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7화
하얀 설산을 시안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손에 커다란 아이스 웜의 사체를 질질 끌면서.
그의 목적지는 설산 아래쪽에 있는 설인들의 마을이었다.
“후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도착했다.
낮잠이라도 자는 듯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하얀 털뭉치들.
달리 소음도 없고 소란스러운 이들도 없다. 한적함 그 자체.
처음 왔을 때도 생각했지만, 이 눈 덮인 대지와 설인들의 마을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 같았다.
‘벌써 1년인가.’
이 땅에 온지 벌써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첫 3개월, 한 번 일어난 프시케를 다시 재웠던 그날 이후로 9개월가량이 흐른 것이다.
평소엔 동굴 속에 머물며 시안은 한 달에 한 번은 아이스 웜을 사냥해 이렇게 내려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구우.”
“고오?”
아이스 웜을 끌고 온 시안을 보곤 털뭉치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한참을 뭉그적거리나 싶더니, 잠시 후 시안에게 접근했다.
저마다 손에 과일이나 산에서 채집한 나물들, 혹은 잘 손질된 산짐승의 고기 따위가 가득했다.
시안이 가지고 온 아이스 웜의 사체와 교환하기 위해 대가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구우.”
그들이 시안의 자루에 가져온 것들을 넣었다.
이들에게 받는 것과 산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을 합하면, 한 달은 넉넉히 먹을 수 있다.
참고로 1인분이면 충분했다. 귀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시안은 괜찮지 않았기에 달에 한 번 아이스 웜을 사냥하여 다른 식량들과 교환하는 것이다.
‘오늘은 좀 많군.’
자루가 평소보다 묵직했다.
따로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설인들의 답례는 그때그때 달랐다.
이번 달은 좀 넉넉한 듯했다.
“그럼 난 가보지.”
“구우.”
시안이 아이스 웜의 사체를 두고 그 자리를 떴다.
설인들의 관심은 이미 시안에게서 멀어져 아이스 웜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이 커다란 돌칼을 가져와 사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 마을을 뜨려고 할 때.
그의 소매를 당기는 손이 있었다.
내려다보니 작은 털뭉치가 그곳에 있었다.
어린 설인인 것 같았다.
“뭐지?”
“구.”
꼬마 설인이 막 딴 것 같은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가만 보니 꼬마 설인의 가슴팍에도 똑같은 꽃이 꽂혀 있었다. 마치 액세서리라도 되는 것처럼.
“?”
“구.”
시안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니 꼬마 설인이 꽃만 건네주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아이스 웜을 해체하고 있는 설인들 곁으로.
‘아이스 웜 고기를 좋아하나.’
그래서 매번 그걸 가져와 주는 자신에게 꽃을 준 건가?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곤 꽃을 챙겨 마을을 나왔다.
물론 각종 먹을거리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도 잊지 않았다.
“오, 왔느냐.”
동굴 속으로 돌아온 시안을 귀마가 맞이했다.
시안이 오자마자 그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 준비는 다 해놨다. 어서 구워보거라.”
그가 시안을 재촉했다. 그곳에는 모닥불과 함께 고기를 굽기 위한 완벽한 설비가 준비되어 있었다.
귀마가 먹지 않아도 괜찮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먹는다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시안이 설인들에게 식량을 받아올 때.
그는 시안 옆에 앉아 구운 고기를 받아 뜯곤 했다.
요즘 귀마가 맛 들인 취미 중 하나였다.
“금방 준비하죠.”
시안이 소매를 걷고는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자루 속에서 큼직하게 잘려있는 멧돼지 다리를 꺼내 구웠다.
절묘한 불 조절, 그리고 적당한 간과 보관해 두었던 향신료를 뿌렸다.
설인들이 주었던 것들 중에 특히 향이 좋아 따로 보관해 두었던 것들이었다.
“크으! 죽이는구나!”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귀마가 크게 만족하며 고기를 뜯었고, 그 옆에서 시안도 배불리 먹었다.
목 없는 기사는 옆에 앉아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없는데도, 전신에서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끄억.”
다 먹고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이까지 쑤신 귀마.
그가 이를 쑤신 나뭇가지를 집어 던지더니 풀밭에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좋아, 시작하자꾸나.”
그 순간 그의 기도가 변했다.
방금까지만 옆집 할배 같았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건 귀신과 같은 위압뿐이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1년 전의 시안이었다면 무릎 꿇었을지도 모를.
그러나 지금의 시안은.
“그러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도 흑검이 들려 있었다.
곧 원시 마법의 공간이 펼쳐졌고 그 안에서 시안과 귀마가 대치했다.
이 원시 마법도 단련에 무척이나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절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 내부의 마나 밀도를 극도로 높이는 기능.
처음에는 바깥과 거의 차이가 없었기에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압력,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바깥에 비해 수십 배는 밀도가 높아져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마나를 쌓을 땐 무척이나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로 마나를 피어 올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있어선 지극히 힘들단 얘기였다.
마치 깊은 심해에 잠기면 검을 휘두르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후후. 좋구나.”
귀마가 웃었다.
원시 마법이 펼친 공간, 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귀마 자신조차 뻐근할 정도로 압력이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시안은 몸이 굳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다.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한 이였다면 단번에 피를 토했을 것이고, 웬만큼 오러를 쓴다는 기사라도 물속에 잠긴 것처럼 자유를 잃을 것이건만.
‘괴이한 녀석이로고.’
요즘 들어선 귀마 본인이 오히려 시안과의 대련을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은 표정도 없고 말도 못 하는 하인 기사 하나를 빼면 혼자만 살아왔었으니.
그곳에 요리도 잘하고 검도 잘 쓰는 꼬맹이가 찾아오니 적적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그 꼬마 놈은 나날이 성장 중이다. 눈만 감았다 뜨면 한층 강해져 있었다.
한 달 전보다도, 일주일 전보다도, 그리고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강했다.
참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상대다.
“가겠습니다.”
“오거라.”
이내 시안이 달려들었고.
콰앙!
귀마가 녀석의 흑검을 막아냈다.
* * *
벌써 수 시간째 시안과 귀마의 검격이 이어진다.
1년 전에도 굉장히 수준 높은 공방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그땐 귀마가 지도 대련을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우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시안은 귀마를 상대로 제대로 된 공방을 성립시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역시 프시케를 다시 재운 건 정답이었어.’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1년이란 시간을 보낸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지금까진 해령궁주를 어떻게 잡을지 딱히 복안이 없었다.
가장 좋은 것은 녀석의 눈을 피해 현계로 통하는 문을 찾는 것.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녀석의 힘을 가늠하여 부딪쳐 보든가, 아니면 다른 작전을 세워보든가.
솔직히 불안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실력 향상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 기뻤다.
실력이 오른다는 것은, 보다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보다 많은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
지금의 자신과 1년 동안 힘을 회복한 프시케가 있다면, 해령궁주와도 승부를 벌일 수 있지 않을까.
“막아봐라!”
그때, 귀마가 검을 들었다. 그 검에서 갈색의 오러가 넘치다 못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안이 검을 바꿨다.
검령, 창해.
촤르륵 풀려나는 창해의 검편이 시안의 앞에서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검편 하나하나에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모였던 1년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마치 당시의 귀마와 같이, 검편 하나하나가 강한 인력을 가지며 빛무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핫!”
귀청을 울리는 강렬한 함성과 함께 귀마의 검이 떨어졌다.
쏘아진 귀마의 오러가 시안이 펼쳐낸 창해에 부딪혔다.
그것은 곧, 창해의 검편이 만들어낸 흐름에 휘말려 수십 조각으로 찢어져 허공에 흩어졌다.
귀마의 기운을 한 톨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소하자, 귀마가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완벽히 깨달은 모양이구나.”
참마검에서 가장 중요한, 검술의 근원.
더욱이 놀란 것은 그것을 응용하여 수많은 무기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곧 시안이 완벽히 참마검의 핵심을 꿰뚫었단 증거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흉내 내기는 몰라도 이처럼 완벽한 응용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는요.”
시안이 끄덕였다.
참마검에 노인이 담고자 했던 것. 완벽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참마검의 이름은 마룡왕을 베는 검이라 하였다.
때문에 처음엔 검술의 근원이 용을, 적을 베기 위한 살검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참마검이 중요시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 스스로를 세상에 오롯이 세우기 위한 검.
그 어떤 재앙과 해악이 덮쳐와도 꺾이지 않도록.
“허, 낯간지러운 소릴 하는구나. 딱히 그런 시적인 생각을 하면서 만든 검술은 아닌데.”
“-? 그럼 뭡니까?”
시안이 묻자 귀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 왜 마룡왕이 마법을 곧잘 부리지 않더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곧잘 정도라고 말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잘하는 건 맞다.
“마법이란 게 원체 기기묘묘한 것이어서 상대하다 보면 나 같은 일자무식은 놈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더란 말이지. 그래서 만든 것이 참마검이다.”
“그 말은…….”
“놈이 뭔 짓을 하더라도 다 무시하고 목만 벨 생각이었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얘기하는 귀마를 보며, 시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었다.
뭔가 마지막까지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풀린 듯한 느낌.
“후.”
시안이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감탄이 담긴 웃음이었다.
귀마가 참마검을 만들어낸 계기는 무척 심플한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심플하다 말할 수준이 아니다.
결국 그 간단한 생각이야말로 모든 것을 꿰뚫는 것이라는 것.
본디 진리라 불리는 것들은 단순한 법이었으니.
요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 판 더 하겠느냐?”
거절할 이유가 없다. 시안은 지금, 1년 중 가장 몸이 근질거렸다.
“부탁드립니다.”
그가 창해를 다시 흑검으로 바꾸고 귀마에게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는 그 걸음은 무언가를 털어낸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콰앙-!
그러나 시안의 검을 받은 귀마는, 방금 전보다도 한층 더 묵직해진 검을 맞대야만 했다.
‘이러니까 질리질 않는다니까.’
귀마가 속으로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 * *
그새 또 한 달이 지나고.
시안은 이번 달에도 설인 마을에 내려왔다. 아이스 웜의 사체를 끌면서 말이다.
‘슬슬 프시케가 다시 깨어날 때가 됐는데.’
그녀가 잠에 들기 전 말해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선택해야 하겠지.
이곳에 더 남아 있을 것인지, 이젠 떠날 것인지.
‘며칠 있다가 찾아가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안이 마을로 내려왔다.
그런데.
하얗기만 했던 설인 마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곳곳에 나태하게 널브러져 있던 하얀 털뭉치들이 빨갛게 물든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시안이 아이스 웜의 사체를 가져왔는데도, 단 한 명의 설인도 다가오지 않았다.
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몰살당한 설인들.
그리고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잔뜩 피를 뒤집어쓴 여인.
“응? 당신이 왜 여기에……?”
이쪽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녀석이 돼 여기에 있는 거지?
“파멜라 드레이크.”
한때 정화교단의 신성기사단장이던, 그러나 시안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어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마룡왕의 사도가 피로 물든 검을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