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6화
참으로 신비스러운 풍경이었다. 푸른 풀밭 위로 셀 수 없는 빛무리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한쪽에는 잔잔한 호수가 비치고 있었다.
그 공간 속에서, 시안과 귀마는 날카로운 기세를 흩뿌리며 검을 나누고 있었다.
눈으로도 보기 힘든 공방이 이어진다.
주로 공격하는 쪽은 시안이었고, 귀마는 시안의 검을 받아넘기며 간간이 틈을 봐 역공을 취하고 있었다.
‘큭.’
그런데, 그 역공 때마다 시안은 큰 손해를 보며 기세가 죽어갔다.
카앙!
간신히 귀마의 검을 받아내며 다시 시안이 공세를 잡는다. 하지만 한 번 꺾인 공세가 돌아올 때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다.’
만약 진짜 전투였다면, 한 번 기세가 꺾인 그 순간 승패가 결정 났을 것이다.
아니지, 애초에 귀마의 역공을 자신이 받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도.
그 정도로 시안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둘 사이의 검술의 차이를.
‘마룡왕과 동급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마룡왕을 포함해 시안은 몇 명의 초월자들을 마주한 적이 있다.
마룡왕, 아그리드 후작, 총장 제레흐, 대장군 로데릭.
그들의 전투를 시안이 목도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기세에 있어서 귀마는 그들과 결코 밀리지 않았다.
“허허, 벌써 지친 게냐? 좀 더 해보거라.”
시안이 다시금 공세를 끌어올리는 것이 조금 늦어지자 귀마가 곧바로 도발을 걸어왔다.
그런 것에 발끈할 정도로 시안의 수양이 낮진 않았지만, 귀마가 하고자 하는 말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네가 뭘 얻을지는 너 하기에 달린 일이다.
이 정도로 꺾일 정도면 이 이상은 무리라는 얘기겠지.
시안이 눈을 번뜩이며 검을 겨눴다.
그리고 목 없는 기사의 검을 떠올렸다. 귀마가 몇 수 가르쳐 주었다는 녀석의 검.
그 흐름을 떠올리며 검을 눕혔다.
그러자.
‘……?’
주변을 회전하고 있던 빛무리들에 변화가 생겼다.
시안의 근처에 있던 빛무리들이 검을 잡은 시안에게 느릿하게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호오…….”
그때 처음으로, 귀마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빛무리가 모여든다고 딱히 별다른 영향을 느끼지 못한 시안이, 계속해서 흐름을 이어갔다.
그리고 땅을 박차 몸을 비틀며.
귀마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어설퍼.”
일렁이는 검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며 귀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이 귀마를 향해 찔러왔지만 귀마는 살짝 몸을 틀어 피할 뿐이었다.
그 일순간에, 귀마는 시안의 검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훑어볼 수 있었다.
검 끝이 떨리지는 않는지, 무게중심은 어떻게 잡혀 있는지, 기운의 흐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힘의 분배가 어떠한지.
바깥에 세워두었던 하인 놈과 싸우면서 아무래도 몇 가지 얻어간 게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참마검에 담긴 진정한 의미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겉모양만 흉내 내는 꼴이라니.
그렇다 해도.
“훌륭하군.”
콰앙!
노인이 팔을 올리자 시안의 검이 튕겨 올라갔다.
어설픈 것은 맞다. 참마검의 의미를 깨치지 못한 것도 맞고.
그러나 반대로, 겉모습만큼은 완벽했다.
속이 조금 채워져 있지 않을 뿐이지, 틀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어찌 그 하인 놈의 검만 보고 이 정도로…….’
귀마가 주운 목 없는 기사는 가진바 검 실력은 뛰어나다. 하지만 학습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귀마가 가르쳐 주었음에도 고작 참마검의 기초나 겨우 쓸 수 있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걸 보고 눈앞의 꼬맹이는, 그 기초를 거의 완성시켜 온 것이다.
‘이 정도면 가르칠 맛이 나겠어.’
귀마가 피식 웃으며 검을 내렸다.
일단 실력 파악은 마쳤다. 결과는 기대 이상.
그런데.
“라비!”
시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시안이 크게 라비를 불렀다. 허공에 튕겨 날아간 흑검이 비검으로 변화하더니,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시안 본인은 각인에서 복사된 검륜을 꺼내 다시금 찔러 들어왔다.
“……!”
심지어 시안 본인은 물론, 허공에서 떨어지는 비검까지도 주변의 빛무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둘 모두 참마검의 기초가 착실히 녹아 있단 뜻이었다.
“허!”
귀마가 크게 탄식하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런 그에게 시안과 마찬가지로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만, 그 규모가 달랐다.
시안이 눈을 크게 뜨며 귀마의 검을 보았다.
‘이건…….’
온 세상이 그에게 휘말려 가는 듯한 느낌. 빛무리의 폭풍 속에서 오직 그만이 오롯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시안이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무참히 나가떨어져 있었다.
라비가 깃든 비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재주가 상당하구나.”
귀마가, 놀리거나 비웃는 것이 아닌 정말로 감탄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
틀을 완성해 놓은 것만 해도 경악스러울 지경인데, 그걸 응용까지 해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채워 넣기만 하면 아주 물건이 되겠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검을 내리며, 귀마가 그리 중얼거렸다.
* * *
타악!
타악!
오두막의 옆에서 목 없는 기사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귀마가 검을 고쳐주어 다시 활기를 찾은 기사. 녀석은 장작을 패어 한쪽에 쌓아놓으며 열심히 노동 중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꽤 오래 일을 했는지 녀석이 도끼를 내려놓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땀은커녕 머리도 없으면서 땀 닦는 시늉까지 하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마당에 있는 호수 근처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쿠웅!
귀마와 시안이 한창 대련을 하고 있었다.
“허허! 배움이 무척 빠르구나! 하지만 아직도 참마검에 담긴 의지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게 뭘 말하는 겁니까? 귀띔이라도 해주면 안 됩니까?”
“네가 알아내야지. 검술은 계속 보여주고 있지 않으냐.”
투덜거리는 시안에게 귀마가 킬킬 웃으며 얘기했다.
그는 시안에게 단 한 번도 말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보여주기만 할 뿐.
그걸 보고 시안이 무엇을 얻어내는지는, 전적으로 시안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다만 말은 이렇게 해도 귀마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시안의 성장세는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가뭄 난 땅이 빗물을 쭉쭉 빨아들이듯이, 그렇게 귀마의 검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룡왕이 탐내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아직 나이가 어릴 뿐이지 재능은 최고다. 단언하건대 이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도를 찾는 건 불가능할 터이다.
그러니까 마룡왕이 탐내고 있지.
“후우.”
한편, 시안은 반대로 갑갑함만 느끼고 있었다.
‘뭔가 걸릴 것도 같은데…….’
시안으로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얻는 검술 사범이나 다름없었다.
염노가 그의 검을 봐주었다고는 하나 염노의 검술 실력은 마스터급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그리드 후작이나 제레흐 총장에게 배울 수도 없는 노릇.
그들은 시안에게 검을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
때문에, 검술에서 경지에 이른 자의 검을 자세히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염노의 검은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습득하였는데 귀마의 검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만, 이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뛰어난 묘리를 품고 있다는 얘기니까.’
귀마의 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과연 마룡왕을 참살하기 위한 검이라고 당당히 내걸 만했다.
“하아…… 하아…….”
그렇게 수 시간에 걸친 대련이 끝나고 시안이 풀밭에 엎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시안의 전신엔 땀이 흥건했다.
반대로 귀마의 몸엔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채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후우…… 예.”
귀마가 오두막으로 들어갔고, 시안은 잠시 홀로 남았다.
원시 마법이 펼친 공간 안에서, 정체 모를 빛무리들이 떠다니는 광경.
그 안에서 대자로 누워선 동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하나가 걸리는 느낌.’
참마검을 익히는 과정은 현재 그런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감이 오는 것 같긴 한데, 구체적인 무언가 하나가 빠져 있는 느낌.
귀마가 그것을 일부러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음껏 제 검술을 펼치며 시안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단지 시안이 아직 습득하지 못했을 뿐.
‘한심하군.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시안이 스스로를 자책했다. 남들이 들으면 어이가 없을 소리였다.
그냥 평범한 검술조차 스승 없이 보는 것만으로 익히는 건 쉽지 않을 일일진대.
하이마스터급의 검사가 마룡왕을 죽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검을 눈대중으로만 익히고 있으면서 자책을 하다니.
그러나 남들에 비해 이러이러하다, 라는 말은 시안에게 있어선 아무 쓸모도 없는 말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나 자신?’
그때, 시안이 뭔가가 걸렸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중.
“아. 그러고 보니.”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그가 미간의 주름을 폈다.
생각해 보니 프시케가 깨어날 시기였다.
참마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어둔 채 그가 풀밭에서 일어나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귀마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 얘기를 하고는, 그 길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 * *
“하암~ 왔어……?”
오랜만에 만난 프시케는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졸려 보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은 맞는지 이전과 같은 작은 뱀의 모습이 아니었다.
봉인 안에서 보았던 유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힘은 어때? 다 회복했나?”
“응…… 아직 멀었긴 했는데.”
그녀가 눈을 비비며 얘기했다. 머리도 휘청거리는 것이 전혀 잠에서 깬 것 같지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억지로 깨느라 그런 건가?
“그래도…… 급한 불은 껐으니까 이대로 가자. 널 더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프시케가 잘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휘적휘적 일으키며 얘기했다.
그런 그녀에게 시안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괜찮으니까 더 자.”
“응?”
“더 자도 돼.”
시안이 그녀를 다시 눕혔다.
프시케가 의아한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이 설산에서 몇 개월을 의미 없이 기다렸으면서 또 기다리겠다고?
“나도 따로 하던 게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시안이 얘기했다. 귀마를 만난 일이나 그런 것을 모두 설명할 새는 없었고, 간단히 하던 일이 있다고만 설명했다.
그러자 프시케가 반색했다.
“그, 그래? 정말 더 자도 돼?”
“어.”
프시케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겨우 3개월 잠을 자고 일어난 것도 시안을 배려한 것일 뿐이지, 마음 같아선 몇 년이고 자고 싶은 그녀였다.
프시케가 흡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눈을 감았고, 시안은 그 길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예의 동굴을 찾아 귀마의 거처로 돌아왔다.
“벌써 갈 순 없지.”
당연한 일이다. 아직 참마검의 요체도 깨닫지 못했는데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왔냐?”
“예. 바로 시작하시죠.”
“팔팔해서 좋구만.”
어깨를 두드리며 일어나는 귀마를 보며 시안이 눈을 반짝였다.
그건 일종의 탐욕이었다. 뛰어난 검술을 본 검사의 탐욕.
그는 아직 귀마의 검을 모두 흡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