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9화
황금빛 세상에서 오로지 시안만이 밤의 오러에 휘감겨 이질적인 색을 보이고 있었다.
오러에 휩싸인 검을 치켜들곤 시안이 파멜라에게 달려들었다.
등 뒤에 묘한 광륜을 달고 있는 파멜라 드레이크.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치고 봐야 하리라.
그런 생각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가던 시안이.
“……!”
도중에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묘한 기시감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시안이 곧바로 방향을 틀어 옆으로 뛰었다.
직후, 허공에서 황금색의 빛줄기가 떨어지더니 시안이 있던 자리를 파괴했다.
그것은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시안을 추적하며 계속해서 떨어지는 빛줄기.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피해야만 했다.
‘끝이 없어.’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이길 수 없다. 틈을 봐서 반격을 해야 한다.
시안이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둘러 떨어지는 빛줄기를 쳐냈다.
그리고 막 달려가려던 순간.
앞을 보니, 어느새 파멜라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검을 당기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못 죽여요.”
콰앙!
“실력이 안 되거든요.”
시안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파멜라의 검을 막긴 했으나, 검에 밀려서 날아간 것이다.
동시에 시안이 박힌 벽을 향해 몇 줄기나 되는 빛이 쏟아졌다.
시안은 고통을 감내할 새도 없이 곧바로 몸을 날려 피해야 했다.
퉤.
흙먼지가 들어간 꺼끌꺼끌한 침을 뱉어내며 시안이 얘기했다.
“남에게 빌려온 힘 가지고 재기는.”
“…….”
파멜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사실, 그녀도 마룡왕의 힘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빌린 힘을 쓰지 않고 그녀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걸 헤쳐 나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만으론 시안을 붙잡는 것에 실패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룡왕의 힘까지 사용했다.
때문에 시안의 말은 그녀의 가슴에 정곡으로 박혔다.
“뭐라 지껄이든 상관없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자가 승자니까.”
그녀가 울컥 올라오는 울분을 꾹꾹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동시의 그녀의 뒤쪽에 있는 광륜이 한층 더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곳에서 수십 개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파멜라의 앞에 모여 한 자루의 거대한 창을 만들어내었다.
거인이 사용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란 창이었다.
파멜라가 그걸 붙잡아 시안에게 던졌다.
“…….”
시안이 눈을 부릅떴다. 빛의 창이 날아오는 것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비쳐왔다.
거대한 오러가 담긴 그것을 보니,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귀마와 대결할 때,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격을 쏟아내던 순간.
-놈이 뭔 짓을 하더라도 다 무시하고 목만 벨 생각이었지.
귀마가 얘기했다. 참마검은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고.
참마검의 묘리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
어떤 상황에도, 얼마나 강대한 공격이 다가와도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를 관철하는 강철의 의지.
-철이란 건 말이다, 마법보다도 먼저 인간에게 짐승과 마물들을 극복할 힘을 안겨준 물건이란다.
시안의 검에서 밤의 오러가 화악! 피어올랐다.
그 검과 창이 부딪쳤다.
그리고, 금색 오러로 이루어진 창을, 시안의 오러가 파고들어 가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반으로 갈라진 창이 시안의 양옆을 날아가 애꿎은 건물만 부수곤 사라졌다.
그 가운데 서서 시안이 밤의 오러를 흩뿌리고 있었다.
“어떻게 마룡왕의 힘을……!”
자신이 던진 창이 갈라졌단 사실에 파멜라가 입을 벌렸다.
그냥 쳐내거나 피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걸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창은 마룡왕의 힘으로 빚어낸 창이었다!
심지어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룡왕의 힘으로 만들어낸 이 빛의 공간을, 시안의 밤의 오러가 서서히 잠식하며 존재감을 늘려가고 있었다.
금색 오러가 시안의 오러를 침범하려 몇 번이나 부딪치고 있지만, 시안의 오러는 뚫릴 기색이 전혀 없었다.
“큭!”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위기감에 파멜라가 급히 공격을 이어나갔다.
광륜잉 빛나면서 수십 개의 빛줄기가 날아가 시안에게 쇄도했다.
시안이 검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허공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그 손에 씐 밤의 오러를 향해 수십의 빗살들이 모조리 한곳에 뭉쳐 유도되었다.
그렇게 뭉친 빛살들의 궤도를 틀어놓곤, 시안이 검을 휘둘러 뭉텅 잘라버렸다.
“조금 단단하긴 하군.”
그래도 자르지 못할 것도 없다.
여유를 찾은 시안을 보며 파멜라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체면도 뭣도 없다.
광륜이 빛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지랑이 속에서 용과 닮은 생명체가 튀어나왔다.
일전에 파멜라가 도주할 때 타고 있던 그 녀석.
녀석이 크게 홰를 치며 높이 날아오르더니, 시안을 향해 브레스를 꽂았다.
콰아아아-!
“라비.”
시안이 흑검을 비검으로 변환시켜 던졌다.
검은색 오러를 풍기는 비검이 녀석의 브레스를 정면에서 가르며 날아갔다.
브레스가 너무도 간단히 파훼되고, 공중에서 용과 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라비를 믿는다는 듯, 공중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시안이 검륜을 꺼내 파멜라와 대치했다.
파멜라는 계속해서 빛줄기를 떨어뜨리며 검을 휘둘렀지만, 이제 와서 그것들이 시안을 위협할 순 없었다.
심지어 허공에서 싸우는 본인의 용 때문에 빛살의 궤도가 제한되어 더욱 약해졌을 정도였다.
“큭!”
마룡왕의 힘이 담긴 빛줄기를 오러로 모두 베어내며, 시안과 파멜라는 오직 검술만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그 대치에서.
‘왜 내가 밀리는 거지……?’
파멜라가 시안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참을.
파멜라가 이를 악물며 허공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용 역시, 시안이 날린 비검에 의해 압도당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2:1인데 어째서!”
그녀는 비검도 시안이 조종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시안이 굳이 사실을 얘기해 주진 않았다.
‘2:2니까.’
비검은 오롯이 라비가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시안이 하는 것은 밤의 오러를 덧씌워준 것뿐.
그럼에도 파멜라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라비의 움직임엔 그간 시안이 익힌 검술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시안은 흑검을 휘둘렀고, 라비는 그 검에 깃들어 시안의 모든 검술을 몸으로 체득했다.
다른 검술들은 물론, 상천검과 참마검 역시도.
저런 작은 용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악-!”
용의 척수에 비검이 박히고, 파멜라의 광륜이 시안의 검에 의해 산산조각 깨져 나갔다.
아무리 빌려온 힘이라지만 그것을 운용하고 있던 건 파멜라 본인.
광륜이 깨어진 충격으로 그녀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마, 말도 안 돼!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성장했다고?’
그녀의 눈동자가 수없이 떨려왔다.
과거 시안과 조우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시안은 분명, 또래보다 강하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
시안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했던 대로, 그는 파멜라를 이대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인간이기에 라비의 힘으로 족쇄를 채우거나 하지 못한다.
잡아서 고문이라도 한다면 칠흑마탑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괜히 틈을 주지 말고 그냥 죽이는 게 낫다.’
그러다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 일이다.
정보고 뭐고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던 시안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뒤쪽에서, 살기가 포함된 압박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를 멈추게 했다.
척수에 비검이 박혀 떨어졌던 파멜라의 용이 있는 쪽이었다.
[역시 내 눈은 옳았어. 내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다, 꼬마 인간아.]
파멜라가 소환한 작은 용.
그 용에게 마룡왕이 강림했다.
* * *
척수에 꽂혀 있던 비검이 강제로 밀려 나간다. 라비가 애를 쓰며 그대로 꽂혀 있으려 하였지만, 마룡왕의 기운을 라비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검이 뽑혀 나가며, 용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도 모조리 재생되기 시작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패여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낫는 것을 보니, 이보다 기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낫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룡왕이, 자신이 강림한 잠깐 동안만 사용하기 위해 용의 몸뚱어리를 강제로 기우고 있는 것이었다.
강림이 해제되는 즉시, 저 작은 용은 온몸의 상처가 터져나가 죽게 되겠지.
[오랜만이구나. 그간 잘 지낸 모양이지.]
그러나 이깟 용 한 마리에 일희일비할 마룡왕이 아니었다.
녀석의 관심사는 오로지 시안뿐이었으니.
“마룡왕…….”
시안이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일순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마룡왕이 강림했다는 것 하나에,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그의 검에선 오러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훗.]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의를 잃지 않는 시안을 보며 마룡왕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정말로 기쁜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눈에 익은 검을 익혔던데…… 귀마와 만난 것이냐?]
“…….”
[그거 하나 믿고 기세등등해진 널 보니 참으로 안쓰럽구나. 결국 놈은 패배자일 뿐인데.]
감히 한낱 인간의 몸으로, 마도의 마자도 모르는 미물 주제에 강철검 한 자루로 자신을 베겠다 날뛰었던 어리석은 노인.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룡왕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 만나서 한 수 배웠는진 모르겠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의기양양한 시안을 보니 귀여울 지경이었다.
[뭐 상관없지. 네 녀석이 무슨 검을 익히던 내 화신체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마룡왕이 크게 입을 벌렸다.
그 입안에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까 작은 용이 쏘았던 브레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운이.
시안이 잔뜩 긴장하며 오러를 피어 올렸다.
저 기운의 양을 보면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아야 했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으렷다?]
놈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리고 브레스를 쏘았다.
아니, 쏘아내려 했다.
-서걱!
[……!]
브레스를 쏘기 직전에. 마룡왕의 목이 잘렸다.
쿵, 용의 목덜미가 땅에 떨어져 흙먼지를 피어 올렸다.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이제 목을 내놓겠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귀마가, 목을 잃은 마룡왕의 뒤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방금 막 잘려나간 용의 피가 그 검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네놈…….]
땅에 떨어진 용의 머리가, 눈동자만 굴려 귀마를 보았다.
마룡왕이 그대로 무어라 얘기하려 했지만, 그보다 귀마가 빨랐다.
귀마의 검이 용의 머리를 수십 조각으로 잘라 육편으로 만들어버렸다.
“귀마…….”
“방심하지 마라. 이걸로 끝일 리가 없으니까.”
시안이 그를 부르자, 귀마가 얘기했다.
그 말대로 귀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절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아 있던 용의 몸통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잘려나간 목에서 솟구쳐 오른 피가 허공으로 수놓더니, 그대로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내었다.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꼬맹아.]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리며, 마법진이 열렸다.
동시에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며 천둥벼락이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