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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8화 (12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8화

거인왕이 몸을 일으켰다.

하얀 머리칼의 소년. 겉으로는 작은 아이에 불과했지만 마나의 떨림이 심상치가 않았다.

유적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양옆의 수많은 거인들의 시체가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듯 느껴지며, 바닥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시안과 헥토르가 단단히 방비를 취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주로 시안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거인왕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카랑!

사슬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우뚝 멎었다.

당장에라도 짓쳐 들어올 공격에 대비하던 시안과 헥토르가 눈을 찌푸렸다.

표정이 안 좋은 건 거인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그가 어떻게든 옥좌에서 벗어나 보려, 혹은 마나를 움직여 공격을 해보려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러나 어느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요동치던 마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고 흔들리던 유적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를 가둔 봉인은 그가 옥좌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리고 멋대로 힘을 써서 유적을 파괴하는 것도 모두 금하고 있었으니.

이윽고.

거인왕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

“…….”

그곳엔 어느새 다가왔는지 시안과 헥토르가 거인왕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너희들 허튼짓하지 마라. 이 나를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으냐?”

거인왕이 뒷걸음질을 치며 얘기했다. 내용은 당찼으나 목소리의 떨림은 숨기지 못했다.

헥토르가 히죽 웃으며 얘기했다.

“이번엔 좀 편하게 가는데?”

“그러게.”

시안이 끄덕이며 조용히 검을 들었다.

번뜩이며 날이 서 있는 검을 보며 거인왕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거인왕은 옥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녀석에게선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기개가 새어 나왔다.

목에 칼이 들이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른다. 난 아무것도 몰라!”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는데.”

“어쨌든 모른단 말이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든지!”

그 말에 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에 그가 오러를 일으켜 거인왕의 목 피부를 살짝 베려고 했다.

캉!

그러나 실패했다.

분명 오러를 씌운 검인데도, 마치 날 없는 쇳덩이로 바위를 치는 것마냥 손만 아려왔다.

이 정도로 단단한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년의 후인에 악마에, 너희 같은 놈들한테 협력해 줄 성싶으냐?”

그 단단한 신체를 믿고 있는 것인지 거인왕이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쳤다.

헥토르가 악마인 것을 단박에 알아채는 것은 둘째 치고,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봉인 탓에 녀석이 이쪽을 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쪽도 녀석을 해할 방법이 없었다.

“후인이라고 하는데, 그녀라는 게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몰라.”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거지? 아니, 이 봉인을 만든 누군가는 왜 너나 다른 거인들을 죽이지 않고 봉인만 시킨 거냐.”

“몰라!”

적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기개.

그건 좋았지만, 겉모습이 어려서 그런지 떼쓰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이쪽이 심문하는 입장이란 것도 큰 문제였고.

‘어떡한다…….’

확인해 본바 녀석의 피부는 정말로 단단했다. 그냥 단단한 정도가 아니라 전력으로 오러를 일으켜도 생채기나 낼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정말로 거인왕이란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녀석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 돌은 뭐야 근데.”

한편 거인왕의 심문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헥토르는, 옥좌 뒤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어지간한 집 몇 채를 합쳐놓은 것만큼 거대한 바위. 그걸 톡톡 두드리며 헥토르가 중얼거렸다.

“앗! 그거 만지지 마!”

거인왕의 외침에, 한 번 더 두드려 보려던 헥토르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보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내가 한 건 했나 본데?”

거인왕이 식은땀을 흘리고, 시안이 검을 거두었다.

“그래, 잘했다.”

거인왕 본인을 위협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그러나 저 바위는 달라 보였다.

시안이 바위로 다가가는 것을 보며 거인왕이 침을 삼켰다.

저것은 그냥 바위가 아니다. 그가 온존하고 있는 그의 심장이었다.

육체는 허물어지고 이런 작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나, 그의 힘과 생명력이 담긴 심장만큼은 아직 건재하였으니.

쉽게 말해 저게 진짜 그의 목숨줄이란 말이었다.

“멈춰!”

시안이 바위에 다가가자 거인왕이 크게 외쳤다.

그 손에 들린 검이 당장에라도 심장을 난도질할 것 같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재구성된 그의 이 작은 육신은 과거의 육신만큼이나 단단하였으나, 시장은 그렇지 못했다.

시안 정도의 검사가 베면 그냥 죽는다.

“뭐가, 뭐가 묻고 싶은데?”

한풀 꺾인 목소리에 시안이 흡족하게 검을 내렸다. 그러곤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묻고 싶은 거야 그야 이것저것 많이 있다.

고대 시대의 장본인이기도 하니 단순 역사적 호기심부터 시작해서, 라비와 관련이 있는 지옥과 네메시스란 자의 일까지.

그러나 당장 묻고 싶은 건 이것이었다.

“아틀란타가 얘기하더군. 동쪽 땅에서 왕을 찾으라고.”

“아틀란타? 그 녀석을 만났나?”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너는 아직도 거인들의 왕인가?”

“당연하지. 나의 옥좌는 아직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는 거인왕. 헥토르가 옆에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거인들은 제일 센 놈이 왕 먹거든.”

인간들처럼 혈통이나 그런 걸 따지진 않는 모양.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했다.

“그럼 다른 거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겠군.”

거인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시안은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상당한 패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 * *

시안이 이곳 거인들의 무덤에서 지낸 지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 반년 동안 제국의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나기는커녕 빙하백령과 자카르타의 영토를 일부 침략하는 데 성공하여, 일부에선 아주 축제 분위기라고 한다.

그 일부란 아마 전쟁을 주도한 황실과 고위 귀족들의 얘기겠지.

‘제국이 그렇게 기세등등하면 곤란하단 말이지.’

시안 입장에서 제국의 힘이 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가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으니까.

그로서 가장 좋은 상황은 이전처럼 삼국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 상태. 그 상태에서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 중 한 곳에 망명하는 것.

그게 그가 그리고 있는 방향이었다.

때문에 두 나라의 영토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리고 제국의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시안에겐 좋지 않았다.

‘제국이 전쟁을 그만두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말로 들을 이들이 아니다.

그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

제국을 든든히 지원하고 있는 거인들을 빼앗는 것은, 여러 방법들 중에서도 아주 훌륭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데려간다…….’

시안이 그런 고민을 하며 거인왕을 살폈다.

그를 묶고 있는 사슬은 옥좌 뒤쪽의 바위를 둘러싸며 통과해 한쪽으로 뻗어 나가 있었다.

그것들을 한차례 살펴보곤 그가 바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죽일까?”

그 중얼거림을 들은 거인왕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해서 죽고 싶을 리가 없었다.

“이 내가, 거인왕이 필요한 일이 있는 것 아니냐!?”

“제일 센 놈이 왕 한다며? 널 죽이면 내가 곧 왕이 되는 것 아닌가?”

“다, 당연히 거인들 중에서 센 놈 얘기지! 다른 종족을 왕으로 추대할 리가 없지 않느냐!”

“쳇.”

시안이 진심으로 혀를 차는 것을 보곤 거인왕이 부르르 떨었다. 이, 이 사악한 악마 같으니라고!

그를 일별하곤 시안이 생각에 잠겼다.

‘거인들을 수월하게 멈추기 위해선 어떻게든 데려가서 명령을 내리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명령이고 뭐고 거인왕의 힘을 흡수한 다음에 제국의 거인들을 모조리 때려잡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벌써부터 선택할 만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아틀란타 때도 그의 모든 힘을 온전하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인왕도 마찬가지.

녀석의 힘을 흡수하면 다소는 강해지겠지만, 거인왕 한 명을 온전히 부리는 것보다는 이득이 적었다.

‘그래도 최후의 방법으론 남겨 놓자.’

헥토르 때와 똑같은 일이다. 헥토르의 힘도 온전히 모두 빼앗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전한 상태의 녀석을 부리는 쪽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판단에.

실제로 그건 잘 들어맞아서 헥토르는 지금까지 자신의 아주 좋은 노…… 동료가 되어주고 있었다.

거인왕도 당장은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될 테지.

“…….”

“…….”

헥토르와 거인왕이 알 수 없는 오한에 부르르 떨었다.

“봉인을 어떻게 해야겠군.”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곤 시안이 사슬을 따라 바위 뒤쪽으로 향했다.

마법은 전공이 아닌데……. 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사슬이 나오는 장소를 찾았다.

바위 뒤쪽에 있는 한 방이었다.

‘봉인의 방인가?’

방의 모든 벽과 바닥, 천장에 빼곡히 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 문자 하나하나가 완성된 하나의 마법. 그런 문자가 수천, 수만 자가 모여 거인왕을 구속한 사슬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

“전혀 모르겠군.”

애당초 현대의 마법도 교양 수준의 겉핥기 지식 정도나 알지,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그다.

고대의 마법을, 그것도 거인왕을 지금까지 봉인할 정도의 최고위 마법을 한눈에 알아볼 리가 없었다.

‘역시 죽이는 수밖에 없나?’

봉인을 어떻게 이용하여 데려가는 것이 최선의 상황이지만, 그게 안 된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

그냥 내버려 뒀다간 칠흑마탑 쪽에 붙을 수도 있으니.

놈들은 거인을 부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거인왕을 발견하면 곧바로 포획하지 않겠는가.

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가슴께가 밝게 빛이 나며,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안이 바로 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었다.

천으로 감싼 청동거울, 원시마법.

그 거울이 밝게 빛나며 천을 뚫고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건…….’

원시마법. 마룡왕이 말하길, 본래 본인의 것이었다던 물건.

다음 순간, 시안은 칠흑마탑이 어떻게 거인들을 조종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방에 있던 수많은 고대 문자들이, 거울에 비치자 그곳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시안은 방의 모든 문자들이 거울에 비칠 수 있도록 움직였다.

이윽고, 청동거울이 고대 문자들을 전부 빨아들였다.

그와 함께 문자들이 형성하던 사슬 역시 거울에게 옮겨오게 되었다.

“오.”

시안이 감탄했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아마 마룡왕의 마법이겠지.

칠흑마탑이 거인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마 이와 비슷한 마법을 마룡왕이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아득바득 이걸 회수하려 했던 이유가 있었군.’

시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텅 비게 된 봉인의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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