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때.
-쿠웅!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것 같은, 땅을 울리는 굉음.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니, 커다란 멧돼지가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한 남자아이.
녀석과 시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스승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많이 자란, 품이 넓은 무복을 입고 있는 녀석.
호랑이와 같은 귀와 꼬리를 가진 샨 아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