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2화
여왕이 시안을 불렀다. 그것은 시안에겐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국의 거인들만 처리한 다음에 빙하백령을 뜰 생각이었기에, 여왕을 만나겠단 일정은 전혀 없었다.
그 이전에 애초에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이도 아니다.
요정궁에 사는 여왕은 같은 빙하백령의 백성들조차 만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단순히 신분의 차를 넘어 요정궁 자체가 외부에 폐쇄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고, 그건 자국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들이 그래도 되나 싶을 법하지만, 애초에 반요정들은 스스로의 고향 외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요정궁 아래 빙하백령이란 이름의 나라로 묶여 있긴 하지만, 사실상 반요정들의 마을은 그들 스스로가 통치하는 자치제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자국민에게조차 폐쇄적인 왕궁이란 기형적인 구조가 탄생한 것이다만.
“내가?”
“얘가?”
유진의 전언에 시안은 물론 함께 있던 유연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진이 자신도 납득이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요정궁의 여왕이 일부러 자신을 호출할 이유가 뭐가 있지?
‘거인을 처리해 줘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닐 테고.’
고작 그런 이유로 불렀을 리가 없다.
“일단 따라와라. 안내해 주지.”
“그래.”
유진의 말에 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 나가며 그가 헥토르, 그리고 거인왕을 살짝 쳐다보았다. 그는 한창 하품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역시 저 녀석 때문이겠지.’
여왕이 직접 자신을 부를 정도의 사안이라면, 거인왕을 깨운 일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안이 유진의 뒤를 따라 저택의 지하로 향했다.
깊은 곳. 어두운 지하로 들어가자, 그곳엔 커다란 무언가가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다.”
검고 짙은, 거대한 나무의 뿌리였다.
빙하백령의 영토 정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는 수천 년 묵은 나무.
그 뿌리 중 하나가 이곳까지 뻗어 나왔고, 유 가문은 그 땅 위에 가문을 세운 것이었다.
“왔느냐.”
그리고 뿌리 앞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갈색의 머리와 팔자로 벌어진 콧수염이 인상적인, 까다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
유 가문의 가주인 유상이었다.
“네가 시안 아그리드로군.”
“처음 뵙겠습니다.”
시안을 보는 유상의 눈빛은 빈말로라도 호의적이라 볼 수 없었다.
당장 잡아 죽이고 싶다는 쪽의 적의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눈에 거슬린다는 감정 정도는 되었다.
“어째서 여왕님께서 너 같은 인간을…….”
그가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만이 있으면 여왕 본인한테 말하라지.
“그래서 궁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곳에 워프 게이트라도 설치되어 있나요?”
“쯧. 착각하지 마라. 여왕님이 네놈을 불렀다곤 하나 입궁까지 허가한 것은 아니니까?”
유상이 대놓고 들리도록 혀를 차고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세계수의 뿌리 표면에 은은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손을 대면 여왕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게다.”
“통신구 같은 거군요.”
“그딴 저급한 물건이랑 비교하지 말도록.”
유상이 그리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열린 길을 통해 시안이 뚜벅뚜벅 걸었다. 그리고 빛나고 있는 뿌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 빛이 시안의 몸을 감싸더니, 일순간에 뿌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어둑한 공간.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반요정의 여인이었다.
다른 반요정들보다도 한층 더 투명한 피부에, 귀도 더 길쭉하다.
훨씬 더 요정의 혈통이 짙게 남아있는 것이 겉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잘 오셨어요. 요정궁의 주인인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최대한 선조 요정의 흔적을 많이 남기려고 했던 것인지, 겉모습뿐만 아니라 이름의 형식도 보통의 반요정들과 달랐다.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가르시아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이 한 차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곤 그녀가 작게 손짓을 하니,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폭신한 의자 두 개와 작은 테이블. 모닥불이 타오르는 벽난로가 설치된 작은 벽돌집.
결코 화려하거나 하진 않은, 소박한 풍경이었다.
“앉으세요.”
시안이 의자에 앉았다.
“먼저 감사부터 드릴게요. 거인을 처치하여 저희 백성들을 살려주셨다고.”
“지나가는데 위험해 보여서 잠깐 도와준 것뿐입니다.”
“애초에 거인을 잡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구요?”
“…….”
그 말로 시안은 확신했다. 역시 그녀가 자신을 부른 것은, 거인왕의 봉인 때문이라고.
“알고 계시나요? 사실 과거 거인들을 봉인한 건 저희 선조님이었답니다. 초대 여왕님이신 엘윈 님이시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특별하게 신경을 쏟은 것이 거인들의 왕을 봉인한 마법이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봉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알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놓으셨답니다.”
“현명하신 선조님이시군요.”
“듣자 하니 서쪽의 제국도 아니고 남쪽의 에버웨일도 아니고 동쪽에서 오셨다고?”
“예. 가출하고 여행을 하고 있거든요. 정확히는 가문의 추적자를 피해 다니고 있는 거지만요.”
“그곳에서 거인을 보신 적이 있나요?”
“아뇨. 개미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
거짓말이었지만 어찌 보면 완전히 거짓도 아니었다.
거인들의 무덤에서 그가 봤던 것은 거인들의 사체와 작게 줄어든 꼬마뿐이었으니까.
그런 시안을 보며 가르시아가 생각했다.
‘거인왕을 죽였나?’
거인왕의 봉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알고 있다. 그것에 시안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하지만 시안이나 그 일행이 선조의 봉인을 어찌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수백 명의 규모로 이루어진 대규모 마법이다. 그러나 거인들의 무덤에 그런 대규모 인원이 드나들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 봉인에 이상을 줄 수 있는 수단은 결국, 묶여 있는 거인왕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봉인 대상이 사라진 마법은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니까.
“……이곳에 거인을 잡으러 온 것은 확실한가요?”
“맞습니다. 칠흑마탑이랑 악연이 좀 있어서.”
“…….”
가르시아가 시안에 대해 보고 들은 것들을 떠올렸다.
에버웨일에서 제국군에 반기를 들어 화염거인을 죽이고 학생들을 탈출시켰다. 이곳에 와서도 백성들을 짓밟던 거인을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황상 거인왕도 이 자의 손에 죽었다.
거인을 죽이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는 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희를 도와주지 않으시겠어요? 거인만 처리해주신다면 제국군도 더 이상 방종하진 못할 거예요.”
“의뢰입니까?”
“예. 보수는 충분히 드릴게요.”
시안으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다. 거인들의 위치를 듣고 그것들을 처리한 후 보수를 받는다.
서로의 이익이 일치하며, 복잡하지 않고 심플하다.
“받도록 하죠.”
그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악수가 오갔다.
“유설이 궁에 있다고 하던데. 뭐 때문에 데려가신 겁니까?”
“그냥, 적적해서 친구가 있었으면 해서요. 그 아이도 딱히 집에 있고 싶지 않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궁에서 지내라고 그랬죠.”
“그것뿐입니까?”
“네.”
시안이 가르시아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흑심 하나 없이 순수하게만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시안은 더욱 미심쩍었다.
“그럼 지금도 왕궁에 있겠군요.”
“예. 그녀의 소중한 친구도 함께 사이좋게 지내고 있답니다.”
악수를 나누던 시안의 손이 우뚝 멈췄다.
소중한 친구.
‘설마…….’
그가 가르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 * *
“어땠어?”
“의뢰 형식으로 가기로 했다. 거인의 정보를 듣고 찾아가 해결한 후에 보수를 받기로.”
“용병으로 뛰게 되는 건가.”
헥토르가 끄덕이며 그리 얘기했다. 본디 전쟁통엔 용병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물론 시안이나 그들이 용병 신분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이야 사소한 문제였고.
시안이 거인왕을 보며 얘기했다.
“여왕이 자기 선조가 널 봉인했다는 얘기를 하던데.”
“그래? 용케 그걸 털어놓았네.”
“봉인에 문제가 생긴 걸 알고 있더군.”
“아~ 뭔가 이쪽으로 신호가 오는 그런 마법도 있었던 모양이구만. 하여간 그 할망구는 죽어서도 날 못 괴롭혀 안달이야.”
거인왕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래서, 동족들은 어디에 있다던? 출발할 준비는 다 끝내 놨다.”
거인왕이 배낭을 보여주며 얘기했다. 비어있던 식량과 식수 가방이 가득 차 있었다. 시안이 가르시아를 만나고 오는 사이 보급을 마친 것이다.
보급이라고 해봤자 간단한 건량과 물이 전부였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일단 처음 갈 장소는.”
가르시아에게 들은 것들을 떠올리며, 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채 얘기하기도 전에 거인왕은 답을 알 수 있었다.
―삐이이이이익!
―부우우웅!
갑자기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호각과 나팔 소리. 반요정의 신호 같은 건 전혀 모르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저건 비상 신호였다.
“여기다. 이 요새를 향해 다가오는 거인이 둘이나 있다고 하더군.”
제국군과 같이 거인이 다가오고 있다고, 시안이 그리 얘기했다.
헥토르는 얘기를 듣자마자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고, 거인왕은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오며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선 또 다른 동포를 보내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평소처럼 가볍게 있을 수는 없었다.
―달칵.
“시안.”
그때,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손님방에 유연이 벌컥 들어왔다. 그러곤 손에 든 세 장의 천을 그들에게 던졌다.
“우리들을 도와주기로 했다며?”
“어쩌다 보니. 그런데 이건?”
“변장용 망토야. 수호성 기사들이 입는 거니까 도움이 될 거야. 제국군한테 얼굴 보이긴 싫을 거 아냐?”
“배려가 좋군.”
시안이 웃으며 망토를 둘렀다. 후드가 달려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가릴 수 있는 망토였다.
푸른 망토의 겉에는 요정궁과 수호성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유연을 따라 망토를 두른 세 사람이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달리 빠르고 급했다.
“제국군…….”
나와 보니 이미 전투 준비는 거의 마쳐져 있었다.
말을 탄 제국의 기사들과 그 뒤에 들어서 있는 창과 방패를 든 보병들. 그리고 가장 뒤쪽에 있는 두 명의 거인.
“시니아…… 벨티어…….”
거인왕이 그들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를 힐긋 보고는, 시안이 다시 거인을 바라보았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거인과 돌과 암석으로 된 거인.
“제국의 귀족이란 것이 용병질이나 하고 있다니.”
언제 다가왔는지 유진이 시안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저 뒤쪽으로 병력을 정비하다 이쪽을 바라본 유상의 눈빛도 느껴졌다.
“우리 쪽 기사들도 거인을 상대하러 갈 텐데, 부디 방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유진의 말에 시안이 다시 한번 거인왕을 힐긋 보았다.
그러곤 내심 칼을 갈고 있는 유진에게 얘기했다.
“너희는 손가락 하나 댈 일 없을 거다.”
그의 손목에서 밤의 기운이 풀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