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4화
검은 갑옷엔 은은한 보랏빛 문양이 서려 있었다.
녀석이 들고 있는 검 역시 기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특이한 건 머리가 없었다.
투구만 쓰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어깨 위가 텅 비어 있다.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은 그런 녀석이 시안이 동굴로 다가가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따로 쫓아오는 느낌은 없는데.’
일반적인 마물과는 달리 시안을 보고도 아득바득 죽이기 위해 쫓아오진 않는다.
동굴에서 멀어지기만 하면 아무런 해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동굴 쪽으로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순간.
-쿠웅!
녀석의 검격이 날아왔다.
마치 지금 것은 경고라는 듯, 시안의 옆쪽으로 길게 눈이 갈라졌다.
말 그대로 동굴을 수호하고 있는 느낌.
딱히 동굴에 꼭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한판 해볼까.’
시안은 녀석의 검격 자체에 흥미가 돋았다.
그가 흑검을 빼 들고 일부러 동굴에 다가섰다.
검은 기사가 즉각 반응을 보인다. 경고를 듣지 않고 다가오는 시안의 목을 치러, 녀석의 검이 용서 없이 쇄도했다.
캉!
시안이 검을 올려 녀석의 검을 쳐냈다.
부딪친 검신과 함께, 검을 쥔 시안의 손이 지잉지잉 울려왔다.
묵직했다.
단순히 힘만을 사용해 억지로 공격한 것이 아닌, 절묘한 무게중심과 타이밍을 재어 이뤄진 검격.
그건 검술이었다.
‘평범한 마물은 아닌 모양이야.’
어쩌면 나름 고위의 악마일지도 모른다. 얼굴도 없고 말도 하지 못하기에 물어볼 순 없었지만.
캉! 캉캉!
허공에서 몇 번이나 불이 튀겼다.
검은 기사가 시안의 발목을 노렸고, 시안이 몸을 반 보 틀어 그걸 피했다.
동시에 비어 있는 놈의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으나, 사실 이것도 놈의 의도대로였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시안의 검에 검을 걸어 튕겨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일찍부터 읽고 있던 시안은, 검을 반 바퀴 돌려 녀석이 검을 걸려고 하는 것을 쳐냈다.
이러한 검격이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힘과 속도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속임수와 심리전이 난무하는.
‘최근엔 마물들만 상대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오러나 기운의 크기에만 의지한 싸움을 주로 했었다.
이렇게 검만으로 섬세한 전투를 치르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후우.”
내친 김에 시안은 사위를 잠식하며 뻗어내었던 밤의 오러를 다시 거두었다.
그저 회수하기만 한 것이 아닌 몸속에, 그리고 검에만 온전히 집중해 펼쳤다.
‘어차피 위험하면 바로 빠지면 되니까.’
동굴에서 멀어지기만 하면 검은 기사가 공격을 멈추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힘과 힘, 기운과 기운의 정면 대결을 배제한, 온전한 기술끼리의 대결.
검은 기사 역시, 쓰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인지 오러나 마나와 비슷한 것은 사용해 오지 않았다.
휙!
검은 기사의 검이 옆에서 시안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시안이 몸을 빼며 녀석의 검을 쳐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자 그 순간, 놈의 검이 사라졌다.
시안이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놈의 검은 아래쪽에서 시안의 턱을 향해 뱀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목을 꿰뚫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검이 턱끝까지 다가온다.
그걸 보며 시안이.
‘검술 실력 장난 아닌데?’
오히려 눈을 빛내며, 고개를 급히 옆으로 틀었다.
치고 올라간 검은 기사의 검이 시안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려나간 몇 가닥 머리카락이 눈밭 위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가자 검은 기사가 살짝 뒷걸음질 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런 녀석을 보며 시안이 웃었다.
“프시케가 자고 있을 동안, 심심할 일은 없겠어.”
우연히 발견한 녀석이, 생각보다 물건이었다.
* * *
몇 날 며칠이고 시안은 설인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검은 기사와 전투를 이어갔다.
녀석이 마물인지 악마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마물과 악마의 가장 큰 차이는 지성.
검을 쓰는 것을 보면 지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외에 다른 것을 보면 딱히 지성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라비의 힘을 써보면 확실하긴 한데.’
족쇄가 걸린다면 악마일 것이고, 안 걸린다면 마물일 것이지만, 시안은 아직 그걸 해보진 않았다.
그전에 일단 놈과 더 검을 나눠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검만으로 녀석을 무릎 꿇리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채앵-!
‘전체적으로는 어설픈데.’
검은 기사의 검은 전반적인 완성도가 높진 않은 인상이었다.
허점도 많이 보였고 대처 능력도 그렇게 훌륭하진 않다.
그럼에도 시안과 검격이 이어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보이는 센스, 그리고.
휘익!
아주 가끔 보이는, 살기가 가득한 검.
‘온다.’
녀석의 검이 당겨졌다. 그 순간부터 시안은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놈의 검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
처음 보았을 땐 당황하였지만 몇 번이나 보다 보니 눈에는 익었다.
다만.
-콰아아앙!
눈에 익었다고 공략 방법을 찾았다는 건 아니었다.
쏘아진 놈의 검을 시안이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러나 검의 여력은 시안을 관통하여, 그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어설프게 막았다면 그대로 심장에 구멍이 뚫려버렸을 일격이었다.
‘후.’
저걸 공략해야 한다. 가끔 보이는 저 기세.
평소의 검은 기사만 해도 어느 정도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인데, 간간이 보이는 일격 탓에 시안의 움직임은 더더욱 봉쇄되고 있다.
저걸 뚫지 못하는 이상 놈을 뚫을 수는 없으리라.
-캉! 캉캉!
‘몰아붙이고.’
녀석과의 전투 양상은 시종일관 같았다.
놈을 몰아붙인다. 일정 이상 그러다 보면 놈이 조금씩 균형을 잃어간다.
그때 시안이 결정타를 위해 일격을 날리면.
녀석이 어김없이 예의 그 검술로 반격을 해왔다.
‘그 검술을 많이 보여준다면 공략법을 찾는 것도 쉬울 텐데.’
하지만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녀석은 어지간히 자신이 몰리지 않는 이상 그 검을 보여주지 않았다.
무언가의 제약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게 습관인 건지.
‘그렇다면.’
시안이 눈을 빛냈다. 방법이 없진 않다.
‘녀석을 지금보다 더 손쉽게 몰아붙일 수 있으면 돼.’
지금은 수십, 길면 백 합 이상을 나눠야 한 번 그 검술을 보는 수준이다.
그러나 수 합, 나아가 한 합 만에 녀석을 절체절명으로 몰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놈이 훨씬 더 그 검술에 의지하게 되리라.
방향이 정해졌다.
시안은 놈과 검을 겨누며 놈의 습관, 버릇, 힘의 배분을 주는 법 등등 많은 것을 관찰해 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옛날 염노에게 배우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 염노의 움직임을 이런 식으로 관찰하곤 했었지.’
그는 그렇게 해서 검을 배웠다.
염노는 마법사지만 검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시안은 그의 동작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염노의 검술 경지를 뛰어넘은 이후부터는 독학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이 녀석 정도면 훌륭한 표본이야.’
지금껏 많은 검사들을 봐오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훌륭하면서, 동시에 이만큼 오랫동안 지긋이 관찰할 기회가 있던 적은 없었다.
아그리드 가주도 제레흐 총장도, 그리고 로데릭 대장군도 검으로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지만, 시안이 그들의 검을 오래도록 상대할 기회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이윽고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시안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검은 기사와의 전투에 매달렸다.
중간에 설인 마을에 한 번 내려가 식량을 보충해 온 것 외에는 휴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캉!
시안의 검이 검은 기사에게 쇄도한다. 검은 기사가 급하게 검을 들어 시안의 검을 쳐냈다.
그 직후.
‘두 합.’
시안의 눈이 번뜩이며 검은 기사의 심장 어름을 찔러갔다.
방금 자신의 검을 쳐냈던 녀석의 자세로는, 결코 맞받아칠 수 없는 공간.
한 달 동안 시안은 검은 기사의 검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고, 기어코 두 합 만에 놈을 몰아붙일 수준에 이르렀다.
‘모인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당황하지도 곤혹하지도 않았다.
녀석이 그대로 검을 들었다. 시안의 검이 가슴에 다가오고 있는데도, 훤히 상체를 드러내며 두 손으로 검을 올렸다.
그리고 그 검에, 정확히는 검의 손잡이와 녀석의 손어림 부근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카아아앙!
녀석이 검을 내려쳤고, 반대로 시안은 올려쳤다.
중간에서 마주친 검이 부르르 떨려왔다.
‘웅! 우웅!’
흑검이 부서질 것처럼 떨리는 것을 보며 라비가 방방 뛰고 있었다.
그러나 시안은 라비의 투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그의 눈은 마주친 검 너머에 있는 검은 기사만을 보고 있었기에.
‘막았어.’
놈의 일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한 달 동안 이 일격 역시 여러 번 봐왔으나, 막은 건 처음이다.
모처럼 찾아온 호기(好期)였다.
카앙!
시안이 검을 밀어 녀석의 자세를 무너뜨리곤, 그대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반대로 살짝 뒤로 빠지며 자세를 다잡은 검은 기사가 다시금 검을 모았다.
카아아앙!
또 막았다.
부들거리는 흑검에, 그걸 쥔 시안의 손바닥이 찢어졌다.
그 찌릿한 통증을,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는 데 써먹으며 시안이 더욱 검을 틀어쥐었다.
그가 계속해서 검을 내질렀다.
그 한 합 한 합이 검은 기사를 몰아붙이는 검격이었고.
검은 기사는 계속해서 예의 일격을 사용해 시안의 검에 대응했다.
카앙! 카앙, 카앙!
오러도 마나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검술의 대결.
공수가 몇 번이나 교대되며,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막아냈다.
한 치도 실수할 수 없는 합이 이어지며 시안의 집중력이 한계 이상으로 치달았다.
‘지금 해야 돼.’
이번이 적기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흐름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수십, 수백의 합이 이어지며 시안의 눈이 녀석의 검을 관찰했다.
검을 이루는 흐름을 꿰뚫기 위해서.
그 직후.
-키링!
녀석이 검을 당겼다. 지금까지보다도 커다란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 놈으로서도 통할지 안 통할지 장담할 수 없는 도박과도 같은 일격.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역시 녀석과 똑같이 검을 당겼다.
‘오래 걸렸군.’
시안의 눈이 가라앉으며, 다가오는 검은 기사의 검을 보았다.
그 검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며, 검을 두르는 모든 흐름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그리고, 시안이 검을 뻗었다.
한 달하고도 며칠.
그의 검에는 검은 기사의 검과 똑같은 흐름이 섞여 있었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 이래로 처음이야.’
상대의 검술의 핵을 파악하고 습득하는 것. 시안은 염노에게 그런 식으로 검을 습득했다.
시안의 이런 재능을 본 염노는, 굳이 하나하나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고 보다 다양한 검술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고.
하나의 검술을 습득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은, 시안이 첫 검술을 익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콰아아앙!
완전히 똑같은 두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지금까지처럼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뼛속까지 파고드는 그런 파공음이 울렸다.
그리고.
파직!
검은 기사의 검에 금이 갔다.
시안이 그대로 검을 당기듯이 베어냈다.
챙그랑!
깨어진 검은 기사의 검이 눈밭에 푹 떨어져 내렸다.
“후우.”
검이 부서지자 검은 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완전히 굳은 것은 아닌데, 그대로 무릎을 꿇고만 있었다.
시안이 털썩 눈밭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잠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크게 상심이라도 한 것인지 움직이질 않았다.
미약한 움직임은 보이고 있으니 완전히 정지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 볼까.’
기이한 검술을 쓰는 갑옷이 지키고 있던 동굴.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지 않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