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37화 (13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7화

여왕 가르시아가 갑자기 집을 부수며 시안을 공격했다. 유설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어딘지 꿍꿍이를 모를 느낌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가르시아다.

가문에서 그리 환대받지 못하는 자신을 데리고 나와 수호기사가 되라고 얘기해 주었고, 그걸 거절했음에도 서슴없이 대해주었다.

그랬던 가르시아가 시안을 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돌변했다.

“숲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잡아 오세요.”

“예!”

여왕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수호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은 잘 도주한 시안 일행이었으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잡히고 말리라. 그들은 이곳은 숲이었고, 그들의 터전이었다.

“여왕님! 대체 왜 시안을……!”

“…….”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는 유설이었으나 여왕의 눈빛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본 적 없던 차가운 눈빛.

그동안 언제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대해줘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일국을 다스리는 여왕이었다.

“유설. 물러나세요. 당신이 끼어들 사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설도 간단하게 물러날 순 없었다. 적어도 이유는 듣고 싶었다.

“그는 칠흑마탑의 흑마법사입니다. 그가 데려온 하얀 머리의 꼬마는 그렇게 보여도 거인이고, 따로 악마도 부리고 있더군요.”

유설이 긴장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시안이 지옥의 악마와 관계가 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와 시안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였으니.

같이 있던 꼬마가 거인족이라는 것은 완전히 처음 듣는 것이지만,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들켰다는 게 문제였다.

‘프시케, 어떻게 하지?’

그녀가 속내로 프시케에게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대로 모른 척해야지.]

돌아온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어.’

[들키지 않도록 돕는 거지 들킨 걸 돕자는 얘기는 아니었잖아?]

‘그건…….’

[거기에 지금 그 애를 걱정할 때가 아냐. 여왕은 강림한 뇌력천주를 한눈에 간파했어. 우리도 조심해야 돼.]

프시케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가르시아의 얘기로 판단하기에 시안의 안에 있는 라비의 존재까지는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뇌력천주의 정체를 간파할 정도라면 결코 방심할 순 없었다.

혹여나 프시케가 유설의 몸에 강림하거나, 어쩌면 힘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들킬 우려가 있다.

[다른 때면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시기야. 알고 있지?]

거기에 지금은 시기도 좋지 못했다.

제국이 흑마법사와 손잡고 자국을 침공하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거인과 흑마법사에 대한 정서가 매우 나빴다.

이런 상황에 유설과 프시케의 관계가 들킨다면, 오해라는 말만으로 넘어가진 않으리라.

‘응…….’

유설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상대는 요정궁의 주인이고 지금 그 요정궁은 칠흑마탑을 앞세운 제국 황실과 전쟁 중이다.

몸을 사려야 할 때임은 그녀 역시 잘 알았다.

“당신은 걱정 말고 평소처럼 보내세요. 아, 집은 부숴서 미안해요. 곧 새로운 거처를 준비해 줄게요.”

“……예.”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여왕은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이한에서 지내며 수호성의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도망친 흑마법사와 거인, 그리고 악마를 잡으라는 것.

그 명령에 어떤 기사들도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의 생각에 여왕이 쫓는 이는 제국의 첩자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모두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 첩자 놈들은 매우 잘 도망치고 있었다.

다행히 숲에서 헤매게끔 만들어 놓긴 했으나, 이대로 간다면 탈출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놈들이 벌써 초입에 다다랐습니다. 이젠 정말 위험합니다.”

“숲 밖으로 포위망을 짜놓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잡을 수 있을지…….”

“어떡할까요?”

기사들의 보고에 가르시아가 눈을 찌푸렸다.

당연히 손쉽게 잡아들일 줄 알았다. 생포하라는 것도 아니고 죽여서 목만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발목을 붙잡힐 줄이야.

‘시안 아그리드.’

설마 그 인간 꼬맹이 하나가 이렇게 걸리적거릴 줄은 몰랐다.

거기에 옆에 있는 거인왕도, 그리고 악마 놈도 경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계시가 들려온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얘기. 가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부탁드립니다, 선조님.’

가르시아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의식이 깊이, 저 아래로 침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 기존과는 다른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눈을 떴다.

“나가 있는 기사들을 모두 불러 모으십시오. 숲 밖에서 포위망을 펼치고 있는 이들은 더 멀리 물러나라고 연락하고.”

“예? 기사들을 물리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기사가 당황했다. 쫓아야 할 적이 있는데 병력을 물리라는 명령이라니, 그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사의 물음에 여왕이 대답했다.

“숲 전체를 봉인시키겠습니다.”

기사들은 당황을 넘어 경악하기 시작했다.

숲을 통째로 봉인한다고? 그게 가능한지도 알 수 없거니와, 쥐새끼 좀 잡기엔 지나치게 과한 처사가 아닌가?

“빨리 가세요.”

“아, 예, 예!”

하지만 명령을 거스를 순 없다.

기사가 다급히 뛰쳐나가 곳곳에 여왕의 명령을 알렸다.

머지않아 숲에 나가 있던 기사들이 속속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명령을 전해 들은 유설은.

“……가봐야겠어.”

이제는 가만있지 못했다.

그녀가 여왕과 다른 기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숲으로 숨어들었다.

* * *

“봉인의 술이다.”

“뭐? 이게 다?”

“아마도.”

거인왕의 낮은 목소리에 헥토르가 기겁을 했다.

숲 전체가 빛에 휩싸였다.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빛이 보이는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다.

이 전부가 다 봉인의 빛이라니.

시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야?”

“진짜야 진짜. 이거랑 완전히 똑같은 술법에 수백 년을 봉인당해 있었던 내가 말하는 거니까 좀 믿어라, 젠장.”

거인왕이 거칠게 얘기하곤 욕설을 뱉었다.

그로서는 증오스럽기 마지않은 봉인이다. 자신과 동포들을 모조리 감금했던.

설마 그걸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거인을 이 시대까지 봉인하고 있던 술법이라면 쉽지는 않을 텐데.”

“대대로 꼬박꼬박 전수해온 모양이지. 그게 아니면…….”

“아니면?”

“……본인이 쓴 거든가.”

거인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는 이전에 보았던 여왕 가르시아의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과거 그를 봉인했던 여왕 엘리아. 그녀와 완전히 동일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시안이 굳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어찌 됐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숲을 벗어나자.”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그들이 숲 바깥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숲 전체가 범위일 수도 있어.”

가는 길, 거인왕이 얘기했다.

“그 정도로 넓다고?”

“엘리아 본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

과거의 여왕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시안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봉인의 술을 생각했다.

달리는 도중 그가 품속에서 원시 마법을 꺼냈다.

그 청동거울로 빛나는 숲 곳곳을 비춰보았으나.

변화는 없었다.

‘안 되나.’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혹시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고, 이 원시 마법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방도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우리가 벗어나기 전에 술법이 완성되면 어떻게 되지?”

시안이 거울을 다시 집어넣으며 물었다. 물론 다리는 결코 쉬지 않았다.

“어떻게 되긴. 그때 봤던 나처럼 갇혀 버리는 거지. 수십 년이 될지 수백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쯧.”

“제기랄! 나는 무슨 죄냐고!”

혀를 차는 시안 옆에서 헥토르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들어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 세 사람이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숲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얼마나 더 가야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뭣…….”

갑자기 허공이 일그러져 보였다. 그 현상은 일순간이었으나, 시안은 느낄 수 있었다.

아까와 주변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헥토르도 거인왕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젠장.’

봉인이 진행되고 있다. 술법을 구성하는 마나의 흐름이 민감하게 느껴졌다.

불쾌한 마나가 현실을 침식하고 그를 옭매어오고 있었다.

서걱.

실처럼 휘감기는 그것을 시안이 잘라내었다. 그러나 잘라도 잘라도 끝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뿌리가 솟아올라 그를 방해했고 흙바닥에서 골렘이 태어나 그를 붙잡았다.

이 숲의 모든 것이 시안에게 휘감겨 오고 있었다.

그때.

“시안!”

채채챙!

시안의 앞을 막고 있던 장해물들이 순식간에 얼어 깨어졌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유설이었다.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여긴 어떻게……?”

유설이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녀 역시 봉인에서 자유롭진 않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얘기는 나중에. 조금만 더 가면 숲 밖이야!”

“!”

그건 정말로 반가운 정보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 잠기는 것과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

시안이 그녀를 따라 달렸다.

[으으! 이거 진짜 위험한데!]

프시케가 투덜대었으나 유설은 그녀에게 답해줄 여력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 바깥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술법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을.”

그들의 앞에 가르시아가 나타났다.

허공에 뜬 그녀의 옆에는 나무뿌리에 꽁꽁 묶여 있는 거인왕이 보였다. 죽었는지 아니면 기절했을 뿐인지, 거인왕은 축 늘어져 있었다.

“여왕님…….”

유설이 그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가르시아가 유설과 시안을 보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숲이 조여 들어왔다.

동시에 시안의 발밑이 푹 꺼졌다.

“시안!”

유설이 다급히 손을 뻗었고, 시안이 그 손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생겨난 어둠으로 가득한 낭떠러지. 그의 손을 잡아준 유설.

그리고 저 위쪽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르시아가 보였다.

그 가르시아의 옆으로 거대한 나무 하나가 뿌리채 뽑혀 떠올랐다.

뿌리가 한데 모여 뭉치더니, 날카로운 나선의 창을 만들었다.

그 창끝이 향하는 곳은 유설의 머리 위였다.

“……두 번이나 떨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안이 헛숨을 뱉었다. 마룡왕 때에 이어 또 떨어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때는 공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기에 버티는 것만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봉인은, 그렇게 쉬워 보이진 않았다.

시안이 저 높은 곳의 가르시아를 노려보곤, 유설의 손을 놓았다.

“시안!”

유설이 한층 더 손을 뻗었으나 이미 놓은 손이 다시 잡히진 않는다.

‘프시케!’

[젠장, 알았어!]

그런 유설의 손목에서 하얀 냉기가 새어 나와 시안의 소매로 들어갔다.

그건 가르시아도 시안도 보지 못하는, 오로지 유설만이 볼 수 있는 냉기였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시안과 가르시아는 서로를 보고 있었다.

‘가르시아. 아니면 엘리아인가?’

시안이 이를 갈았다.

그는 자유롭고 싶다는 일념으로 후작가에서 벗어났다.

어릴 때부터 십수 년을 갇혀 지냈던 기억. 그 때문에 그는 어딘가에 갇히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끔찍할 정도로.

“후후.”

가르시아가 흡족하게 웃으며 뽑았던 나무를 다시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며 시안이 다짐했다.

‘반드시 돌아온다.’

이깟 봉인쯤 금방 베어 보이겠다고.

그리고, 저 얼굴을 일그러뜨려 주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