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5화
시안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눈 덮인 산의 동굴답게 습기에 젖은 내부가 펼쳐졌다. 정상에서 프시케와 들어갔던 동굴과 큰 차이는 없었다.
또 어떤 마물이나 악마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안이 조심스럽게 내부를 탐사했다.
그렇게 얼마간 들어가던 중.
‘갈림길?’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위쪽으로 가는 것인 듯 오르막이었고, 반대편은 내리막길이었다.
일단 길을 잃지 않도록 표식을 해두곤,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위쪽은 정상에 있던 동굴이랑 연결돼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내리막길을 골랐다.
혹시라도 오르막을 골랐다가 프시케가 있는 곳으로 통하게 된다면, 얌전히 힘을 회복하고 있는 녀석을 방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택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더욱 아래를 향하는 길이었다.
‘꽤 깊은데.’
처음엔 가는 경사였던 것이 갈수록 급해지고, 뻥 뚫린 낭떠러지 같은 곳도 몇 차례나 내려왔다.
횃불 하나에 의지한 어두운 동굴에서 벽을 타려니 새삼 옛날 일이 떠올랐다.
라비를 처음 만났던 그 동굴의 일. 그때도 이렇게 어두운 낭떠러지를 오르곤 했었지.
물론 그때는 지금같은 횃불조차 없었지만.
‘웅.’
물론 그렇다고 이 동굴이 그때의 그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라비가 있던 동굴은 이렇게 뚜렷한 실체가 없는, 일종의 환상 같은 공간이었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가다 보니.
‘……?’
묘한 것을 발견했다. 아니, 묘한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지하 동굴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밝았다.
천장에 야광석 같은 것이 박혀 있거나 하진 않았다. 대기 자체에 반딧불과 비슷한 반짝이는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정말 반딧불인 것은 아니다. 시안이 만져보려 하니 그의 손을 통과하더니 그대로 지나쳤다.
그 빛나는 공간 아래에, 널찍한 풀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쪽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호수가 있었고, 그 옆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자리했다.
도저히 겨울 설산에 있는 동굴 속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뭐지?’
무척이나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시안은 오히려 경계심이 극도로 올랐다.
있을 수 없는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공간이 있는데 경계하지 않을 리 없다.
그가 검을 잡고 천천히, 풀밭에 들어갔다.
그러자.
“네 이노오오옴! 도마뱀 놈의 주구 따위가 감히 어딜 들어오는 것이냐!”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난데없이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가 시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쇄도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세. 맹렬히 느껴지는 압박감에 견디면서도, 시안이 칼같이 반응했다.
캉!
그가 검을 들어 노인의 검을 막았다.
이보다 더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와 타이밍이었다. 목 없는 기사와 전투를 하며 한창 검술 실력이 물에 오른 그였다.
그런데도.
콰앙!
시안의 몸이 속절없이 튕겨 날아갔다.
“커헉!”
동굴의 벽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벽이 패이며 일순간 폐가 쪼그라드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노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달려와 시안의 머리에 칼을 내려쳤다.
시안이 이를 악물곤 검을 들어 올렸다.
카앙!
두 검이 맞물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노인이 불 같은 눈빛으로 시안을 쏘아봤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진 모르겠지만 간덩이도 크구나. 감히 내 앞에 설렁설렁 나타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흥! 도마뱀 놈의 기운을 그렇게 풀풀 풍기면서 시치미 뗄 생각이냐?”
노인이 힘을 주자 검이 점점 밀려왔다.
더 이상 힘으로 버틸 순 없다고 판단한 시안이 틈을 봐 검을 비틀었다.
그 순간 노인의 검이 떨어져 내렸고, 시안이 상체를 옆으로 빼 피했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촤악!
시안의 검이 그어졌다. 잘 정련된 가로 베기. 그러나 노인은 콧방귀만 끼며 시안의 검을 쳐냈다.
그 쳐내는 힘을 받아, 시안이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시안의 움직임을 보며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흥, 나름 재주는 부릴 줄 아는 놈이군. 그놈의 수하답지 않게.”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던 시안이 그 말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대체 뭡니까, 그놈이란 게?”
혹시 프시케를 말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곳은 프시케의 영역이란 사실은, 지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마룡왕말이다, 마룡왕. 네놈을 여기로 보낸 두목이 아니더냐?”
노인이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그러곤 한 손으로 검을 쓸더니 다시 시안을 겨누었다.
한편, 시안은 허탈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룡왕의 주구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하! 모르는 체를 할 셈이냐? 네놈에게서 놈의 기운이 풀풀 풍기고 있는데?”
시안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서 마룡왕의 기운이 풍기다니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라비 때문이라고 하기엔, 라비가 흡수한 마룡왕의 기운은 매우 작았다.
놈의 계약자 중 하나였던 안드라스에게서나 미약하게 빨아들인 정도.
‘응?’
그러던 중,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시안이 품속에서 어느 물건을 꺼냈다.
“혹시 이거 말입니까?”
천에 싸여 있는 청동거울. 마룡왕의 원시 마법이었다.
그걸 보더니 노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거울과 시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큼큼.”
검을 든 노인의 팔에서 살짝 힘이 풀렸다.
그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살펴보니 마룡왕의 기운은 저 거울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시안은 그저 그것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제야 노인도 뭔가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거 미안하구나…….”
노인이 머쓱하게 이마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 * *
“허허허! 이거 참, 너도 놈한테 이를 가는 사람 중 하나였구나. 자칫 귀한 인재를 하나 날릴 뻔했구만.”
오해가 모두 풀리고 시안은 노인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의 이름은 귀마라 하였다. 정확히는 이름이라곤 하지 않고 그렇게 불러달라고만.
아마 진짜 이름은 따로 있을 것이다.
프시케가 프시케란 이름이 있음에도 겨울의 뱀이라 불리는 것처럼, 노인은 귀마라 불리는 것이겠지.
“마룡왕이 사도로 점찍었다니, 조심하거라. 지금은 잠잠해도 놈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녀석이 아니니.”
“주의하죠.”
오해가 풀린 후 시안은 본인과 마룡왕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과거 놈의 계약자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강림한 놈과 대면한 적이 있다는 것.
그때 놈이 자신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것.
원시 마법에 관해선, 아카데미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순 없으니, 운이 좋게 빼돌렸다고만 얘기했다.
“흐, 안 그래도 요새 조용한가 싶더니만.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었구나, 그놈.”
귀마가 작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를 보며 시안이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무슨 관계입니까? 당신이랑 마룡왕은.”
귀마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뭐, 대충 말하면 숙적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숙적?”
“서로 죽이려 한다는 말이다.”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곧, 눈앞의 노인이 마룡왕과 동급의 존재라는 뜻이 아닌가?
“그나저나 바깥에 기사 하나가 있었을 텐데.”
“음, 그게…….”
“알 만하군. 뚫고 들어왔나 보구나.”
“검을 부러뜨렸더니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안이 조금 미안한 듯 얘기하자 귀마가 껄껄 웃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아끼던 검이 망가져서 상심하고 있는 것일 테니. 검만 고쳐주면 다시 움직일 게다.”
검이 본체여서 움직이지 않게 된 줄 알았더니, 그냥 상심했을 뿐이었다고?
“오다가다 주운 놈인데, 하인 삼아 쓰고 있지. 몇 수 가르쳐 주니 문지기로도 제격이더군.”
그렇게 말하며, 귀마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놈을 쓰러뜨리다니 제법이라며, 그리 중얼거리곤 시안을 보았다.
그러던 중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시안에게 얘기했다.
“그렇지. 너도 마룡왕과 대적할 놈이라면 내 몇 수 가르쳐 주마.”
“네?”
“놈을 괴롭힐 전력은 많을수록 좋으니 말이다.”
껄껄 웃는 귀마를 보며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가르쳐 준다면 그 목 없는 기사가 쓰던 그 검술을 말하는 건가?
그가 놈과 싸울 때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결국 시안이 이기긴 했지만, 정체 모를 그 검술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놈이 좀 더 자유자재로 그 검술을 다룰 줄 알았다면, 승패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야 감사하죠.”
그걸 생각해 보니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 *
집 바깥의 호수 옆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그들의 주위로 반짝이는 빛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이 빛들은 뭡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별거 아니니까.”
노인이 대충 대답하며 앉았다 일어서며 몸을 풀었다.
어깨도 빙빙 돌려 풀고는 흙바닥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렇지, 기왕이면 그것도 써보지 그러냐.”
“그거요?”
“마룡왕의 거울 말이다.”
그 말에 시안이 원시 마법을 꺼내보았다.
“쓴다니,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데요.”
“줘봐라.”
노인이 시안의 손에서 청동 거울을 받아들더니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거울 주변의 테두리에 기이한 문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거울에서 빛이 펼쳐지며, 사위를 감싸 안았다.
그 안에서, 방금까지만 해도 천천히 유영하던 반짝이는 입자들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본디 이건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 마나의 근원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
시안이 두 손을 펼쳤다. 빠르게 회전하는 입자들이 쉼 없이 그의 몸을 통과하며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네 녀석은 이미 충분히 마나를 깨우치고 있는 듯싶다만, 아직 근원에까지 이르진 않았구나.”
“……심상 세계를 말하는 겁니까?”
“뭐냐 그건. 너희 세계에선 근원을 그런 식으로 부르나?”
지옥의 주민이기 때문일까. 심상 세계라는 단어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황상 귀마가 말하는 것은 심상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처음 원시 마법을 보았을 때 보지 않았던가. 이 거울이 심상 세계를 새겨주기 위한 마법임을.
“그래서, 뭘 하면 됩니까?”
시안이 검을 들었다. 가르침을 준다니 대체 뭘 주겠단 것일까.
“대련.”
귀마가 짧게 대답했다.
“가르친다곤 해도 이러쿵저러쿵 말로 하는 건 자신이 없어서 말이지. 대충 대련이나 하자꾸나.”
“…….”
“거기서 네가 뭘 얻는지는 너 하기에 달린 일이다.”
시안이 웃었다. 심플해서 좋다.
거기에 보고 배우는 것은, 시안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귀마의 검술은 뭐라고 합니까?”
“참마검.”
“참마검? 마를 베는 검이란 뜻입니까?”
“아니. 마룡왕, 그놈을 베기 위한 검이다.”
허. 시안이 헛웃음을 뱉었다. 검술의 이름에서부터 개인적인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귀마가 마룡왕과 동급이라 함은, 그 역시 마룡왕이나 프시케와 같은 대악마라는 뜻일까?
라는 질문을 하였더니.
“나는 사람이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부터 용의 목을 치는 것은 사람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