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0화
쿠르르릉-!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당장 태풍이라도 올 것 같이 하늘이 요동친다.
그 하늘에 녀석이 있었다.
마룡왕.
온 하늘을 뒤덮어 어둠을 드리우는 거룡.
“마룡왕!”
귀마가 당장에 놈을 향해 뛰었다.
그가 오러를 모은 발로 허공을 밟으며 마룡왕에게 쇄도했다.
[후. 또 네 녀석인가.]
마룡왕이 지루한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손가락 하나로 허공을 찍었다.
그러며 시안을 힐끔거렸다.
[이 노친네를 상대하고 있을 동안, 넌 이들이랑 놀고 있어라.]
녀석이 찍은 하늘이 쩌적 깨어지며 날개 달린 용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마룡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녀석들이었다. 그럼에도 시안보다는 훨씬 커다랬지만.
그런 작은 용들 수십, 수백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허공을 가득 메웠다.
파멜라가 단숨에 점프하더니 그중 한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검 대신 한쪽 손에 금색의 오러를 둘러 만든 랜스를 쥐었다.
광휘의 창.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파멜라와 비슷하게 한 마리 붙잡아 올라탔다.
그러나 그는 파멜라처럼 용을 다루지는 못하였기에.
푸슉!
“크아아아!”
그냥 목을 갈라버렸다.
백화를 쥔 그의 손이 용의 목을 가르곤 그 몸을 하얀 불꽃으로 불태웠다.
날개짓이 멎고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용.
놈이 채 떨어지기 전에 시안이 뛰어 다른 용의 등에 다시 올라탔다.
나름 저항한다고 몸을 비트는 용들이었지만 올라탄 이상 최후는 같았다.
시안의 백화에 목이 떨어져 나갈 뿐.
“시안 아그리드!”
파멜라를 태운 용이 그런 시안을 향해 쇄도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용은 그다지 위협이 아니었지만, 파멜라가 들고 있는 광휘의 창은 위협적이었다.
막 용의 목을 자르려던 시안이 그걸 멈추곤, 용의 머리를 우득 틀어쥐었다.
그러곤 괴력을 발휘해 놈의 상체를 올려 앞을 막았다.
푹!
“크어어어어!”
파멜라의 창에 꿰뚫린 용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곤 떨어져 내린다.
파멜라가 칫, 혀를 차며 광휘의 창을 뽑았을 땐, 시안은 이미 다음 용을 향해 뛴 후였다.
용들 사이를 뛰어 다니며, 때로는 비검을 이용해서 시안은 착실하게 용들의 숫자를 줄여 나갔고.
파멜라는 그런 시안을 방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의 더 높은 상공 위에선 귀마와 마룡왕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불과 벼락이 하늘을 뒤덮으며 귀마를 압박했고, 귀마는 허공을 밟으며 마법을 피해 마룡왕을 베려 했다.
그러나 기어코 마법들을 뚫고 검을 내질러도.
마룡왕의 비늘이 빛이 나며 귀마의 검격을 막았다.
위도 아래도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끝이 없군.’
또 한 마리의 목을 베어 떨어뜨리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라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숫자가 너무 많다.
얼핏 보기에 마룡왕과 귀마의 싸움 역시 백중지세.
이런 상황에 의미 없는 소모전만 잇고 있을 순 없었다.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하고 마룡왕을 쳐야 한다.
‘웅! 웅웅!’
그때, 라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침 비검이 되어 용들 사이를 날고 있던 라비.
비검이 시안에게 돌아오더니 그의 손에 얌전이 쥐였다.
‘라비?’
‘웅!’
검에 깃들어 있는 갖가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여러 악마들을 처리하며 흡수해왔던 다종다양한 기운들.
본래는 칼같이 구역을 나눠 나뉘어져 있던 그것들이.
‘섞이고 있어?’
지금은 조금씩 흘러 섞이고 있었다.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혼탁하게 섞이고 있는 다양한 기운들 사이에서, 하나의 기운만은 중심을 잡듯이 빛나고 있다.
그건 비검의 기운이었다.
유일하게 라비가 조종할 수 있는 그 검.
‘참마검의 묘리가 라비에게도 영향을 준 건가?’
시안이 귀마와 함께 참마검을 수행하고 깨달으면서, 라비 역시 영향이 없을 수 없었다.
시안이 휘두르는 수천, 수만 번의 검결을 라비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다양한 기운들 속에서, 라비의 기운만은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었다.
그 결과.
파지지지지직-!
라비의 비검에 다른 기운이 깃들었다. 그건 뇌명의 번개였다.
시안이 검을 놓으니, 벼락을 두른 비검이 용들 사이로 쏘아졌다.
“이게 무슨……!”
콰과과과광!
파멜라가 진심으로 당황했다.
시안이 쓰던 날아다니는 검은, 그 자체로도 위협적이긴 하였으나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피하지 못할 것도 없었고, 위력도 시안 본인의 검보다 훨씬 약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까까지와는 천지차이였다.
한줄기 벼락이 용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걸리는 용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다녔다.
‘더 강해졌다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더 강해진다고?
파멜라가 시안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죽인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 눈에 짙은 살의가 깃들었다.
지금까지는 그를 사로잡으려 해왔다. 팔다리 정도는 날릴 생각은 했지만 목숨까지 뺏을 생각은 없었다.
왜냐면 그를 죽이면 마룡왕이 진노할 테니까.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두 눈으로 시안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녀석이 사도가 되면 나는 100% 버려진다.’
지금까지는 시안이 사도가 되면 마룡왕이 자신과 함께 2명의 사도를 둘 거라 생각했다.
비록 자신은 뒷방으로 밀려나겠지만 그래도 버려지진 않을 거라고.
그랬기에 마룡왕의 진노를 사고 싶지 않아 시안을 살려 가려 하였으나, 이젠 알 것 같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안 아그리드의 재능은 압도적이다.
그를 손에 넣게 되면 마룡왕은, 쓸모없어진 자신 따위는 바로 버려버릴 것이다. 모든 힘을 시안을 키우는데 집중할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시안을 죽이고 마룡왕에게 벌을 받는 것이 낫다.
어찌 됐든 마룡왕에겐 사도가 필요하다. 시안을 잃게 되면 자신에게 무척이나 진노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버리진 않겠지.
오히려 강력한 사도 후보를 잃은 만큼 현 사도인 자신을 더욱 버리지 못하리라.
‘지금 죽여야 돼.’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죽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지금 말곤 없었다.
이 자리에서 놓친다면 다음에 만날 땐, 정말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을 테니까.
그녀가 용들과 함께 시안을 포위했다.
넓게 오러를 흘려 용들의 행동을 유도했다.
지금처럼 각개격파 당하지 말고 일제히 시안을 공격할 수 있도록.
“라비.”
그러나 시안도 놀고만 있진 않았으니.
파멜라가 막 입을 열어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하늘에서 검은 오러를 두른 검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파멜라가 헛숨을 삼켰다.
“……!”
검륜의 능력을 쓴 수백 자루의 도검이 파멜라와 용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 *
마룡왕과 귀마의 전투는, 이 설산의 지형을 바꿔놓고 있었다.
용이 쏘아낸 숨결 한 방에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리고, 노인이 휘두른 검격 한 번에 눈사태가 일어난다.
허공에서 충돌하는 기파에 수없이 지형이 터져 나갔다.
[그 어렸던 놈이 설마 다 늙은 노친네가 될 때까지 날 쫓아다닐 줄이야. 질리지도 않느냐?]
“닥쳐라.”
[네가 이런다고 네 나라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거늘.]
“……!”
귀마가 스산한 눈길로 검을 휘둘렀다. 시안과 대련할 때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귀기가 서린 눈빛이었다.
마룡왕이 귀마를 떨어뜨리기 위해 수백의 마법을 쏘아 보내지만 그것들은 참마검에 모조리 막혔다.
아직 씨앗 수준인 시안의 참마검에 비해 귀마의 검은 이미 완성된 것.
그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
그런 둘의 눈에 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들의 아래쪽에서 펼쳐지던 전투. 그곳에서 수백의 용들이 검은 오러의 비에 떨어져 내리는 광경.
[…….]
“…….”
마룡왕도 귀마도, 그 일순간만큼은 눈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안이 떨어져 내리는 용들을 밟고 올라, 파멜라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 * *
그토록 강하고 까다로웠던 신성기사단장이었지만, 심장에 검이 들어가는 느낌은 똑같았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쿨럭.”
이윽고 피를 토하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무의식중에 오러가 피어오르며 어떻게든 생을 부지해 보려 하였지만, 이미 꺼져가는 생명의 불길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남길 말은?”
시안이 물었다. 아마 그녀라면 하고픈 말이 있을 것 같아서.
딱히 그녀가 이뻐서, 그녀를 위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동생을 위해서였다.
“…….”
파멜라의 눈에 짙은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눈에 과거 어렸을 때의 광경이 비쳤다.
무너져 내린 마을. 거친 사내들이 휘저으며 친하던 이웃들이 모조리 피를 흘리고 쓰러져 내리던 그 날.
눈앞에서 자신을 지키고 죽어나간 부모님.
기절한 동생을 품에 안고 있는 자신.
-아…….
절망에 가득차 바라본 하늘은, 야속하리만치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한 노인의 등장과 함께.
그 꼴 보기 싫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며, 세상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마룡왕.’
그와의 첫 만남. 그때 이후로 자신의 인생은 돌변했다.
‘부모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스스로를 바쳐서라도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그러나 되지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고, 마룡왕의 힘을 양껏 빌릴 때에 한해선 하이마스터와도 견줄 만하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평범한 농부였던 부모님의 강인함을 쫓아가지 못했다.
두 분은 자신과 동생을 지켜주었는데, 자신은 동생 하나조차 지키지 못했다.
“샤밀라는…… 관계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수많은 말이 입에 맴돌았으나 나온 것은 그것뿐이었다. 단 한 마디 남길 수 있는 생명력을 그녀는 오로지 이 말만으로 써버렸다.
“참고 하지.”
시안이 칼을 반 바퀴 비틀며 뽑았다.
헤집어진 심장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그에 비례해 그녀의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다.
현존하는 마룡왕의 유일한 사도, 파멜라 드레이크.
그 끝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본디 죽음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허무한 법이었으니.
[크헝!]
그 순간, 하늘에서 거룡이 입을 벌린 채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다급히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마룡왕이, 그 커다란 몸에 비하면 한낱 미물밖에 되지 않는 파멜라의 시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삼키는 순간, 파멜라의 사체를 감싸는 마나의 막이 얼핏 보였다.
“의외로군.”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이의 삶과 죽음 따위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이던 마룡왕이, 사도였다곤 하나 인간을 보호하려 하다니.
[큰 의미는 두지 말거라. 계약이었거든.]
“계약?”
[항상 동생의 곁에 있게 해달라고 했었지. 일이 잘못되어 이렇게 되어 버렸다만 시체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겠느냐?]
“……어처구니없군.”
파멜라가 샤밀라와 떨어지게 된 건 파멜라가 놈의 계약자였기 때문인데.
파멜라는 결국 죽어 시체가 되고 나서야 다시 동생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눈을 찌푸리며, 시안이 고개를 들어 마룡왕을 보았다.
산과 같이 거대한 드래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귀마가 내려와 시안의 옆에 섰다.
[하나 있는 사도가 가버렸으니, 이제 다음 사도를 찾아야겠구나. 그 김에 오래된 귀찮은 연도 끊어버리고.]
마룡왕이, 그 두 사람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