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3화
상황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마룡왕이 수많은 운석을 떨어뜨리며 이 근방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고, 프시케는 그 운석들로부터 시안과 귀마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자처했다.
그 결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녀 역시 마룡왕의 손에 의해 죽게 된다.
그렇기에 내린 결단이리라.
하지만.
“프시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랜 세월 쌓아온 힘을 넘겨준다는 결단을 그리 쉽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이게 최선이니까.]
“…….”
[그리고 너는…… 설아의 친구이기도 하고.]
프시케가 점차 줄어드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시안이 그녀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불현듯 지난날 지옥계를 횡단하며 그녀와 지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무사히 현계로 돌아가고, 전쟁도 모두 끝나고 나면 또 여행이나 갈까.”
[뭐? 내가 왜…….]
“유설이랑 같이.”
[……설아가 좋다고 하면.]
시안이 쓰게 웃으며 라비를 불렀다.
프시케에게 대고 있는 손 위에 라비가 자리했다.
이미 한차례 족쇄를 연결했었던 사이다. 그 연결이 둘 사이에서 느껴지며.
그녀의 힘이 울컥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우, 우웅!’
라비가 당혹스럽게 시안을 보았다.
힘이 들어온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힘이 지금껏 본 적 없던 커다란 것이었기에.
지금껏 라비는 많은 악마들의 힘을 흡수해왔지만 대악마의 힘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정확히는 해령궁주의 힘의 끝자락 정도는 얻은 적이 있다.
다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그것도 악마 본인이 자진해서 내어주는 힘은 처음이었다.
‘차갑다.’
차가운 냉기가 시안의 안에 스며들어오며 밤의 오러와 공명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프시케의 그 차디찬 공기는 라비의 밤의 오러와 무척 상성이 좋았다.
더욱이 다른 악마들처럼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프시케 본인이 내어주고 있는 중이다.
그녀에게서 시안에게까지, 겨울의 힘이 조금의 손실도 없이 그대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시안 본인이 그것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는가 없는가.
‘…….’
그가 힐긋 옆을 보았다.
마룡왕은 귀마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다.
녀석은 노인의 몸과 용의 몸을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귀마를 몰아갔고, 귀마는 꿋꿋이 검을 휘두르며 녀석에게 잔 상처를 새겨갔다.
조금 관찰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마룡왕이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 때는 마법의 위력이 아득히 올라간다. 술식의 정교함뿐만 아니라 들어가는 마력량 자체가 달랐다.
반대로 용의 모습일 때는 조금 더 육탄전에 치중하는 느낌.
아무래도 용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적지 않은 마력이 소모되는 모양이었다.
뭐 어찌 됐든.
녀석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지금 밖에 없다. 힘을 온전히 소화시킬 기회는.
시안이 눈을 감고 차분히 프시케의 힘을 받아들였다.
주인이 건네주는 것이어서 그런지 그것은 시안의 안에서 따로 날뛰거나 하진 않았다.
때문에 힘을 유도하는 것 자체는 쉬웠지만.
‘문제는.’
시안 자신의 힘과 하나로 섞일 수 있는지.
아무리 프시케의 냉기와 밤의 오러가 상성이 좋다고 해도, 전혀 다른 힘이 하나처럼 섞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후우.’
시안이 조용히 호흡을 조절하며 프시케의 힘을 흡수해 갔다.
그 숨결에 점차 조금씩 냉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들어오는 힘은 방대했고, 그걸 모두 소화하는 것엔 짧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마룡왕이 귀마에게 한 눈이 팔려 있더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시안에게서 눈을 뗄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든 모두 허튼짓이다!]
마룡왕에게서 고열의 마력체가 쏘아져 나왔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축 늘어져 있는 프시케.
시안을 죽일 수는 없으니 옆에 있는 프시케를 마저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콰과과과광!
그러나 그 사이를 귀마가 끼어들었다. 그의 검이 마룡왕의 마법을 베어냈다.
그도 지금은,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채였다.
[어지간히도 거슬리게 하는군!]
마룡왕이 그 커다란 용의 몸으로 그대로 달려들었다.
귀마가 피하려 하였으나 이번엔 마룡왕이 한발 빨랐다. 파앙! 놈이 크게 손을 휘둘러 귀마를 그대로 쳐냈다.
용의 몸에 비해 귀마는 개미만큼이나 작았고, 때문에 속절없이 날아가 땅속에 처박혔다.
마룡왕은 귀마를 추격하지 않고, 프시케를 마저 끝장내려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녀석이 몸을 회전시키며 꼬리로 프시케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러나, 그 꼬리가 프시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뭣……!]
꼬리가 절반 부분에서 서걱 잘려 나갔다.
그에 그치지 않고, 잘려나간 꼬리가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파사삭 깨쳐나갔다.
산산이 부서져 얼음 가루가 되어버린 마룡왕의 꼬리.
그 앞에서 시안이 푸른빛의 검을 들고 허공에 서 있었다.
“프시케.”
그가 작게 얘기하자 프시케의 거대한 몸이 점차 줄어든다.
다시 이전처럼 작달막한 뱀이 된 그녀가 시안의 팔목에 스르르 감겼다. 그러곤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죽지 마…….]
“걱정해 줘서 고맙군.”
[너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
잠에 들며 작게 중얼거리는 프시케의 말소리에 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가 쥔 푸른 검에서부터 밤의 오러가 흘러나와 검과 함께 시안의 몸도 감쌌다.
동시에 그것은 어둡게 하늘을 덮으며 퍼져 나갔다.
기존의 청량한 밤공기와도 같던 밤의 오러는, 지금은 혹한의 밤을 방불케 하였다.
[……쓸 만한 장난감 하나 얻은 모양이구나.]
시안이 표정을 굳히며 검을 들었다.
그것은 마룡왕의 목덜미에 꽂아 넣을 수 있는 비수였다.
* * *
검령, 만년빙정(萬年氷精).
푸른빛을 띠는 그 검은, 창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거친 듯하면서 유려한 창해와는 달리 빙정은 얌전하고 투박하다.
보는 것만으로 시선을 빼앗길 새하얀 순백의 색상이 아니라면 평범한 철검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보는 것만큼 얌전한 녀석은 아니었다.
사위를 덮은 시안의 오러에 비해 검의 냉기는 일절 새어 나오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탓에 내부는 더욱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악마로 군림하던 프시케가 쌓아온, 초저온의 에너지체가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의식이 빨려 들어갈 것 같군.’
그렇게 위험하였으나, 그랬기에 시안은 오히려 믿음직스러웠다.
이 정도도 되지 못한다면 마룡왕의 심장에 칼을 꽂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흥.]
마룡왕이 노인의 몸으로 변하더니 다시금 이글거리는 마력을 쏘아댔다.
시안이 탁, 탁, 허공을 밟고 뛰며 놈이 쏘아낸 마력을 검 끝으로 살짝, 스치듯 베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마룡왕의 마력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깨져 나갔다.
마룡왕이 수십 발의 마력을 더 쏘았으나 시안은 모조리 피하며 베어냈다.
채채채챙!
허공에서 깨어 흩어진 얼음 조각들이 비산하며 반짝거렸다.
마룡왕이 눈을 찌푸렸다.
‘손재주가 좋군.’
겨울의 뱀은, 이 정도로 힘을 섬세하고 유연하게 쓰지는 못했다.
놈의 힘은 대악마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걸 다루는 것엔 다소 투박함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어지간한 고위 악마와 싸우게 되더라도 힘으로 다 찍어 누를 수 있는데 뭐하러 섬세하게 힘을 운용하겠는가.
하지만 시안의 손에 들린 검은 달랐다.
그것은 겨울의 뱀과 동급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극도로 압축되어 시안의 손에 의해 펼쳐지고 있었다.
힘의 낭비가 일절 없는 완벽한 운용.
겨울의 뱀이 리타이어하며 1:3이 1:2가 되었지만, 오히려 마룡왕은 국면이 더욱 까다로워진 것을 느꼈다.
뭐라 해도.
“이쪽이다, 이 도마뱀 놈아!”
귀마 역시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었으니까.
쿠웅! 땅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그가 노인의 몸을 하고 있는 마룡왕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룡왕이 훌쩍 뒤로 날아 그의 검을 피했다.
귀마가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곧바로 쫓아오자, 마룡왕이 배리어를 펼쳐 그의 검을 막았다.
동시에 그가 반대쪽 손으로 뒤쪽에도 배리어를 펼쳤다.
쾅!
그쪽엔 어느새 다가온 시안의 검이 있었다.
‘본신의 몸으론 잡기 힘들다.’
마룡왕이 눈을 찡그렸다.
그의 본신은 너무나 거대하여, 귀마나 시안 같은 작은 인간을 상대하기엔 적합하지 못했다.
노인의 모습을 하여, 본신을 유지하는 마력을 마법 쪽으로 돌리는 것.
그게 가장 적합한 상대법이었으나.
‘마법만으로 상대하기도 쉽진 않군.’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콰앙!
마룡왕이 크게 한 번 폭발을 일으키곤 그대로 훌쩍 위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손가락을 튕기니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작은 용들이 쏟아져 내렸다.
“또 그거냐!”
귀마가 크게 소리치며 검을 그었다. 휙휙 긋는 것처럼만 보이는데도, 그가 한칼 그을 때마다 수십의 용들이 떨어져 나갔다.
시안 쪽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을 그을 필요도 없다. 작은 용들은 그의 근처에도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근처에만 가면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날개를 멈추고 땅에 떨어졌다.
빙정이 품은 냉기가 아닌 시안이 가진 밤의 오러만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안이 거슬리는 잡졸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
얼어붙은 작은 용 하나의 가슴을 뚫고 불쑥 팔이 솟아났다.
어느새 접근한 마룡왕이 용의 가슴을 관통하여, 동시에 시안의 배도 꿰뚫었다.
배에서 올라오는 불같은 격통에 시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가 이를 악물곤, 마룡왕의 팔을 붙잡았다.
설마 이 상태에서 붙잡을 줄은 몰랐다는 듯 마룡왕이 흠칫 놀랐다.
“잘했다, 꼬마야!”
허공에서 귀마가 떨어져 내리며 검을 그었다.
[커헉!]
마룡왕의 등에 기다란 자상이 생기며 피가 뿜어졌다.
시안 역시 반대쪽 손으로 빙정을 들어 녀석을 찌르려 하였으나.
[이 잡것들이!]
마룡왕이 거칠게 팔을 비틀어 뽑더니, 뒤로 날아 피했다.
격통이 한층 더 심해져 검 끝이 흔들린 탓에, 빙정은 도망치는 녀석에게 닿지 못했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마룡왕의 등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니까.
“괜찮으냐?”
귀마가 물었다.
“그렇게 좋진 못합니다만.”
시안이 적당히 대답하며 몸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밤의 오러가 그의 뚫린 배 쪽에 모이며 그대로 얼려서 강제로 지혈했다.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으나, 당장 피를 멈추려면 방법이 없었다.
귀마의 눈이 가라앉았다.
‘전투가 길어지면 안 되겠어.’
과거 그는 마룡왕과 7일 밤낮을 싸운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길어지면 시안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내가 신호하면 결정타를 날리거라.”
“예?”
귀마의 말에 시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호는 또 뭔 얘기며 결정타는 어떻게 날리라는 말인가? 그걸 쉽게 할 수 있었다면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아무튼 하라면 해. 신호가 뭔지는 바로 알 수 있을 거다.”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귀마가 마룡왕을 향해 뛰었다.
동시에 그의 오러가 들끓기 시작하며 피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빛나는 눈과 일그러진 얼굴.
귀마라는 이름처럼, 그야말로 악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가 참격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