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8화
한 달 만에 내려와 본 설인들의 마을은 핏물로 뒤덮여 있었다.
시안도 지금은 많이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처음 사막에 떨어져 이 얼음의 땅까지 여행을 오며 시안이 느낀 것은, 지옥계는 대륙 전체가 무법 지대와도 같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힘이 있는 자만이 법도가 되고 규칙이 되는 세계.
그랬기에 그 사막에서 지렌 카자르가 그랬던 거겠지.
지옥계로 온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시안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
그저, 발치에 쓰러져 있는 작은 털 뭉치의 위에 꽃 한 송이를 얹어줄 뿐.
시안이 그러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파멜라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 아그리드……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그 질문은 어째서 이 얼음의 땅에 있냐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어째서 이 세계에 있냐는 뜻이겠지.
시안은 그녀의 마음이 무척이나 공감이 갔다.
왜냐면 그 자신도 파멜라를 보며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까.
“대답할 이유가 없군.”
“…….”
“네년은 마룡왕이 불러들였나 보지?”
“……저도 대답할 이유가 없는데요.”
파멜라가 가라앉은 눈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그 손은 검에 묻은 설인들의 피를 천천히 닦고 있는 중이었다.
“어쩐지, 천도맹의 추적에도 잡혔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더라니.”
시안은 혼자 납득했다.
파멜라가 천도맹의 그동안 천도맹의 추적을 피할 수 있던 이유가 이것이었으리라.
아무리 칠흑마탑의 인물이라도, 그 칠흑마탑이 제국의 황제와 연결이 있다고 해도.
하이마스터만 셋이 속해 있다는 천도맹에서 흔적 없이 도망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막말로 다른 세계로 도망가는 수준이 아니고서야.
‘그러고 보면 프시케의 말이 맞았어.’
처음 지옥계에 왔을 때, 현계로 돌아가기 위한 대화에서 프시케가 했던 말이 있다.
아마 마룡왕을 찾아가면 뭐가 됐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놈이 모르는 일은 지옥계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프시케의 그 말은 추측성 발언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론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파멜라를 지옥계에 불러들여 숨길 수 있다면, 반대로 지옥계에서 현계로 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테니까.
‘시안 아그리드.’
한편, 파멜라가 시안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녀석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지옥계에 불러들였는지.
그러나 그런 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놈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까발려 정화교단에 있을 수 없게 만든, 동생인 샤밀라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만든 그 밉디미운 남자가.
‘겨울의 뱀을 찾는 건 다음으로 미뤄도 되겠죠?’
파멜라가 속으로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마룡왕이 끄덕입니다.]
[눈앞의 꼬마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오라 얘기합니다.]
파멜라가 이곳에 온 것은 겨울의 뱀의 사역마가 나타났단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의 뱀이 오래도록 얼음의 땅을 비우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 일.
그런데 갑자기 사역마라고 하는 이가 등장했다. 그래서 혹시 겨울의 뱀이 영토로 돌아왔나 하여 찾아온 것이다.
찾아서, 싸워보기 위해서.
마룡왕과 같은 대악마의 서열이라곤 하나 겨울의 뱀은 다른 대악마보다는 격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여차하면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찾아온 이 북쪽 대지에서 설마 시안 아그리드를 만날 줄이야.
자신도, 자신의 주인인 마룡왕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파멜라가 검을 닦은 천을 버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시안이 흑검을 꺼내 든다.
그걸 보며 파멜라가 피식 웃었다.
“전에는 당신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혼자뿐이군요.”
“…….”
“시안 아그리드. 당신 혼자서 절 상대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해보면 알겠지.”
“미리 말하지만.”
파멜라가 툭 땅을 박찼다.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직후, 그녀가 시안의 뒤에 나타나 그의 뒤통수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다급히 몸을 돌려 파멜라의 검을 막은 시안이었지만.
콰아앙!
그 충격마저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는지, 시안의 신형이 쭈욱 밀려났다.
자세가 흐트러지는 시안.
그가 자세를 가다듬기 전에 파멜라가 다시 거리를 좁혀 검을 올려쳤다.
그녀의 검에 휩싸인 오러가 맹수와도 같이 포효하며 시안을 덮쳐왔다.
“제가 아직도 그때와 같은 저일 거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콰아아앙!
그녀의 황금색 오러가 시안을 완전히 뒤덮으며 지상에 떨어졌다.
단단히 얼어붙은 땅이 속절없이 바스라지며 지형이 커다랗게 패여 갔다.
그곳에 서 있던 인간 따위 형체도 남김없이 박살 내버릴 듯한 위력.
하지만.
‘손맛이 없어.’
파멜라는 방심하지 않았다.
아직 시안을 베진 못했다. 그녀는 그리 확신했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났을 사내라면 마룡왕이 집착할 리가 없다.
이제 곧 반격이 오겠지.
그걸 예상하곤 그녀가 단단히 방비의 준비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훅!
연기를 뚫고 시안의 흑검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파멜라가 웃었다.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 모든 전투의 흐름이 그녀가 생각한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걸 쳐내고…….’
그다음엔 놈의 무릎을 향해 페이크를 줘보자. 상대가 반응하지 못하면 그냥 베어버리면 되고, 반응하더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릴 순 있으리라.
그리고 그다음엔…….
그렇게 다음 수, 그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던 파멜라.
그녀의 표정이 굳은 것은.
캉!
시안의 검을 받아낸 직후였다.
‘……어?’
뭔가 이상하다.
뭔가가 잘못된 느낌. 그 짧은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으며.
콰아앙!
쿠웅!
파멜라의 신형이 저 멀리 날아가 건물에 처박혔다.
시안이 검을 내리곤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벅.
돌을 밟은 소리가 적막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파멜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건물에 박힌 몸을 빼내었다.
“확실히 그때랑은 다르군.”
시안이,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는 파멜라를 향해 얘기했다.
“더 약해진 거 같은데?”
그러자.
으득-
부서져라 이를 가는, 기분 좋은 소리가 시안의 귀에 들려왔다.
* * *
확실히 과거엔 파멜라가 경지가 더욱 높았다. 당시 시안은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걸칠락 말락 하는 수준이었고, 파멜라는 이미 몇 년 전에 마스터에 도달한 이였으니까.
시안이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놓칠 수밖에 없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카앙!
“……!”
가늘게 떨리는 파멜라의 눈. 그리고 그녀의 목을 노리고 나아가는 시안의 흑검.
지금은 달랐다.
대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시안이 파멜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큭!”
파멜라가 일순간 크게 오러를 일으켜 시안의 검의 궤도를 흐트러뜨리려 했다.
어찌나 밀도가 높은지 검과 팔에 가해지는 압력이 범상치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의 검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나아갈 뿐이었다.
‘원시 마법 속이 훨씬 무거워.’
강한 압력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야 지난 1년간 매일같이 해왔던 일이 아니던가.
푸슉!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안의 검에 파멜라가 황급히 상체를 틀었고, 그녀의 어깨가 베이며 길게 상처가 났다.
자신의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본 파멜라가, 이내 이를 악물곤 땅을 밟았다.
쿵!
그녀가 몸을 돌진해 어깨로 시안을 그대로 밀쳤다.
“…….”
시안이 뒤쪽으로 뛰며 눈을 찌푸렸다.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곤 하나 역시 쉽지만은 않다.
목을 노린 일격은 어깨를 베어내고 끝이 났고, 곧바로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파멜라가 먼저 반응하여 자신을 밀쳤다.
파멜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초 그녀는 순식간에 시안을 제압해 납치할 생각이었으나, 이미 그건 물 건너갔다.
시안의 실력을 보면 단숨에 제압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 모두 이번 전투가 수월하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으나.
보다 초조한 것은 파멜라 쪽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만약 겨울의 뱀이 난입하면 어떡하지?’
그녀는 이 땅에 겨울의 뱀이 돌아왔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녀석이 대악마 중에서 가장 격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이 지옥계에서 가장 높은 서열을 가진 악마다.
만약 겨울의 뱀이 난입한다면 자신과 시안의 싸움은 흐지부지될 게 뻔하였다.
‘마룡왕의 지령은 반드시 잡아오라는 것.’
그리고 그녀는 결코 시안을 놓칠 수 없었다.
일전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그리드의 영지였고, 시안의 동료들이 주위에 가득했으니.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렇게 1:1의 상황에도 그를 붙잡아가지 못한다면 크게 문제가 된다.
‘안 그래도 마룡왕은 나보다 저 녀석에게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처음 시안을 사도로 삼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마룡왕은 자신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얘기했다. 아직 발전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그것은 자신이 만족할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으리라고.
반면 시안에겐 가능성이 보인다 하였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도맹과 정화교단에게서 동생을 빼내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이제 와서 마룡왕에게 버림받을 수는 없었다.
‘쓰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후우. 그녀가 크게 숨을 고르며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졌다.
한파를 막고 날붙이를 막기 위한 마법이 걸린 외투였으나, 방금 시안에게 찢겨 걸려 있던 마법이 파손되었다.
그렇게 되면 그냥 거추장스러운 천에 불과했다.
그러곤 그녀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드러난 그녀의 피부를 따라 황금색으로 빛나는 마나의 길이 달리기 시작했다.
손등, 팔뚝, 어깨, 그리고 목덜미와 얼굴에까지.
동시에 빛이 올라가 그녀의 등 뒤에 원을 그렸다.
[마법식, 광륜(光輪)]
사도가 된 그녀를 위해 마룡왕이 손수 제작해 준 마법.
그녀가 마스터에 도달한 것은 그녀 자신의 힘이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마룡왕에게 받은 힘 또한 품고 있었다.
그녀는 검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진 않았지만, 동시에 사용할 순 있는 이였다.
“화려하군.”
그에 반해, 시안이 들고 있는 것은 평소와 같은 흑검 한 자루였다.
창해도 뇌명도, 백화도 꺼내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물론 유용하고 뛰어난 효과를 지닌 검들이었지만, 지금 시안에게 필요한 것은 이 단순한 검 한 자루에 불과했다.
“걱정 마세요. 죽진 않도록 할 테니까.”
파멜라가 검을 들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황금색 빛이 터져 나가며 사위를 물들였다.
그 빛의 입자 하나하나가 거력이 되어 시안을 내리눌렀다.
“…….”
그에 맞서 시안이 검을 들자, 파멜라가 움찔 눈을 찌푸렸다.
‘뭐지? 방금 녀석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땐 평범하게 검을 겨누고 있는 시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기분 탓이었나.
무언가 찝찝함을 느끼고 있는 파멜라를 향해, 시안이 얘기했다.
“그거 고맙군. 난 죽일 생각인데.”
황금의 빛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그의 검만이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