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3화
본래 카자르와 드라크의 전투가 치열하던 판데모니엄은, 기이하게도 지렌 카자르가 죽었음에도 똑같이 흉흉했다.
드라크는 남은 카자르의 잔당을 처리하며 도시를 장악하는 작업을 거쳤고, 동시에 지렌의 흉수를 찾고 있었다.
그 도시 사이를 황색 로브를 푹 눌러쓴 시안이 걷고 있었다.
목적지는 도시의 출구.
사막을 벗어나기 위한 동쪽 방향이었다.
‘북쪽으로 가자고?’
[내 고향으로. 거기서 정비의 시간을 좀 갖자구.]
힘을 회복하기 위해 고향에 가길 바라는 프시케.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해령궁주의 영역에 침입한 후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해령궁주 본인과 전투가 있을 가능성도…… 솔직히 낮지 않았다.
그전에 프시케의 힘을 회복할 수단이 있다면 회복하는 것이 승산이 높겠지.
‘확실히 그게 낫겠다.’
[정해진 거지?]
‘그래.’
오랜만에 돌아가는 고향이라며 프시케가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시안이 지도를 펼치고 루트를 잠시 찾았다.
찾아보니 동쪽이나 북쪽이나, 어차피 사막을 벗어날 때까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사막을 벗어나는 출구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어이, 거기!”
그때, 날카롭게 날을 세운 창을 돌며 순찰 중이던 드라크의 리자드맨 두 놈이 시안을 불렀다.
시안이 발을 멈췄다.
그러자 다가온 녀석들이 위협적으로 그르렁 거리며 얘기했다.
“후드 벗어봐.”
“왜지?”
“검은 머리 인간놈 하날 찾고 있거든. 아닌 것만 확인되면 그냥 보내줄 테니까 어서 벗어.”
시안도 도시의 분위기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찾는 드라크의 저의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경쟁자인 지렌을 처치해 준 일이나, 딸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위해 준 일이나 은혜를 판 일은 많았지만.
애초에 이들은 딱히 은원을 철저히 따지는 놈들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늑장 부려? 그거 하나 벗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 녀석 설마…….”
대답을 하지도 로브를 벗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는 시안을 보며 놈들이 의뭉스런 시선을 보냈다.
두 녀석이 서로를 향해 눈짓을 한 번 하더니, 그중 하나가 시안의 로브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뛰어야겠군.”
서걱!
검은빛이 번쩍이며, 리자드맨의 팔이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끄아아악!”
“녀석이다!”
다른 쪽 리자드맨이 품에 손을 넣어 호각을 꺼내려 하였다.
시안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푹!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목을 잘라버리고, 나머지 하나도 마저 처리했다.
-으아아악!
-뭐야 또!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에 시민들이 소리를 질러댔고.
“잡아라!”
“쫓아!”
그 소란을 듣곤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리자드맨들이 달려들었다.
시안이 검을 집어넣지 않고 그대로 뛰었다. 도시의 동쪽 출구를 향해서.
대로변을 달리는 시안의 머리 위로 수십의 화살들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섞여 있는지 뜨거운 불덩어리도 가득했다.
“안 그래도 더운데.”
시안이 작게 불평하며 창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그것들을 향해 거침없이 휘둘렀다.
화악!
치이이익!
창해가 펼치는 물줄기에 화살들이 휩쓸려 날아가고, 불덩어리들이 진화되어 사라진다.
물이 증발한 수증기만이 남아 주변을 가득 메웠다.
소소하지만 놈들의 시야를 가려주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문 닫아!”
드르르르-
출구에 가까워져 보니, 동쪽 성문이 닫히고 있었다.
거대한 문이라 닫히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시안이 도착하기 전까진 완전히 닫힐 것 같았다.
시안이 눈을 번뜩였다.
어느새 그의 손엔 푸른빛의 창해가 아닌 새하얀 날의 글레이브가 쥐어져 있었다.
라비의 검 중에, 파괴력 하나만큼은 가장 발군인 하얀 불꽃의 검. 백화.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콰과과과과광!
거의 닫혀가는 문을 향해 백화가 떨어졌다.
하얀 불꽃과 번개가 휘감기며 성문의 중앙 부분이 완전히 박살 났다.
부서지고 녹아내리는 문의 잔해.
그렇게 열린 공간을 시안이 뛰어넘었다.
“…….”
“어떻게…….”
커다란 성문을 단숨에 아작내는 위력을 보곤 리자드맨들이 어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놈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못했다. 아무리 가문의 명령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목숨만큼 중한 것 없었기에.
그렇게 뻥 뚫린 길로 시안이 달려나갔다.
그 와중에, 앞쪽에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
차르.
판데모니엄에 들어올 때 드라크의 여식을 호위하던 수염 난 늙은 리자드맨.
시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면식이 있는 사이긴 하나 의리를 지킬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앞길을 막으면 베어낼 뿐.
다른 리자드맨들이 핼쑥한 얼굴로 손을 떨고만 있을 때, 그나마 녀석은 강단 있는 표정으로 창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후…….”
차르는 창을 든 팔의 손을 풀었다. 시안을 겨누던 날카로운 창끝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시안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차르의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다른 놈들처럼 목숨이 아까워서인지.’
아니면 그때의 일을 은혜로 여기고 있는 건지.
이제 와선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그거 하나 물어보자고 발을 멈출 시안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시안이 거대 오아시스 도시, 판데모니엄을 뒤로했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모래만이 펼쳐져 있었다.
* * *
차가운 눈이 뒤덮인 산맥.
그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해 시안이 터벅터벅 오르고 있었다.
“너무 추운 거 아냐?”
[원래 이런 곳인데 어떡해.]
그의 복장은 이전 사막에 있을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얇고 간편한 복장 위에 모습을 감추기 위한 황갈색 로브만을 둘렀던 그때의 모습.
하지만 지금은 몸 전체에 방한용 물품을 덕지덕지 두르고 있었다.
그러고도 이 차가운 공기를 채 막지 못했다. 싸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뼛속까지 시려오곤 했다.
“빙하백령보다 2배는 더 추운 거 같군.”
[거긴 나한텐 그냥 따스한 온실이었다니깐.]
빙하백령의 추위 정도는 마나를 돌려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곳의 추위는 그렇게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나를 돌려보아도 그 사이로 침투해 온다.
과연 지옥계라고 불러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그때.
-쿠구구구구!
땅이 흔들린다. 아주 미약한 흔들림이었지만 시안은 민감하게 감지했다.
그가 잠시 산을 오르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속으로 셋을 세고는.
“흡!”
그대로 크게 뒤로 뛰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아이스 웜.
이 차가운 산속을 제집처럼 파헤치고 다니는 마물.
4개로 갈라진 입에는 수십 겹의 이빨이 빼곡히 자리해 있었고, 그 몸은 하얗고 미끈거리는 체액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이 녀석들도 끝도 없군.”
시안이 질린단 표정을 지었다.
이 북쪽 지대까지 오며 시안은 정말 많은 마물과 악마들과 전투를 치렀다.
아이스 웜 역시 마찬가지.
이 산맥에 진입한 직후부터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출현해 시안을 방해하는 녀석이었다.
“캬아아아!”
아이스 웜이 솟아오른 그대로 다시 시안을 포착하더니, 그를 삼키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검을 뽑았다. 흑검이 아닌 하얀 글레이브, 백화였다.
하얀 불꽃을 두른 그것을 두 손으로 잡은 시안이, 크게 휘둘렀다.
서걱!
땅 위로 올라온 아이스 웜의 동체가 그대로 베여나갔다.
둘로 갈라진 그 상처에 붙은 백염이 탐욕스럽게 아이스 웜의 동체를 집어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졌다.
“후우.”
그래도 몸을 움직이니 더 열이 나는 느낌이다. 백화가 뿜어내는 열기도 있었고.
그 기세를 타고 시안이 다시 봉우리를 올랐다.
중간에 아이스 웜의 습격이 몇 번이나 더 있었지만, 모두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 마물에게 애먹을 시안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한 정상.
그곳에는 얼음으로 된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있었다.
“여기야?”
[응. 내 집이야.]
“네가 직접 뚫었어?”
[아니? 이곳 북쪽에서 제일 그럴듯해 보이는 곳이라 자리 잡았지. 원래 여기 살던 놈은 집어삼키고.]
시안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니 햇빛이 모두 차단되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횃불에 불을 붙여 치켜들고는, 프시케의 안내에 따라 동굴 속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간 걷고 있자.
[여기까지면 돼.]
“도착했어?”
[응. 이제부턴 혼자 갈 테니까.]
프시케가 팔목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한숨 자고 올 테니까 근처에서 적당히 지내고 있어. 아니면 산 아래쪽에 있던 마을에서 지내고 있던가.]
작은 뱀이 시안을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산 아래쪽의 마을은 이곳에 올라오기 전에 보았던, 설인들의 마을을 뜻했다.
간단히 보급만 하고 바로 산을 타긴 했지만, 느슨한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잠시 몸을 눕히기엔 충분할.
“얼마나 걸리는데?”
[글쎄, 좀 봐야 알겠는데? 일단 한 달 후에 잠깐 깨가지고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한 달이라……. 그 정도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하루 이틀 정도로 될 일은 아니라 각오하고 있기도 했고.
[나 있는 곳으로만 안 들어오면 동굴도 마음대로 써도 돼. 길 잃어버리는 것만 주의하고. 워낙 길이 많아서 나도 아직 못 가본 곳이 많거든.]
“그래. 그럼 한 달 뒤에.”
[응. 죽지 말고.]
묘하게 울리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프시케가 떠나갔다.
작고 하얀 뱀이 꿈틀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곤, 시안이 팔짱을 꼈다.
그럼 이제부터 어쩐다…….
‘설인 마을에 가서 자리를 잡든가, 아니면 근방의 마물이라도 사냥하고 있든가.’
라비가 악마들에게서 기운을 흡수하듯, 이곳의 마물들에게서도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현계에서 빨아들이던 놈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긴 했다.
현계에서 마주쳤던 놈들은 흑마법사와 계약하거나 강림까지 꾀하는 놈들이다.
그 정도 수준은 이 지옥계에서도 고위의 악마로 통하는 놈들이었다.
지금까지 시안이 마주친 이들 중엔 지렌 카자르 외에는 그 정도 급은 없었다.
반대로 아이스 웜 같은 놈들은 고위는커녕, 일반 악마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능 없는 하급 마물들이다.
놈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운은 극히 미미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생각보다 정상에 빨리 올라왔기에 보급품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내려가기 전에 사냥이라도 좀 더 하고 가도록 하자.
그렇게 결정한 시안이 동굴 바깥으로 나와 적당한 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마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나약한 마물이라 해도 실전은 실전이다.
놈들에게서 뽑아먹는 기운 외에도 실전 경험 또한 다소는 쌓을 수 있을 터.
그러기를 며칠.
“응?”
산의 정상 부근엔 이제 남은 마물이 없어 중턱까지 내려와 사냥을 하던 중.
시안이 묘한 것을 발견했다.
정상에 있던 것과 비슷한 동굴의 입구.
여기까지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나.
-스릉.
그 앞을 머리가 없는 괴이한 갑옷의 기사가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