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0화
목에 칼이 드리워지자 노인이 적잖게 당황했다.
그러나 나름 노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이내 표독스런 빛을 뿜어냈다.
“이놈이!”
노인이 눈을 번뜩이더니 팔을 휘둘러 시안의 검을 걷어냈다. 캉! 팔뚝이 꼭 바위처럼 단단했다.
시안에게서 벗어나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노인이, 손을 돌렸다.
그러자 두두두두, 땅이 흔들리더니 수많은 가시가 솟아올라 시안을 공격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노인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짙은 회색의 마나의 막이 생겨나, 땅을 완전히 뒤엎으며 시안에게로 쏟아졌다.
‘됐다!’
바위에 파묻힌 시안을 보며 노인이 웃었다. 멍청한 녀석, 뒤를 잡았으면 시간을 주지 말고 그대로 검을 그었어야지.
마법사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그대로 골로 가기 일쑤다.
그러나, 오히려 방심한 것은 노인이었다.
-쾅!
바위를 뚫고 시안이 튀어나왔다. 그가 섬을 밟으며 노인에게 돌진했다.
노인은 채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그가 한 번 눈을 깜빡인 순간, 시안의 검은 이미 노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컥!”
노인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으며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사라지고 있군.’
노인에게서 느껴지던 지옥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일전에 해령군주가 도망가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해령궁주는 강림 직전까지 갔다가 도망가느라 꼬리가 잡혔다면, 이 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힘을 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라비가 제대로 기운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강림을 시도하지도 않았다면 라비를 알아봤을 리 없을 텐데.’
그걸 생각해보면 해령궁주처럼 라비를 보고 도주한 것이 아니라, 그냥 노인을 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애초에 노인을 그냥 졸개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쯧.”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시안이 검을 뽑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노인의 시체가 풀썩 엎어졌다.
대충 살핀 바로는 땅을 움직이는 녀석처럼 보였다. 놈의 기운을 제대로 빨아들였다면 새로운 검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가 검의 피를 닦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쭈그리고 앉은 거인 칼도르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거인왕.
‘싸울 의지는 없어 보이는군.’
이곳까지 오면서 거인왕이 호언장담한 대로, 칼도르는 거인왕에게 반항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앉아 마주하고 있을 뿐.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맡겨달라고 했으니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을 것 같은데.”
시안이 그에게 물었다.
일전에 거인왕은 그에게 얘기한 바 있다.
-네 목적이 거인을 막는 것이라 했었지? 내게 맡겨주지 않겠나?
한 번만 맡겨 달라고. 만약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 손을 써도 좋다고.
“조금만 얘기를 하고 오지.”
거인왕이 그리 얘기하곤 칼도르와 자리를 가졌다.
“왕이시여…….”
“오랜만이구나, 칼도르. 그간 어땠느냐?”
“어땠겠습니까.”
칼도르가 피로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거인왕이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인간 놈들에게 조종이라도 당한 것이냐?”
“그들이 얘기했습니다. 왕이 북쪽에 있을 거라고. 그러니 우린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고.”
“거짓말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 나는 동쪽 땅에 있었다.”
거인왕의 말에 칼도르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거짓일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머리가 나빠서 그들을 따르는 방법 외엔 왕을 찾을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
거인왕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도르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 시대는 이미 거인이 멸망해 인간과 반요정, 수인이 자리를 잡은 세계다.
칼도르가 만약 자유로웠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 무슨 연고가 있어 행방 모를 자신의 위치를 찾아내겠는가.
괴물이라고 토벌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다행입니다. 드디어 왕을 찾았군요.”
“그래, 내가 왔다. 너희들의 마지막을 살피러.”
거인왕이 그리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곤 칼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괜찮으십니까? 모처럼 얻은 두 번째 삶인데.”
“우리의 본의로 얻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이미 이 시대는 우리의 시대가 아니다.”
과거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패잔병인 그들은 처형되지 않고 봉인되었다.
그들을 패배시켰던 이들의 수장들, 그중에서도 특히 요정여왕의 손에 의해서.
그 여자가 어째서 거인을 죽이지 않았는지 거인왕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아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삶은 이미 그날로 끝이 났다는 것.
이 이상 연명해 봐야 괴로운 경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하, 거인들의 무덤에서 오랜 세월을 갇혀 살며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동포를 떠나보내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칼도르가 고개를 숙였다. 왕을 찾아 그 뜻을 듣게 된 그는 이 이상 미련이 없었다.
지하에서 오랜 세월을 고독하게 연명했던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이윽고 칼도르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쿵- 그의 몸이 천천히 땅에 스러져 갔다.
거인왕이 그 시체에 손을 대니, 이윽고 작은 모래알갱이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 모래가 향하는 곳은, 동포들이 묻힌 동쪽 땅이었다.
“외롭진 않을 게다.”
거인왕이 흩날리는 모래알 중 한 톨을 손에 쥐고 주먹을 쥐었다.
그 뒤로 시안이 다가왔다.
“싸움이 일어나진 않았군.”
“칼도르는 예전부터 날 잘 따르는 아이였거든.”
그와의 추억을 생각하는 것일까. 거인왕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꽃피었다.
“다만 앞으로도 다 이렇게 잘 풀리란 보장은 없다.”
“그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있으면 안 듣는 아이도 있기 마련이지 않겠느냐.”
“……일리 있군.”
시안이 혀를 찼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전투를 해야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좋다. 대부분은 착한 아이들이니까.”
거인왕이 그리 얘기하며 허리를 쭉 펴며 하늘을 보았다.
시안이 검을 각인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결국 거인왕을 데려온 것은 정답이었다.
“자, 가자. 다음은 어디냐?”
아직도 방황하는 동족은 너무도 많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호성의 기사들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서 마차에 타고 있었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인들에게 죽을 뻔한 입장을 구해준 것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시안과 거인왕, 그리고 헥토르. 어딜 봐도 제국의 인간들로 보이는 그들의 외형 때문이었다.
“선임 기사인 비윤입니다. 잠시 괜찮으십니까?”
이곳에 파견 온 기사들 중 가장 선임 기사가 시안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은인분들께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잠시 따라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죠?”
“잘 아시겠지만 현재 저희 나라는 제국과 전쟁 중이라, 인간 여행자를 만나면 무조건 조사를 하라는 명령입니다.”
제국과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이 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 스파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에 내려온 명령이었다.
“가시는 길 불편함 없게 모시겠습니다.”
다만 비윤이 보기에 이들은 결코 스파이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제국의 스파이라면 굳이 자신들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일부러 신뢰를 얻기 위한 자작극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인을 죽이면서까지 자작극을 벌일 리가 없지.’
그건 득보다 실이 훨씬 더 큰 일이다. 제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작전을 펼칠 리 없었다.
“좋습니다. 마침 저희도 전쟁의 일로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어요.”
“묻고 싶은 것이요?”
“거인이 어디에 더 있는지.”
시안의 대답에, 비윤이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면 거인을 없애기 위해 온 이들이란 말이다.
그건 지금의 빙하백령에겐 호재나 다름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던가?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들의 보답으로 시안 일행은 정중하게 요새까지 안내되었다.
말을 타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시안이 거인왕을 보았다.
아까 그가 칼도르와 한 얘기 중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너희가 봉인된 거, 본의가 아니었다는 게 사실이냐?”
“응? 그래, 맞다. 완전히 패배해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그놈들이 멋대로 지하에 가둬놓았지.”
“그놈들?”
“너희들의 영웅들 말이다.”
당시 거인들에게 맞서 들고 일어났던 많은 영웅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을 세운 여왕이 가장 극성이었지.”
거인의 봉인에 가장 열을 내던 것이 그녀였다.
인간의 영웅이나 수인들의 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 잡아 죽여야 되지 않겠냐 하였지만, 요정여왕이 그런 그들을 설득했다.
대체 어떤 연유가 있어, 그리고 어떻게 설득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는 모두 거인왕이 직접 경험했던 일이었다.
“고대 요정궁의 여왕이라…….”
의외였다. 고대의 거인들을 아직까지 봉인하고 있을 정도의 마법이니, 뛰어난 대마법사가 행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게 요정궁의 여왕이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현대에도 요정궁의 여왕은 뛰어난 마법사로 이름이 높다.
그 선조가 희대의 대마법사라 하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옛이야기를 들으며 수호성들을 따라가고 있으려니, 시안 일행은 그들의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새라는 이미지에 맞지 않게, 특이하게도 성벽이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요새가 맞았다.
양옆에 펼쳐진 얼음 절벽은 깎아낸 것처럼 가팔랐고, 반요정들의 도시는 반쯤 절벽에 파고들어 있었다.
바깥에 주거지와 생활공간이 세워져 있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엔 절벽의 얼음굴로 들어가 농성할 수 있는 구조.
절벽이 너무 가팔라서 이 길을 통하지 않으면 뒤쪽으로 갈 수도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유 가문이 다스리는 땅 중 하나입니다. 이 근방의 국경을 모두 담당하고 있는 사령부죠.”
비윤의 말에 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유 가문이라면 그나마 그와 작은 연고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
유설과 유연이 속한, 그리고 과거 한 번 스쳐 지나갔단 유진이 있는 가문.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그러나 환영을 받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느낀 분위기상, 유설은 가문에서 그리 입지가 좋지 못해 보인다.
유연은 자신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이였고, 유진과는 만남이 좋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
전쟁이라고 하는 국가의 대소사에 연관된 일이다.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을 것이다.
“들어오시죠. 먼저 가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얼음 절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