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6화
조금 전.
「저 아이는 거인왕입니다.」
가르시아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계시가 있기 전까지는 하얀 머리 꼬마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시안이라는 인간 용병의 동료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계시가 알려주었다.
차를 마시던 가르시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다시 붙잡아 가둘까요?’
꼬마 아이의 상상도 못했던 정체에 깜짝 놀라긴 하였으나 그걸 외부로 표출하진 않았다.
그녀가 침착하게 의견을 구했다.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거인왕은 이미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뿐.
그녀가 시안과 그 옆에 앉아 있는 거인왕을 보았다.
“……죽인 것이 아니었군요.”
동시에 그녀의 주위에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분위기에 이 자리의 모두가 당황했다.
시안과 거인왕은 물론, 이 집에 신세를 지고 있는 유설 역시 당황했다. 여왕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할 줄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 않고.
―콰과과과과광!
거대한 압력이 들이닥치며 터져 나갔다. 거친 얼음 조각들이 비산하며 집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다.
벽이고 천장이고 기둥이고 가리지 않고 갈아버려, 집이 폭삭 주저앉았다.
“큭!”
짙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시안이 뛰쳐나와 뒤로 빠졌다.
한쪽 손으로 거인왕의 뒷목을 대롱대롱 붙잡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가르시아의 공격이 그와 거인왕에 중점적으로 쏟아졌기에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안이 강하게 항의했으나 가르시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방금 얘기한 ‘죽이지 않았군요’라는 말.
“야, 모를 거라매.”
“그것이…….”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거인왕에게 얘기했다.
거인왕이 말문을 흐렸다.
그러나 그것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있어 말을 이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반요정이었어.”
거인왕이 가르시아를 째려보며 얘기했다.
그녀의 주위에서 공기가 흔들리고 있다. 이 혹한의 땅, 그 자체가 그녀에게 복종하듯.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시안이 알기로 빙하백령의 여왕은 전투력이 있지는 않다.
그녀는 상징적인 존재며 정령을 다소 다룰 수 있을 뿐 고위의 마법이나 흉악한 정령술과는 연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선, 소문과는 전혀 다른 위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한테선 그년과 닮은 기운이 느껴진다.”
“…….”
거인왕은 거기까지밖에 얘기하지 않았지만 시안은 그가 얘기하는 존재가 추측이 갔다.
지금껏 같이 여행을 하며 거인왕이 ‘그년’이라 부르는 존재는 단 하나였다.
과거 그를 쓰러뜨리고 봉인했다고 하는 요정.
엘리아.
‘……소문이 전부는 아니란 얘기겠군.’
그때부터 내려오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역시 일국을 다스리는 여왕의 핏줄. 듣던 것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시안 아그리드.”
가르시아가 차가운 눈으로 시안을 불렀다.
시안이 대꾸했다.
“뭐지?”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살의를 품는 존재에게까지 존대어를 써줄 의리는 없었다.
“당신이 거인왕의 봉인을 찾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것도 찾지 못했거나, 혹은 묶여 있던 거인왕을 죽였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설마 살려놨을 줄이야.”
거기에…… 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설마 함께 다니고 있었을 줄은.”
채채채채챙!
그녀가 손짓하자 공기가 얼어붙었다. 시안과 거인왕이 있는 공간이 유릿장처럼 깨어져 나갔다.
시안이 재빨리 흑검을 꺼내고는 허공을 그으며 뒤로 빠져나갔다.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이죠? 당신도 흑마법사인가요?”
가르시아가 도끼눈을 뜨곤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이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라니, 나는…….”
“어이! 주인 놈아, 무사하냐!”
그가 채 대답하기 전에, 한쪽에서 벼락이 쏘아져 가르시아를 강타했다.
파지지지직! 가르시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저 눈짓만으로 헥토르의 벼락을 막아내었다.
그걸 보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악마의 기운이로군요. 이 밀도는 단순히 빌려온 수준이 아닙니다.」
‘최소 강림…… 아니면 본체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가르시아가 시안을 보는 눈에 일말의 빛도 사라졌다.
봉인되어 있던 거인왕을 풀어서 일부러 데리고 다니는 인간. 심지어 그 동료엔 강림한 악마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시안이 그녀의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가르시아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찡그리며 얘기했다.
“나는 흑마법사가 아냐.”
“그러시겠죠.”
가르시아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손을 드니 얼음의 땅이 올라와 거대한 두 마리의 뱀이 되어 시안을 삼키려 들었다.
시안이 백화를 꺼내 들어 그 뱀의 머리를 단숨에 베어 갈랐다.
그사이.
“여왕님!”
“무슨 일이십니까!”
빙하백령의 수호기사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시안 일행을 포위했다.
시안도 거인왕도 헥토르도, 어느새 수호성의 반요정들의 검을 받고 있었다.
“야, 이거 어떡하냐.”
“어떡하긴.”
시안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몇 겹이나 되는 병력이 숲 곳곳에서 그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저 앞에 있는 냉랭한 눈의 여왕과 그 뒤에서 굳어 당황하고 있는 유설.
거기까지 본 후에 시안이 백화를 높이 치켜들었다.
“일단 도망가야지.”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하얀 불꽃에 싸인 글레이브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숲을 크게 갈라놓았다.
경로상에 있던 수호기사들이 기겁하여 몸을 피했다.
그사이, 시안과 일행들은 불꽃 사이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잡아! 잡아라!”
곧바로 수호기사들이 쫓아온다. 그들의 검을 받아넘기며 시안 일행이 숲 바깥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절대 놓치지 마세요.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가르시아가 차갑게 얘기했다.
* * *
카앙!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오는 화살을 시안이 쳐내었다.
오러가 가득 담긴 화살인지라 더없이 묵직한 느낌에 시안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도주하는 그들의 뒤를 수호기사들이 바짝 쫓아와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왔다.
숲에서 반요정들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싶은 일이었기에.
“죽어라!”
아무리 시안이라도 따라 잡힐 수밖에 없었다.
옆쪽 수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검을 찌르는 수호기사.
누가 봐도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으나.
―카앙!
“커헉!”
시안의 검이 단숨에 놈을 쳐내었다. 수호기사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나무 밑동에 세게 부딪혔다.
시안이 혀를 찼다.
“대체 몇 번짼지.”
온갖 사방에서 많이도 덮쳐온다.
심지어 자신들을 앞질러 간 후에 앞에서부터 달려드는 녀석들조차 있었다.
거기에 또 일부 기사들은 주요 길목마다 지키고 서선 대기하기까지 했다.
반요정들을 상대로 숲이라는, 그것도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고향 숲이라는 장소.
더없이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그런 것치고 시안 일행은 잘도 도망가고 있었다.
시안뿐만 아니라 거인왕과 헥토르도 힘을 쓰고 있었기에.
“젠장, 이제 어떡할 거야?”
헥토르가 물었다. 시안이 잠시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선택지는 둘 있어. 가서 오해를 풀 거나.”
시안이 슬쩍 거인왕을 바라봤다.
오해를 푼다는 건 이 녀석을 여왕에게 팔겠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 좋지 않은 것은 그렇게 판다고 해서 오해가 반드시 풀리리라곤 볼 수 없다는 점.
“다른 건?”
“이대로 도망가는 거지. 다음 행선지는 자카르타겠군.”
그냥 국경 바깥으로 도주하는 것.
어차피 자카르타에도 가볼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제국에 들어가기 꺼려지는 상황에서 빙하백령에서까지 이렇다니.
후우.
그가 턱선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에버웨일을 나온 이후, 거의 쉬지 않고 여정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방에는 적들뿐.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이 숲에서 나가고.’
다음은 빙하백령의 국경에서 탈출하고, 그 다음은 저 아래 대륙을 가로질러 남부까지 가야 한다.
까마득하게 여겨질 만큼의 일정이었지만, 시안의 눈은 더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전 상황에 비하면야.’
후작가에 꼼짝없이 감금당해 있던 그때에 비하면, 자신은 훨씬 자유롭다.
아직 장해물들이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상관없다. 모두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삼일이 지났다.
삼일 동안 시안 일행은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계속해서 습격하는 수호기사들을 물리쳐야 했다.
그들이 모든 기사들을 때려눕히다 보니 도중부턴 그들의 작전도 바뀌었다.
힘으로 포박하러 오기보다는, 잠을 재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지치기를 기다린 것이다.
다행히 시안이나 일행이나 삼일 정도는 자지 않아도 거뜬한 몸이었지만.
‘길어지면 위험한데.’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 위험하다.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잠에 들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이 바로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응? 오늘은 습격이 없나 본데?”
“뭐?”
“봐봐. 주변에 기척이 하나도 없잖아.”
늦은 밤, 그리 얘기하는 헥토르를 따라 시안이 기운을 세워보았다.
정말로 인근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진 그들이 자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거슬리는 기운을 쏘아 보내던 수호기사들이었는데.
“그렇다고 자지는 마. 다 방심시키려는 수작이니까.”
시안이 얘기했다.
뻔한 수작이다.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기척을 보내다가 이제와서 감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제 슬슬 자신들이 졸음을 참기 힘드리라 생각해 방심하게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헥토르도 동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그 정도는 아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애초에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건 주인 아냐? 나나 이 꼬마는 잠 정도는 안자고 버틸 수도 있는데.”
헥토르는 악마였고 거인왕은 본래의 육체가 아닌 만들어낸 육체다.
잠에 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었다. 그만큼 피로는 쌓이겠지만.
하지만 시안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직은 괜찮아.”
시안도 아직은 거뜬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앞쪽에서 포위하고 있던 놈들 때문에 이미 이 숲에서 길을 잃은 후였다.
출구의 방향은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길을 찾아서 가고 있긴 했지만, 출구까지 얼마나 걸릴 지는 미지수였다.
‘며칠만 계속돼도 위험하겠는데.’
결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잠을 자면서 헥토르에게 업혀서 도망을 친다든가.
습격자 들이야 거인왕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이렇게만 하면 충분히 수면을 취할 수는 있다.
‘조만간에 시도해 봐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시안이 육포를 물었다. 잘근잘근 씹으며 기나긴 밤을 지샐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파앗!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피어올랐다.
“습격이다!”
“젠장, 또야!?”
헥토라와 거인왕이 툴툴대면서도 즉시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어둑한 밤에 퍼지는 엄청난 광량.
시안 역시 한껏 눈을 찌푸리며 흑검을 뽑았다.
‘어디서 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시안이 어느 사실을 깨달았다.
이 빛은 어느 한 곳에서 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 기대고 있던 나무. 그들이 있는 숲 전체가 빛나고 있었다.
저 뒤쪽에 보이는 세계수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