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9화
시안이 청동거울을 들곤 봉인의 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헥토르와 거인왕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찾았어?”
“헹, 그런 게 있을 리가. 고대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놓은 봉인을 너 같은 어린 칼잡이가 어떻게 깬단 말이냐?”
거인왕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말은 안 했지만 헥토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헥토르가 거인왕 쪽을 힐긋 눈짓하며 시큰둥하게 얘기했다.
“그러면 선택지는 하나뿐이군. 이놈 목을 딴 후에 심장을 가져가자.”
“헉!”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기억이 났는지 거인왕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곤 뒷걸음질을 치며 시안과 헥토르를 향해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시안이 들고 있던 청동거울을 보여주었다.
“걱정 마라. 봉인은 제대로 옮겨왔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거인왕이 시안이 들고 있는 청동거울을 보았다.
“원리는 나도 몰라. 하지만 방에 있던 고대 마법은 모두 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로!?”
거인왕이 크게 놀라며 스스로에게 매여진 사슬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보다 사슬이 조금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하다.
본래는 옥좌 주위에만 빠듯하게 매여 있었는데 지금은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확인할 차, 그가 봉인의 방까지 달려갔다.
이전까지만 해도 봉인의 사슬 탓에 들어가지 못했던 방.
“진짜잖아!”
고대의 마법이나 문자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빈방을 보며, 그가 기쁜 듯 소리쳤다.
그간 자신을, 이 아무것도 없는 지하에 매어 놓았던 증오스러운 마법. 그게 사라져 있었다.
“으하하하하!”
거인왕이 크게 광소했다. 오랜 세월 죽지 않고 버텨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드디어, 저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봉인이 사라진 건 아니다만.”
어느새 들어왔는지 시안이 들어와 얘기했다.
거인왕도 잘 알고 있다. 봉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안이 들고 있는 청동거울로 옮겨갔다는 것을.
저 거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고위의 물건임은 분명했다.
결국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정도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이 퀴퀴한 지하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가 시안을 바라보았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고 했지?”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도록 하마. 대신 내게 지상을 보여다오. 저 밖의 푸른 하늘을.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오래전 아직 젊었을 때는, 야망이니 뭐니 이런저런 것에 얽혀 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와선 다 옛날 일이다.
지금의 그에게 남아 있는 욕망은 단 하나. 저 넓은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는 것.
“어려운 일은 아니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헥토르와 비슷한 소원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봉인의 방에서 나왔다.
“얘기는 다 정리됐냐?”
“그래. 우리랑 같이 가기로 했다.”
헥토르가 거인왕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거인왕이 그 손을 맞잡았다.
“악마 녀석들과 다시 손을 잡게 될 줄이야.”
“난 거인이랑 행동하는 건 처음인데.”
“그래?”
“그때는 딱히 지상에 관심이 없었어서, 동굴에 박혀 있었거든.”
세 사람이 유적을 뒤로했다. 다만 거인왕은 떠나기 전 뒤처리할 것이 많았다.
먼저 유일하게 남아 있던 본래의 육체의 흔적인 심장. 그 심장에서 기운을 뽑아내 지금의 작은 육체에 담았다.
“으으……. 이 작달막한 몸에 심장을 담자니 불안하긴 하지만.”
“두고 갈 순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다음 할 일은, 양옆에 늘어서 있는 거인들의 사체들.
한때 그를 따랐던 동포들 앞에서 침묵하는 일.
동포들의 시체를 지켜보는 그를 두고 시안과 헥토르는 미리 지상으로 올라왔다.
유적 입구 근처의 나무 그늘에서 육포를 뜯고 있으려니, 거인왕이 터벅터벅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가 유적의 입구를 향해 발을 한번 굴렀다.
―쿠르르르르릉!
그 한걸음에 산이 울릴 정도의 커다란 지진이 일었다. 지진의 여파는 온전히 지하의 유적으로 향했고, 이내 유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거인왕은, 동포의 시체를 모조리 매장했다.
“다 끝났나?”
“그래.”
“다른 동포들은?”
“이곳엔 없다. 이 동쪽 땅에 남아 있던 녀석들은 저걸로 마지막이야.”
어째서, 칠흑마탑이 찾아낸 다른 거인들과 달리 이곳의 거인들은 모두 시체였는가.
그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인왕은 무너진 유적을 보며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만 가자. 어디로 갈 것이냐?”
“일단 켈드윈으로 가서 보급부터 해야지.”
“켈드윈? 도시 이름이냐?”
이내 세 사람이 거인이 묻힌 유적을 뒤로하고, 인간들의 세상으로 향했다.
* * *
“이제 떠나는 것인가?”
“예.”
켈드윈에 들러 몸을 씻고 식량과 식수를 챙기고. 한나절 내내 수면을 취하고 나서야 그들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러 시장이 나왔다. 참고로 반 아슬라는 이미 옛적에 자카르타로 돌아간 후였다.
시장이 시안과 얘기하며 슬쩍 거인왕을 보았다.
분명 이전에는 시안과 헥토르 둘뿐이었는데, 못 보던 일행이 생겼다.
웬 사슬에 감겨 있는 꼬마 아이.
“뭘 꼬나봐?”
쳐다보고 있으려니 거인왕이 그리 말하며 쏘아보았다.
입도 험한 꼬마다. 시장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오랜 경험으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괜한 호기심은 명을 재촉한다는 것을.
“어디로 갈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나?”
거인왕을 데려왔으니 향할 곳은 하나밖에 없다. 제국이 한창 침략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장소.
다만 빙하백령과 자카르타, 두 곳 중 어느 곳을 먼저 갈지는 어제 정해놓았다.
“빙하백령으로 갈 생각입니다.”
“북쪽이군.”
어제 쉬기 전에 도시를 돌며 정보를 얻었다.
전쟁 자체는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나 양쪽 모두 치러지고 있으나, 빙하백령 쪽이 더 위태롭다고 한다.
수인들은 게릴라 작전으로 많이 버티고 있고 거처가 파괴되어도 큰 문제 없이 이주가 가능하다. 애초에 정처 없이 떠도는 종족이었으니.
그러나 반요정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평생을 사는 이들이다. 그랬기에 침략자들에게 더욱 취약하다고 한다.
“몸조심하게.”
“시장님도, 도시가 무사히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허허, 고맙네.”
시장과 작별을 하곤 시안과 헥토르, 그리고 거인왕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쪽 땅의 국가, 빙하백령. 반요정들의 국가.
일단 향할 곳은 그곳이었다.
“그 할망구가 세운 나라인가…….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오르는군.”
“할망구?”
“그런 게 있다. 날 제일 괴롭혔던 녀석.”
거인왕이 그리 중얼거렸다.
고대의 존재. 지옥계에만 박혀 있던 헥토르와는 달리 지상에서 직접 활동을 하였던.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겠군.’
들을 것이 많았다.
* * *
빙하백령의 영토 중에서도 비교적 외곽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끼리의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던 이 마을을, 웬 거인 하나가 짓밟고 있었다.
“막아!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2번대는 빨리 피난 준비를!”
그 거인을 십수 명의 반요정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요정궁에서 출동을 한 수호성 소속의 기사들.
한 부대가 거인의 발을 묶고 있는 동안 나머지 부대는 주민을 불러 모아 대피를 준비했다.
“아악! 안 돼요! 여긴 조상들로부터 수백 년을 살아온 땅인데 어딜 벗어난단 말입니까!”
“목숨이 더 중하지 않습니까!”
“난 못가요 못가!”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일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이 땅에 수백 년을 뿌리박고 살아온 그들에게,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퍽!
굳은 표정의 수호성들이 그런 주민들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데려가 앉혔다.
그들 역시 같은 반요정이다. 고향을 버려야 하는 이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백성들을 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한다!”
“네!”
일사불란한 수호성들의 움직임에 이내 마을의 모든 주민들을 마차에 태우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불타는 도시를 뒤로하곤 요정궁으로 향했다.
마차에 탄 주민들은 멀어지는 고향을 보며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미처 슬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머, 멈춰!”
바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수호성들이 기겁하며 마차를 멈췄다.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검은 로브의 노인. 그 뒤쪽으로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길이 완전히 쩌억 갈라져 있었다.
다리가 없다면 도저히 건너지 못할 정도의 넓이로.
“큭! 비켜라!”
“싫은데?”
검은 로브의 노인이 손바닥을 펴더니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쿠구궁, 거리며 뒤쪽에서 벽이 더욱 솟아올랐다.
그렇게 앞쪽이 막힌 사이에.
“크허어엉!”
어느새 뒤에서 거인이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앞쪽엔 정체 모를 마법을 쓰는 노인과 벽이, 뒤쪽엔 거인이.
완전히 막혀버린 상황에 수호성들이 당황했다. 마차에 탄 주민들은 덜덜 떨며 서로 얼싸안은 채 바깥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죽여라, 칼도르.”
“크헝!”
노인이 손가락을 까딱하니 칼도르라 불린 거인이 마차로 다가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커다란 발로 밟아버릴 듯 위협적인 모습.
그를 막기 위해 수호성들이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때.
“어허!”
그들 사이에, 분위기에 맞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지어 어린애의 목소리였다.
“칼도르 꼬맹이가 이렇게나 자랐구나.”
목소리의 정체는 정말로 어린애였다.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며 팔에 사슬이 감겨 있는 어린아이.
칼도르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갸웃거렸다.
“누, 구……?”
느릿하게 얘기하는 거인. 그러자 꼬마 아이가 거인에게 다가가더니.
“네 왕이다, 이놈아.”
빠악!
정강이를 후려 찼다.
그러자 모든 이의 눈을 의심케 할 일이 일어났다.
“아악!”
인간의 기준으로도 자그마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발길질 한 번에, 저 커다란 거인이 정강이를 붙들며 쓰러진 것이다.
수호성들이 눈을 크게 떴고, 마차 안의 주민들이 조심조심 창밖을 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것은, 거인을 불러온 노인이었다.
“뭐, 뭐냐! 누구냐 넌!”
노인이 당혹스럽게 소리치며, 동시에 반사적으로 양손에 힘을 모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넌 이쪽에 볼일이 있을 거 같은데.”
“헉!”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노인의 뒤를 잡은 괴한이, 흑검으로 노인의 등을 살짝 찌르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심장이 관통할 위치로.
노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이름이랑, 네가 계약한 악마가 누군지부터 말해봐.”
뒤쪽의 괴한, 시안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